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흔적, 체코 보헤미아의 타보르를 방문하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약 20여분을 운전하면 아름다운 중세도시 '타보르(Tábor)'를 만난다.
체코어 "Tábor"는 "진영" 혹은 "야영지"를 의미하는데, 이 이름은 15세기에 후스 전쟁 당시 종교개혁 세력인 후스파(Hussites)들이 이곳에 요새를 세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타보르의 올드 타운은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과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일요일 아침, 역사도시 타보르를 관광하기 위해 출발했다.
시골길은 한적하고 도로 옆 초원의 넓은 땅에는 노란 민들레가 지천이다.
화려한 민들레 꽃이 지고 나면 민들레 홀씨들로 가득할 텐데... 솜털처럼 가벼운 씨앗은 또 얼마나 멀리 퍼져나갈까.
순리를 거스르고라도 그저 오래도록 이 화려한 초원으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욕심도 생긴다.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노란 민들레가 오늘따라 더 반짝거린다.
노란 민들레의 '화양연화 (花樣年華)'는 지금이 한창이다.
우리네 인생에서 화양연화는...
타보르에 도착한 우리는 일요일이라 어렵지 않게 올드타운 가까이 주차를 하고 제일 먼저 '요르단 저수지'로 향했다.
잔잔한 물이 넓게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저수지다.
1942년에 만들어진 이 저수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저수지로 알려져 있다.
명칭은 성서에 등장하는 '요르단 강(Jordan River)'에서 따왔다고 설명이 되어있다.
처음에는 도시의 방어 및 식수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면적이 약 14헥타르(약 140,000㎡) 정도로 넓고, 깊이는 약 3미터 정도인 이 저수지는 지금도 부분적으로 물 공급을 위해 활용이 되기도 하지만 휴양지로서 많은 관광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곳이었다.
저수지 주변은 산책로는 물론 자전거 도로도 잘 조성되어 있어 자연을 즐기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여름철에는 수상 스포츠나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겨울에는 얼음낚시도 한다니 다양한 레저활동을 즐길 수 있는 멋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일 아침, 저수지를 둘러싼 산책길에는 이른 아침부터 조깅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도 저수지를 돌며 산책을 한 후 올드 타운으로 향했다.
타보르의 올드타운은 중세시대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였다.
15세기 초 후스 전쟁(Hussite Wars) 당시 후스파(Hussites) 운동의 거점 도시로 성장하면서 도시가 특별한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적들이 침입했을 때 길을 쉽게 찾지 못하게 하려고 미로처럼 복잡한 설계를 했다고 한다.
특히, 후스파 지도자 '얀 지슈카(Jan Žižka)'를 기념하여 붙여진 '지슈카 광장(Žižkovo náměstí)'을 중앙에 두고 사방으로 골목길이 펼쳐졌는데 좁고 굽이진 골목길, 어두컴컴한 골목, 그리고 갑자기 숨겨진 통로 등이 나타나니 중세 요새 도시의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후스파를 이끌었던 리더였던 얀 지슈카(Jan Žižka)의 동상이 서 있는데 한 눈이 붕대로 가려진 그의 근엄한 얼굴이 무척 인상적이다.
1420년 경 후스파 지도자 얀 지슈카(Jan Žižka)가 이끄는 군대가 타보르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도시 전체가 요새처럼 설계되어 방어가 강력했고, 타보르파(Taborites)라는 강경파 종교집단이 여기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한다.
광장은 여느 도시의 광장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박물관 그리고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고딕양식,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차분하고 정갈하다.
올드타운을 산책하다가 박물관 오픈 시간에 맞추어 입장했다.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오디오 설명을 한국어로 선택해 들을 수 있다는 것과 간단한 설명서가 한국어로 되어 있어 무척 놀라고 기뻤다.
체코의 자그마한 역사 도시 타보르의 박물관에도 대한민국의 국기와 함께 한글로 쓰인 설명서와 한국어 오디오를 이용할 수 있다니 기분이 좋다.
