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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연 May 10. 2022

뜻밖의 여행

광화문 방랑기

얼마 전 고등학생 큰아이의 첫 시험이 있었다. 결과도 그에 따른 책임도 본인 몫이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했지만 본심은 아이 이상으로 더 신경 쓰이고 결과가 불안한 속 좁은 학부모였다.


시험이 끝나고 정확히 열흘이 지난 오늘 나는 계획에도 없던 혼자만의 여행 중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잠시 집을 나온 거다. 물론 남편에게는 이유를 밝히고 벌인 일이지만 설레고 기대되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아이와의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광화문 쪽 호텔을 예약해버렸다. 발단은 큰아이와의 말다툼이었다. 요즘 아이들의 유일한 즐거움이 게임 속 세상이라는 게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마음에도 안 들지만 큰아이도 게임을 좋아한다.

본인만 흡족하게 생각하는 중간고사 성적을 받고서는 수능을 마친 수험생처럼 자유를 만끽하고 게임과

낮잠과 힙합 영상으로 알차게 시간 배분하며 하교 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삼사일은 웃는 얼굴로 참을 수 있었는데 그 후부터는 나도 모르게 눈빛에도 말에도 힘이 들어갔다.

다시 책상에 앉기를 바라는 마음을 조심스레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아이도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과

미움 가득 담긴 한숨으로 기분은 상할 대로 상하고 그렇게 주말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이는 하루 종일

방문을 닫아걸고 아침 점심을 거르고 나도 배고픈지도 모른 채 저녁 시간을 맞았다. 도대체 뭘 잘했다고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 아이를 보니 속에서 화가 복받쳐 오르고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방문을  걷어차고 싶어

움찔거리는 다리를 자제시키느라 힘들었다. 그렇게 주말을 엉망인 기분으로 보내고 아이방의 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을 시기부터 분쟁이 있을 때마다 말보다는 글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쓰다 보면 신기하게도 미운 마음도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도 둥글게 다듬어지고 끝마무리에서는 마음속에 가득 찼던 분노가 소멸되는 경험을 한 이후로 시대에 안 맞는 번거로운 소통 방법이지만 이어가고 있다.

편지 내용 중에 내가 전하고 싶은 조언과 바람들이 적절하게 녹아들어야 되니 매번 얕은 나의 문장력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편지를 완성하고 바로 호텔 앱을 통해 2박 3일을 예약해버렸다. 나도 아이들도

익숙한 일상과 사람의 빈자리에 불편함을 느끼며 감정의 소모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이 허용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고민 없이 예약 버튼을 눌렀다. 다음날 아이들이 등교를 하자마자 냉장고에 편지를 부쳐놓고 광화문행 버스에 단출한 짐과 함께 몸을 실었다.


체크인을 함과 동시에 나는 이번 여행의 발단과 무거운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홀로 도심 여행자의 자유를 만끽하고 돌아다녔다. 늘 긴 줄의 위압감에 포기했던 랜디x  도넛에서 한 상자 가득 도넛을 사고 한적한 북촌과 서촌을 오가며 청명한 하늘에 떠다니는 한조각 구름처럼 도심 여행자의 시간을 즐겼다. 그렇게 어둑해질 때까지 돌아다니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큰아이가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본인이 합당하게 쉬어야 될 이유와 시간이 되면 다시 책상에 앉을 생각이었다고... 사과의 뜻은 지나치게 간결하고 본인 입장 설명은 구구절절 길게도 보내왔다. 난 이미 마음이 풀린 지 오래인데...... 아이의 진심이 전해지는 장문의 카톡을 보니 조금 더 기다려주지 못한 나의 짧은 인내심과 겉으로는 믿음과 지지를 늘상 이야기하지만 속마음은 그와 반대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그냥 말없이 기다려줄걸... 미안한 마음에 아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밝다. 쉬는 김에 더 푹 쉬었다 오라는 말이 고맙게 들리지만은 않지만 그냥 사심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들뜬 목소리로 저녁 메뉴를 고르고 있다는 두 형제의 목소리에는 행복한 고민의 흔적이 느껴진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배달앱 덕에 끼니 걱정 없는 것을 감사해야 할지...

계획에 없던 여행 덕에 두 형제의 우애는 더 돈독해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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