소나무

by 꿈꾸는 소나무

달빛을 온몸에 흠뻑 적신 소나무가 잔디 위에 검은 나무를 만든다. 고풍스러운 소나무의 그림자가 검푸른 잔디와 어우러져 마치 한바탕 블루스라도 추려는 기세다.


2006년 주말농장을 시작하며 넓은 땅에 어린 소나무 여러 그루를 심었다. 십 년 동안 훌쩍 커버린 소나무들 대부분은 새로 산 땅임자에게 주고, 남은 땅의 소나무 몇 그루를 잘 가꿔 그중 한 그루를 새집으로 옮겨왔다. 왼쪽으로 배롱나무 두 그루, 오른쪽으로 키 작은 단풍나무와 꽝꽝나무, 아래 올망졸망한 것들을 심었지만 군계일학은 단연 소나무다. 아래 가지를 자르고 덥수룩한 솔가지들을 쳐주니 빨간 담장 위로 하늘을 향해 파랗게 솟아 있는 소나무는 그 기상이 드높았다. 하지만 왠지 시들시들하고 힘겨워 보인다. 새로운 곳에 시집와서 적응하느라 힘들다고 해도 좀 지나치다 싶게 잎들은 생기를 잃고 껍질도 버석버석하다.

달빛이 자취를 감춘 날도 소나무는 자신의 검은 긴 그림자를 잔디 위에 드리우고 그렇게 서 있었다. 한밤중 서재에서 소나무의 보며 크고 늘씬한 그림자가 참 멋지다고 생각하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커다란 전봇대 위 전구가 환하게 소나무를 비추고 있었다. 아, 그래서 달빛도 자취를 감추고 별빛마저 떠나버렸을 때도 어찌할 수 없는 불면의 밤을 그림자로 비춰냈구나.

남편에게 가로등 때문에 소나무가 밤에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것도 제 운명인 게지. 시큰둥한 대답만 돌아왔다.

‘구청에 전화해야 하나? 아니 우선 동사무소에 가로등 담당을 물어봐야겠어.’

‘공무원들이 얼마나 바쁜데 그래. 개인 집 나무에 신경이나 쓸 것 같아?’

남편은 콧방귀를 뀌었다.

전화를 받은 동사무소의 여직원이 대뜸 집 주소부터 물어본다. 오실 때 꼭 연락 주세요. 라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득달같이 공무원 두 명이 전봇대의 전등을 살펴보러 왔고, 가로등 위치를 바꿔줄 수 있느냐는 말에 가타부타 없이 사진만 몇 컷 찍고 가버렸다.

실망하여 큰 기대 없이 며칠이 지나간 어느 날 밤 문득 소나무를 보니 그림자 없이 조용히 숙면을 취하는 듯 보였다. 마당의 잔디도 어둠 속에 고요하다. 서둘러 전봇대를 보니 가로등이 길 쪽으로 돌아앉아 기다란 갓을 떡하니 쓰고 있었다.

야간에 6시간 이상 조명에 노출된 소나무는 그 호흡량이 증가하고 이는 생장량과 탄소저장량 감소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동안 가로등으로 인해 밤새 조명에 노출된 소나무의 호흡량이 증가하여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던 것이다.


딸애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성적표가 ‘매우 잘함’ 일색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여기저기 학원을 수소문하였다. 거실에는 소파를 없애고 커다란 원형 책상과 의자를 들여놓고 방학 때면 매일 붙들고 서너 시간씩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마지못해 앉아서 형벌 같은 시간을 견뎌내며 딸애는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마치 생장량이 감소하는 소나무처럼.

농장에 심은 어린 소나무들에게 애써 관심을 기울이며 딸애를 향한 지나친 조명을 거둬들였다. 적절한 관심과 보살핌 그 이상은 오히려 딸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 나의 욕심인 것이다. 처음에 욕심을 거둬들이기 시작한 건 나의 교육관이 바뀌었거나 거창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안 되는 것을 알아서이다. 주말농장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교육자로 살아오면서 학생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보다 좀 더 발전시키고 개선시키고자 애썼던 지난날도 돌아보게 되었다.

가냘픈 어린 소나무가 쑥쑥 자라 넓게 뻗어 나가는 가지를 보는 것이 크나큰 기쁨을 주었다. 마침내 솔방울을 달며 한 그루의 나무로 우뚝 선 그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주말농장으로 자연과 함께 한 십여 년의 생활은 내 마음을 서서히 바꿔 놓았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면서 고요한 평온이 찾아왔다.

언젠가 딸애가 부모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을 많이 자책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설픈 엄마의 시행착오를 눈치채지 못한 그 애는 무던히 지켜봐 준 부모가 감사하다고도 덧붙였다. 가슴 한편이 아리며 미안한 마음이 밀려온다.

이제 소나무는 자리를 완전히 잡고 파란 잎에 솔방울도 매달고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굵고 튼실한 줄기에 거북이 등처럼 파인 선들이 그동안의 세월을 말해준다. 비바람과 폭설도 견디며 굳건해진 것들을 슬그머니 만져 보았다. 딱딱하고 견고한 껍질이 인고의 세월을 겪어낸 노스승 같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내 손길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듯 푸르른 솔잎들이 살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