박물관에서는 타보르의 역사, 종교개혁 시대, 그리고 후스파의 지도자 얀 지슈카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고 있었다.
또한 중세의 무기와 생활 도구등이 함께 전시되어 흥미로웠는데 무엇보다 이 박물관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지하비밀 터널(underground passages) 체험이었다.
타보르 광장의 지하를 중심으로 약 500m 이상의 지하 통로망이 얽혀 있었던 것이다.
15세기 중세 시대에는 음식이나 식량을 저장하기 위해 팠던 이 지하 터널이 맥주를 양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면서 지하실을 확장했고 일 년 내내 7~8도를 유지하는 장소로 맥주를 숙성시키는 곳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1520년 경 타보르에는 큰 화재가 있었는데 이때 사람들은 물론 가축들까지 지하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며 후스파인들이 저장실들을 서로 연결하면서 광대한 지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적의 침입에 대한 은신처나 화재의 대피를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도시 타보르는 바위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에 모든 지하실은 돌을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지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지 상상이 간다.
현재 우리가 지하 터널을 체험할 수 있는 구간은 약 500m 정도인데 실제 전체 터널의 길이는 훨씬 더 길다고 한다.
고작 사십 여 분간 머물렀을 뿐인데도 무척 추위를 느끼는데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시청의 지하공간 일부는 일정기간 "라트하우스(감옥)"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질서를 어지럽히며 문란하게 생활을 한 여성들을 하루동안 가둬두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이 지하터널 투어는 무척 흥미로운 시간이었는데 다만 아쉬운 것은 가이드가 체코어로 설명을 하는 바람에 한글로 된 설명서에 의지해야 했던 점이 무척 안타까웠다.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난 후 광장 주변의 맛집이자 체코 전통요리를 하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구글 평점이 좋은 곳을 찾아 방문했는데 역시 많은 사람들이 벌써 식사를 하고 있다.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소고기 스테이크 그리고 수프와 맥주를 주문했는데 맛도 가격도 만족스러웠다.
특히 소고기 요리는 체코의 전통 요리 중 '스비츠코바svickova'라는 음식이었는데 크리미 한 야채수프와 빵이 곁들여져 나왔다.
고기도 연하고 고기에 얹힌 소스의 맛도 익숙하다.
식사 후에 올드 타운 구석구석을 걷는데 집 벽의 구조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점 넓어지는 독특한 형태를 발견했다.
이곳과는 반대 형태 즉, 하단은 폭이 좁고 위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주택의 형태는 유럽의 올드 타운에서 더러 본 적이 있는데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갑자기 넓어지는 구조는 이 도시에서 처음 보게 되니 낯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의 구조가 내려가면서 더 넓어지는 구조는 지하에 저장실을 설치하기 위해 넓힐 수밖에 없었던 실용적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집 아래가 넓은 집들은 지하에 저장고를 만들어 음식을 보관하고 거주까지 했던 모양이다.
햇볕이 따스하고 몸도 노곤하니 달달한 아이스크림이 생각나 가게를 찾았는데 딱 한 군데 있다.
타보르 광장 주변에서 유일한 아이스크림 가게(Moccaafe)라 그런지 이곳에서 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느라 분주하다.
유명한 관광지인데도 아이스크림 가게가 한 곳뿐이라니...'
역시 피곤한 몸에는 달달한 아이스크림이 최고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올드타운을 벗어나 타보르의 조용한 숲 길을 걸으며 타보르의 여행을 마치기로 했다.
오늘 걸었던 타보르의 낯선 골목길은 마치 오래된 기억의 미로 같았다.
지하도시의 어둠 속을 걸었고, 지슈카 광장에 서서 중세의 숨결도 느꼈다.
그리고 오월의 초록이 우거진 타보르의 숲 길은 조용한 골목만큼이나 한적하고 걷는 내내 편안했다.
이 글은 2025년 4~5월 체코 보헤미아 지방을 여행하며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