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감정: 무력감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비상식

by 이민주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꽤 힘들다. 특히,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으면 더욱이 인정하고 싶지않아 진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새벽운동을 끝내고 탈의실에서 우연히 듣게 된 두 여성의 대화가 오래도록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도 순전히 내 컨디션 때문이었다.


한 여성은 어린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녀가 학부형으로 있는 해당 초등학교에서는 휴대폰을 걷는 대신 전원을 끄고 액정을 두드리는 것을 규칙으로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여성의 자녀가 그녀에게

“엄마, 00 이는 휴대폰 안 끄고 액정을 두드리는 척한다!”라며 상황을 전했다. 그러자, 그녀는 “00이 천재인데?”라고 반응했다. 그녀가 농담을 한 것이라고 넘어가기에 웃음이 묻어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에 내 마음이 한껏 가라앉았다. 그녀는 아이가 규칙을 배우고 양심과 도덕성을 기르는 것 대신, 선생님을 성공적으로 속여낸 편법을 응원했고 학생 본인의 욕구를 가감 없이 충족한 것을 칭찬했다. 도덕적 노팬티상태가 대물림 되는 현장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그냥 쉬는 시간에 켜지, 그러다 걸리면 ‘꺼진 줄 알았어요’라고 대답하지”라며 매우 정교한 지시를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마주해야 했던 말도 안 되는 민원과 나에게 부과되었던 기분상해죄, 그에 대한 벌로 바라던 우리 아이 특별대우까지. 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5년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교사 커뮤니티에서 ‘우리도 죽일 수 있다’, ’ 녹음기능 때문에 휴대폰 무조건 끄게 해야겠다’라는 말을 했다잖아. 지들 입장에서는…”


‘지들’이라는 지칭어가 꽤나 날카롭게 다가왔다. 임용된 후로 끊임없이 고민해 온 나의 직업관과 윤리관이 쇠꼬챙이에 꽂혀 일순간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교사와 학교에 대한 불신을 개인적 차원에서 극복하려던 나의 노력들이 너무나 초라하고 가여웠다. ‘지들’인 교사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감은 결코 나와 동료의 의지만으로 회복될 수 없는 상황에 와있다는 반증이었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자주 곱씹는 말이 있다. 내가 아는 상식은 누군가에게 상식이 아닐 수 있다. 대체로 학생과 기가 막힌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최면을 걸 듯 읊조렸다. 그래, 학생이니까 모를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러나, 그 상대가 동시대를 살아온 내 또래의 학부모라면?

그녀는 학교에서 휴대폰의 전원을 끄게 하는 것이 학생을 학대하는 증거를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한 교사의 방책이라는 기가 막힌 뉘앙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단 한순간도 의심해 본 적 없던 상식의 선이 침범당하면 되려 나의 상식의 세계를 의심하게 된다. 사실 내가 독특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고, 그녀의 말이 이 세상의 주류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빠를테니까.


하늘이 사건 이후, 또래의 자녀를 둔 부모들이 얼마나 분노했을지 이해를 못 하는 바가 아니다. 나 또한 결코 가해자를 옹호하지 않는다. 허나, 언론보도를 보면서 내 마음 한 구석이 계속 답답해졌다. 이 찝찝하고 슬픈 감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끊임없는 사고는 끝내 심연에 자리잡은 무력감에 가 닿았다.


하늘이 사건의 가해자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에, 교사들의 정신을 감정하고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교사를 업무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법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발의되었다. 대중은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냈고, 성급한 입법을 지적한 교사집단은 본인들의 이익만 내세우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불과 2년 전, 학부모의 민원으로 서이초 교사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교사들은 거리로 나가 살려 달라고 외쳤다. 교사자살사건은 처음이었지만 분명 처음이 아니었다. 수년 동안 지속적으로 보도된 우울증 교사에 대한 통계는 언제나 대중의 관심 밖이었다. 참 교사라면 응당 모든 일들을 감내해야 한다는 내외의 시선은 사명감이라는 이름으로 그 어느때보다 묵직하게 교사집단을 압박해왔다.


그러다 서이초 사건 이후, 꾹꾹 눌러왔던 아픔이 터져 나왔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거리로 나온 이 들의 용기에는 본인의 힘듦보단 선배교사로서의 미안함과 동료교사로서의 안타까움이 우선했다는 것이다. 이토록 미련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이 바로 교사 집단이었다. 서이초 사건은 잠시나마 대중들에게 교사의 아픔을 조명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변할 수도 있을거라는 희망의 빛이 꺼졌다. 우린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교사들은 여전히 민원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으며, 말도 안 되는 학부모의 요구를 감내해야 한다. 아, 달라진 거라면 교사에 대한 적대감이 좀 더 깊어졌고 좀 더 날카로워졌을 뿐이다.


큰걸 바라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든 잘못을 교사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는 날카로운 사회 말고,

서슬 퍼렇게 날을 세운 말들을 뱉어내는 감정쓰레기통이 되는 것 말고,

무차별적인 적대감으로 ‘내 아이 먼저’를 외치는 그런 환경 말고,

온전히 교사의 교육활동이 보호되는 세상이 이토록 어렵다는 것을 난 몰랐다.


여전한 무력감 속에서 내가, 우리가, 내 동료가 병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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