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거리의 풍경이 달라진다. 여기저기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소품들과 흘러나오는 캐롤, 그리고 빨간 포인세티아.
선명한 빨간색 잎들을 보면 마음속에 아래서 잠자던 설렘들이 몽글몽글 올라온다.
몇 년 전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사 온 포인세티아는 연말까지 우리 집을 환하게 비췄다. 식탁에 하나 올려놨을 뿐인데 온 집안에 활기가 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들 돌보느라 항상 결혼기념일을 제대로 챙기지는 못했지만 남편이 준 포인세티아 덕분에 그 해 연말은 포근했다.
그 후로 나는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식물 관리가 서툴러 자꾸만 말라 비틀어가는 화분들에게 미안해 자주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선물을 받으면 왠지 사랑받는 듯한 기분에 행복했다. 매번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 되면 꽃을 받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작년부터 남편이 바빠지면서 기념일은 서로 챙기기 부담스러운 날로 바뀌었다. 꽃을 받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도 바쁜 남편은 꽃을 챙길 정신이 없었다.
"많이 바쁜가 보다. 그럼 생일에라도 꽃 받고 싶은데."
내심 기대했던 생일도 바쁘게 지나갔다. 시무룩한 나를 보고 아이들이 선물을 챙겨줬다.
"엄마 제가 꽃 사드릴게요."
아이들 덕분에 아담한 꽃다발 하나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애들이 사준 예쁜 꽃을 보고 뿌듯하면서도 조금 씁쓸했다.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 생일 챙겨준다는 애들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하지만 옆구리 찔러 절 받기도 아니고, 남편에게 받고 싶어서 꽃다발 노래를 불렀던 건데 애들이 마음이 쓰였던 것 같아서 미안했다.
올해 남편은 작년보다 더 바쁘다. 본인 먹고 자고 하기도 힘든 걸 알기에 아예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다가오는 결혼기념일을 남편이 기억이나 할까? 아침 퇴근 하고 온 남편에게 살짝 물어봤다.
"오늘 무슨 날인 줄 알아?"
"응, 결혼기념일이던데. 나 한참 고민했잖아. 오늘인지 내일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날짜를 헷갈렸다는 남편이지만 결혼기념일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고마웠다.
혹시나 바빠도 남편이 꽃을 사 오지 않을까 하고 살짝 기대했지만 빈손이었다. 퇴근하고 오면 집에 혹시 꽃이 있으려나 기대했지만 집은 텅 비어있었다.
'내가 뭘 자꾸 기대하는 걸까'
결혼기념일은 남편과 나의 결혼을 기억하고 서로 다짐하며 앞으로를 약속하는 시간 아니던가. 선물을 주고받는 날도, 남편이 나를 챙겨줘야 하는 날도 아닌데 괜스레 혼자 서운해했던 것 같아서 머쓱했다.
퇴근 후 아들 수업을 데려다주는 길, 화원 앞에 화려한 포인세티아가 눈에 띄었다.
"어, 이거 우리 집에 있었던 거네요. 아빠가 사 오셨었는데"
"맞아, 예쁘지?"
아들을 수업에 들여보내고 다시 화원으로 나왔다. 남편에게 기대만 하지 말고 내가 받고 싶은 선물, 결혼을 기념하는 마음을 담아 나와 남편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빨간 포인세티아를 사려고 들어온 화원에는 초록초록한 식물들도 많았다. 그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하트호야'. 얇은 하트 초콜릿 같은 식물이 앙증맞게 화분에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연말을 화려하게 빛내줄 포인세티아보다 은은하게 우리 곁을 지켜줄 초록의 호야에 마음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