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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와 광란 사이:
체코 밀레프스코 마을의 두 얼굴

밀레프스코 수도원의 침묵과 가면 속의 외침

by 담소

어제까지만 해도 낮에는 기온이 높아 반팔을 입고 다녀야 했는데 오늘은 오후부터 비가 내리더니 갑자기 기온이 10도 아래로 뚝 떨어졌다.

비는 오지 않지만 잔뜩 흐린 구름 낀 날씨 탓에 추위를 더 느낀다.

스산한 유럽의 봄 날씨다.

그래도 바깥 풍경은 절경이다

스크린샷 2025-09-11 143457.png 밀레프스코 가는 길


숙소에서 멀지 않은 밀레프스코에 마스크 박물관이 있다는 말에 마을도 구경할 겸 나들이를 갔다.

마을의 번화가로 가기 전 '밀레프스코 수도원(Milevsko Monastery)'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사실 몇 년 전 조지아(Georgea)를 여행하면서 수도원이라는 팻말이 보일 때마다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운전해 가며 셀 수 없을 만큼 수도원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이제부터 여행 중 수도원은 더 이상 방문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의견의 일치를 봤다.

하지만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하나라며 꼭 방문해 보라는 예닉의 말도 있었고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수도원이라 방문해 보기로 했다.

내키지 않아 했던 우리의 마음을 수도원은 알았을까? 오늘은 문이 닫혀있어 외관만 둘러보고 와야 했다.


보라색 꽃들이 활짝 핀 나무 사이를 통과하면 성당이 보이고 왼쪽에는 수도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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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프스코 성당 입구와 수도원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라틴어학교도 보인다.

IMG_20250505_111639.jpg 라틴어 학교

이 수도원은 1187년 프레몹슬 왕조 시절 귀족이었던 Jiří z Milevska에 의해 세워졌으며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프레몹시안 수도원(Premonstratensian Monastery)중 하나라고 한다.

마을 이름도 귀족의 이름을 따서 '밀레프스코(Milevsko)'인가 보다.

이 수도원은 중세 시대에는 종교뿐 아니라 문화 및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특히 수도원의 성당

(St. George)은 현재 고딕 및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건축 양식을 보이며 중요한 유산이 되고 있다.

성당 입구 중앙에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의 그림이 아주 독특하다.

St. George가 용을 물리치는 장면으로 선이 악을 이기는 상징을 의미하기도 하고 양, 비둘기, 포도나무, 십자가 등 다양한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다고도 한다.

IMG_20250505_111518.jpg 밀레프스코 성당 입구와 스테인드 글라스


1420년대 체코의 종교 개혁 운동인 '후스 전쟁(Hussite Wars)'중에 이 수도원은 후스파(Hussites)에 의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고 수도사들이 살해되거나 추방되어 수도원의 역할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다행히도 현재 이 수도원은 보수되어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성당 맞은편에 있는 라틴어 학교(Latinská škola)는 지금은 더 이상 교육 기관으로 운영되지 않고 마을의 문화 행사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 듯했다.

정갈한 분위기에 성스러움이 물씬 느껴지는 장소였다.

성당 앞 정돈된 산책로가 나있어 잠깐 걷기로 했는데 조용하고 사색하기 좋은 길이다.




밀레스코프((Mileskov) 중심가에 도착했다.

아담한 광장에는 어김없이 성당이 있고 그 주변을 시청과 은행 그리고 수수한 레스토랑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다른 마을의 광장에 비해 무척 소박하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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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스코프 광장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물은 아름답게 단장한 시청 건물이다.

이곳은 마을의 중심가인데 시청을 방문하는 현지인들이 이따금씩 보일 뿐 무척 조용하다.

우리의 목적지는 시청 맞은편에 있는 박물관으로 아르누보 스타일로 단장한 우아하고 예쁘장한 마스크 박물관(Muzeum milevských maškar)이다.

마스크와 관련된 박물관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다.

IMG_20250516_121100.jpg 밀레프스코 가면 박물관 외관


밀레프스코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가면 행렬 전통이 있는 마을이며, 1862년부터 '마소푸스트(Masopust) 가면 행렬'을 매년 개최해 온 마을로 시골 농촌이 아닌 도시에서 시작된 드문 사례라고 한다.

마소푸스트(Masopust)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등 슬라브 문화권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사순절 전 축제로, 유럽의 카니발(Carnival)과 유사한 민속행사라고 할 수 있다.

2017년 처음으로 개관된 이 박물관은 체코에서 유일하게 마소푸스트 전통을 다루고 있다.

