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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의 에어컨 같은, 결혼

<눈물의 여왕> 드라마 대사를 현실에서 만날 때

by 까만곰

현실이 너무 힘들 때, 나는 종종 드라마를 본다.


마음이 무너지고 몸이 부서져내리는 날에는

즐겨 읽던 책이 날 궁지에 몰아세우고,

감미로운 음악이 내 마음을 깊은 곳으로 끌어내린다.


몸과 마음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을 때,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잠시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기분.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역경과 시련 사랑의 기쁨과 행복이 진짜 내 것인 양 느껴진다.

그렇게 한두 시간 이야기 속에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현실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별거 아닌 것 마냥 희미해지고 다시 살아갈 힘이 난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아침 출근시간은 하루 중 가장 바쁘고 불안한 시간이다.

회사 출근준비를 하면서 아이들 아침 준비까지 하면 항상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일찍 일어나주면 좋으련만, 아무리 깨워도 미동조차 안 하는 아이들.

예쁜 말로 불러도 보고, 손발을 조물조물하며 마사지도 해보지만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화를 내고 으름장을 놓아야만 끝난다.


밥만 차려놓으면 어찌어찌 혼자서 챙기고 나가겠지만 문제는 머리!

딸은 머리를 묶어주지 않으면 학교에서 공부하고 밥 먹을 때, 운동할 때 너무 힘들다고 날리

아들은 머리를 짧게 자른 후로 매일 아침 뜬다며 가라앉히느라 날리


아침 난리통을 정리하고 나오니 출근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주자창까지 달리고, 차를 타고 출근하며 달리고,

열심히 달려야 지각을 면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날 힘들게 하는 것은

'이 바쁜 아침을 남편이 도와주면 좋으련만'

하는 나의 바람


아침에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주면 내 아침이 조금은 편할 텐데

이런 생각이 날 화나게도 했다가 서운하게도 한다.


아슬아슬한 출근길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퇴근하고 좀 빨리 오지, 내가 가장 도움이 필요한 시간이 아침인 거 알잖아. 꼭 그때 운동을 해야 해?"

울컥하는 마음에 전화받자마자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남편의 대답은 의외였다.

"자동차 핸들은 괜찮아? 저번에 핸들이 돌아가는 것 같다고 했잖아. 타이어 공기압이 안 맞아서 그런 것 같아서 내가 공기압 맞춰 놨어. 아직도 이상하면 다시 말해줘."


아니 내가 화를 냈는데 날 걱정하는 말을 건네다니.

갑자기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맘이 뒤죽박죽


어제 본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대사가 떠올랐다.


결혼이 여름밤에 켜는 에어컨 같은 거래

남동생(김수현)의 이혼을 막아보려는 누나가 남동생의 부인(김지원)을 찾아가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이해시키려 한 말. 김지원은 "우린 각방을 써서요. 에어컨을 따로 켜요."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이 대사가 밤새 생각났다.


더운 여름밤. 더워서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자기 힘든 남편과, 에어컨을 켜면 너무 추워서 자기 힘든 부인.

서로 다른 온도의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것이 부부생활, 결혼생활인 것 같다.

당연히 서로 바라는 것도 다를 것이고, 상황을 해석하는 것도 대처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에어컨 온도 하나 못 맞춰 주나?' 싶겠지만, 사소해서 더 서운하고 말못해서 속상한 법이다.


'내일 아침엔 일찍 와달라고 부탁해 볼까?

남편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텐데, 어나 볼까?'

이런 마음이 들다가고, 기껏 좋은 마음으로 부탁했는데 안 들어주면 더 속상할 텐데 싶어서 놔둘까도 싶다.


참 둘이 같이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하물며 서로 다른 온도의 두 사람이 또 다른 온도를 가진 2명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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