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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삶

내면의 용기, 나를 찾아가는 여정


종일 내리는 눈에 온 세상은 이미 하얀 호빵처럼 포근한 순백의 솜이불을 덮은 것 같다. 나는 리어카에 할머니를 태우고 쏟아지는 눈바람을 헤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늘은 배급날이다. 한 살 어린 남동생은 꽁꽁 언 손으로 할머니 몸에 수북이 쌓이는 눈을 연신 쓸어내린다. 이윽고 도착한 농협 연쇄점. 정부미 한 포대와 얼마의 돈을 지급받으면 우리의 발길은 농협 연쇄점으로 향한다. 영하의 날씨에 하얀 구름 같은 김이 모락모락 좁은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호빵이 잔뜩 든 찜통에 우리의 눈길이 떠나지 않자, 이내 할머니가 한 마디 하신다. "묵고 싶냐? 그래 오늘은 돈도 있겠다. 하나씩 묵어라." 


나의 어린 시절은 흔히 말하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났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이모할머니가 계신 순창으로 보내져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깨진 거울처럼 산산이 부서져 그 작은 파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내는 삶이었다. 아버지는 재혼을 하시면서 우리를 버린 거나 다름없었고 가끔씩 들려오는 엄마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들은 나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책이라고는 교과서 밖에 없었지만 내가 다녔던 팔덕초등학교는 시험을 볼 때마다 상을 주었기 때문에 한쪽 벽면은 각종 상장과 표창장으로 거의 도배가 되어 갈 정도였다. 그것들은 나의 자부심이었으며, 어쩌면 아들 선호 사상이 아주 지극했던 할머니에 대한 둘째 손녀딸의 소심한 시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짜 내 삶의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중학교 3학년 즈음 연로하신 할머니가 더는 우리들을 키우기 어려워지자,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언제 당하게 될지 모르는 아버지의 폭력은 예측할 수가 없었고 새엄마들의 차가운 눈총 속에서 할머니와 우리는 종이인형 같은 존재였다.  다섯 명의 새엄마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나에게 진정한 엄마가 되어주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자식과 자기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새엄마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이제 그만하세요. 제가 나가면 되잖아요!' 23살. 어쩌면 가출보다는 출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그 나이에 나는 집을 나왔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그리고 닷새 만에 들려온 할머니의 사망 소식. 내가 집을 나간 뒤 한 끼도 드시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오랜 시간 방황하며 나는 신을 원망했다. 나는 왜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며, 왜 내 삶은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느꼈고, 신은 나를 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랜 방황 끝에 나는 깨달았다. 내 삶은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찾기 시작했고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들은 나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어려움들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끝없는 원망과 분노는 나를 무력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힘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나는 내가 겪은 아픔과 상처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20여 년간 언어재활사 일을 하면서 발달 장애 아이들이 단어를 말하고 질문에 대답을 하고 한글을 깨치며 부족한 모습이지만 세상에 내 보낼 준비를 함께 하는 일에서도 보람을 느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심리 공부가 하고 싶어 졌고 그렇게 나는 40대의 늦은 나이에 상담심리대학원에 진학했다. 사람의 마음속에 감춰진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심리학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고, 특히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경험들이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길의 밑바탕이 되는 소중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고 작가도 도전했다. 상담심리 대학원 졸업 후 처음으로 도전한 청소년 상담사 2급 시험에 합격했고 언어재활사 1급 시험을 곧 앞두고 있다. 이런 목표들은 단순히 자격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나는 나의 경험에 전문성을 더해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삶은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 매여 있지 않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내게 주어진 기회들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나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제 나의 과거는 더 이상 나를 억누르는 족쇄가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이 길 위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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