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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욕심내는 사람
Dec 05. 2021
나의 다섯 번째 새엄마
애증의 25년 생을 함께하다
23살의 어느 늦은 가을.
나는 가출을 했다.
어쩌면 성인이었으니 출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 좀 빌려줄 수 있냐고. 친구는 흔쾌히 20만 원을 빌려주었다. 신일 여인숙. 그렇게 나의 독립 아닌 독립생활이 시작되었다. 자식과 자기 중에 선택을 하라는 새엄마의 성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빠에 대한 배신감으로.
가출 후 5일 만에 23년간 내겐 엄마였던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시 집을 찾아갔지만. 이제 이 집은 영원히 오고 싶지 않은 공간이 되고야 말았다. 엄마까투리의 향기마저 남아있지 않은 아주 무섭고 텅 비어버린 공간이다. 이제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뉴코아 백화점 안 신라명과에서 빵 굽는 일, 호반건설 모델하우스에서의 아파트 분양 업무. 서울 논현동 중국집 삼보에서의 써빙.
그리고 남편과의 결혼.
부모는 있어야겠기에 용기 내어 남동생이 알려 준 주소를 네비에 찍고 달려간 곳은. 어릴 전 내가 자랐던 순창의 작은 마을 같은 곳이었다. 잘 왔다며 반기는 모습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인연의 끈을 잇고야 말았다.
이바지도 넉넉하게 해 주며 나를 잘 시집보내고선 돌아오는 관광버스 안에서 우셨단다. 친척들의 모진 소리들이 서운하고 서러우셨나 보다.
'아이~언제 올끄냐~ 무시도 뽑아놨고 고춧가루랑 고구마도 가져가야제~'
지난겨울 남동생의 두 번째 주식 실패로 나는 다시 이 악연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이혼하겠다는 올케의 말에 동생 결혼 후 내가 관리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통장과 카드를 넘겨주며. 늘 아들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또 미워졌다. 아버지는 평생 하나 있는 아들에게 돈 다 주고 사고 치면 다 해결해줘서 아버지가 동생을 이렇게 다 망쳐놓은 거라고 소리한 번 지르지 못하고. 나는 또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모아놓은 돈을 다 뺏기다시피 하고 77세까지 운전하시던 레미콘마저 아들에게 줄 수밖에 없어서 줄담배를 피우시다가 눈도 안 보이게 되었다며. 너희 아부지 불쌍해 죽겠다는 새엄마의 전화에 다시 인연을 끈을 또 잇고야 말았다.
여자 애가 무슨 대학이냐? 공장 가서 돈이나 벌라던 내 아버지. 굽은 허리로.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들리지 않는 귀로. 내 말을 들어보려고 귀를 갖다 대는 늙으신 아버지. 그리고 25년째 그 곁에 머물고 있는 나의 다섯 번째 새엄마. 애증으로 얼룩진 그 세월들을 어찌하면 좋으랴?
25년 전 그 이기적이고 싸늘하던 표정은 어느새 깊게 주름져. 내가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며 수시로 내 전화벨을 울려댄다.
'아이~언제 올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