이 행사(마소푸스트)는 사순절 시작 전 겨울의 끝자락(매년 2월과 3월 초)에 열리는 축제로, 풍요와 새해의 시작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 밀레프스코의 마소푸스트는 단순한 퍼레이드를 넘어, 지역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문화행사로 발전해 왔는데 마스크, 퍼레이드, 전통 음악과 음식이 어우러지며, 오랜 시간 동안 지역의 정통성을 이어주는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밀레프스코의 마소푸스트 행렬은 체코 문화부에 의해 무형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한 마을 축제에서 더 나아가 보호받고 계승해야 할 전통문화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박물관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진 않았다.

마소푸스트(Masopust) 가면 행렬의 역사가 다큐멘터리로 상영되고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시대부터 행렬에 사용했던 가면들과 의상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직접 마스크를 만들어 보고 써 볼 수 있는 체험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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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영관에서 밀레프스코의 가면 행렬의 변천사를 초기부터 현재까지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밀레스코프 마을의 시장이 열쇠를 축제의 주관자에게 건네면서 축제는 시작되고 '술의 신'이라고 알려진 '바커스(Baccus)'가 축제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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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소푸스트(Masopust) 카니발은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육식을 즐기는 마지막 기간이므로 사람들이 평소와는 다른 캐릭터(신, 동물, 악마 등)로 분장하고 규율과 질서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하고 표현할 수 있었다.

또한 박커스는 질서와 금욕이 시작되기 전의 혼란과 해방의 대명사, 인간 본연의 욕망과 자유를 해방시키는 존재임을 대표하는, 즉 '비일상성'과 잘 어울리는 상징적 인물로 선정되어 마소푸스트의 의미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박물관 중앙에 전시된 마네킹 행렬을 보니 역시 박커스(Bacchus)가 가장 맨 앞 중심에 있고 상영되는 다큐멘터리에서도 매 년 박커스는 빠지지 않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었다.


아울러 해마다 축제 때마다 열쇠를 주고받는 장면이 매번 보여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는데 가면 행사에서 '열쇠'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의례의 핵심 요소로 권한과 통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축제 당일, 밀레프스코 시장은 가면 행렬 대표자(“왕”이나 마소푸스트 인물)에게 도시의 상징적 열쇠를 넘기는데 이 행위는 마소푸스트 기간 동안 도시의 권력을 가면 행렬 측에 임시로 넘긴다는 의미였다.

즉, 열쇠는 단지 “문을 여는” 기능이 아니라, 도시 운영 권한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는 의미인데 이 전통은 중세 유럽의 카니발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상적인 권위와 질서를 뒤엎고 서민들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쥐는 유쾌한 반란(?), 전복(?)의 시간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열쇠가 이양되면 가면을 쓴 퍼레이드 참가자들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주민들과 소통하는데 이런 행위를 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더한층 느낄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만은 전통적 규범보다 익살과 풍자, 해학이 중심이 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체제 시절에는 이 행사를 중앙에서 통제했었다고도 하니 주민들은 이 억압과 간섭에서 이 날 만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의미를 이 축제를 통해 마음껏 펼치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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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가면들 중에는 집시가 곰을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가는 모습이 있어 그 의미를 찾아보니 속박과 해방을 상징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쇠사슬은 인간이 자연 혹은 본능을 통제한다는 상징, 또는 질서에 억눌린 자유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때로는 곰의 목을 베는 상징적인 의식이 진행되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축제를 통해 잠시 해방되는 의미 또는 겨울의 죽음과 봄의 탄생을 상징하는 의미라고 한다.

가면들 하나하나가 그들의 행위에 깊은 의미와 상징이 있음을 알게 되니 단순히 먹고 즐기는 유흥의 축제는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방문하기 전에는 단순히 유럽인들의 사교장 혹은 축제 시 본인의 신분을 가리거나 위장을 하는 face mask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생각했는데 오늘 방문했던 마스크 박물관은 의미가 다른 박물관이었다.

지역의 풍부한 민속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이색적인 장소에서 의미 있는 특별한 경험을 했던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르니 송어가 세일 중이라 두 마리를 사서 구워 먹기로 했다.

한국과는 달리 체코에서는 다양한 생선을 식탁에 올리기 어려운데 모처럼 송어가 보여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오늘 저녁 식사 메뉴는 송어구이와 내가 좋아하는 Tokay와인이다.

와인을 마시며 수도원의 신성한 침묵을 느껴보고 '마소푸스트(Masopust)의 가면 축제'처럼 일탈을 경험하는 밤이 되어 보기로 했다.






이 글은 2025년 4~5월, 체코 보헤미아 지방을 여행하며 기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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