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의 다섯 번째 새엄마

애증의 25년 생을 함께하다

23살의 어느 늦은 가을.

나는 가출을 했다.

어쩌면 성인이었으니 출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 좀 빌려줄 수 있냐고. 친구는 흔쾌히 20만 원을 빌려주었다. 신일 여인숙. 그렇게 나의 독립 아닌 독립생활이 시작되었다. 자식과 자기 중에  선택을 하라는 새엄마의 성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빠에 대한 배신감으로.

가출 후 5일 만에 23년간 내겐 엄마였던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시 집을 찾아갔지만.  이제 이 집은 영원히 오고 싶지 않은 공간이 되고야 말았다. 엄마까투리의 향기마저 남아있지 않은 아주 무섭고 텅 비어버린 공간이다. 이제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뉴코아 백화점 안 신라명과에서 빵 굽는 일, 호반건설 모델하우스에서의 아파트 분양 업무. 서울 논현동 중국집 삼보에서의 써빙.

그리고 남편과의 결혼.

부모는 있어야겠기에 용기 내어 남동생이 알려 준 주소를 네비에 찍고 달려간 곳은. 어릴 전 내가 자랐던 순창의 작은 마을 같은 곳이었다. 잘 왔다며 반기는 모습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인연의 끈을 잇고야 말았다.

이바지도 넉넉하게 해 주며 나를 잘 시집보내고선 돌아오는 관광버스 안에서 우셨단다. 친척들의 모진 소리들이 서운하고 서러우셨나 보다.

'아이~언제 올끄냐~ 무시도 뽑아놨고 고춧가루랑 고구마도 가져가야제~'

지난겨울 남동생의 두 번째 주식 실패로 나는 다시 이 악연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이혼하겠다는 올케의 말에 동생 결혼 후 내가 관리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통장과 카드를 넘겨주며. 늘 아들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또 미워졌다. 아버지는 평생 하나 있는 아들에게 돈 다 주고 사고 치면 다 해결해줘서 아버지가 동생을 이렇게 다 망쳐놓은 거라고 소리한 번 지르지 못하고. 나는 또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모아놓은 돈을 다 뺏기다시피 하고 77세까지 운전하시던 레미콘마저 아들에게 줄 수밖에 없어서 줄담배를 피우시다가 눈도 안 보이게 되었다며. 너희 아부지 불쌍해 겠다는 새엄마의 전화에 다시 인연을 끈을 또 잇고야 말았다.

여자 애가 무슨 대학이냐? 공장 가서 돈이나 벌라던 내 아버지. 굽은 허리로.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들리지 않는 귀로. 내 말을 들어보려고 귀를 갖다 대는 늙으신 아버지. 그리고 25년째 그 곁에 머물고 있는 나의 다섯 번째 새엄마. 애증으로 얼룩진 그 세월들을 어찌하면 좋으랴?

25년 전 그 이기적이고 싸늘하던 표정은 어느새 깊게 주름져. 내가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며 수시로 내 전화벨을 울려댄다.

'아이~언제 올끄냐?'

작가의 이전글 마데카솔과 밴드와 모기밴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