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 이모님들과의 공동육아
그래봤자 지방의 흔한 신축 아파트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곳에선 나 같은 생계형 직장맘을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단지내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반 아이들 열 명 중, 아이를 직접 등하원하며 출근하는 엄마는 나 하나뿐이었다. 다른 엄마들은 전업주부거나 입주 육아 도우미를 썼다. 아이를 맡기고 급히 출근할 때면 아파트 로비에서 곱게 차려입은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 날, 어버이날 행사를 한다기에
조퇴를 내고 어린이집에 갔다.
서너 명의 엄마들이 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행사가 끝나자 그중 한 여자가 다가와 차 한 잔 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 별 생각 없이 반갑게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이미 친한 사이인 듯 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애꿎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릴 무렵, 한 여자가 내게 물었다.
"무슨 일 하세요?"
"중학교 교사예요."
"어머, 힘드시겠어요. 혹시 기간제세요?"
"아... 아뇨. 정교사예요."
"아."
그들의 짧은 '아' 한 마디와 서로 마주치는 눈빛이 왠지 미묘했다. 그 의중을 알 수 없어 좀 당황스러웠다. 잠시 후, 또 다른 여자가 물었다.
"몇 동 사세요?... 집은 전세에요?"
자꾸만 멈칫하게 되는 질문들이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여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건 내 생각이나 성격 따위가 아닌, 겉으로 보여지는 삶의 단가와 수치였다는 것을.
그 다음부터는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그런 대화를 주고받는 여자들이 영화나 TV 드라마가 아닌 주변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날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날의 만남은 한동안 내가 이 동네 여자들과 함께 잘 지낼 수 있겠는가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사유하게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들과는 친하게 지낼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그 즈음, 세 분의 이모님들을 알게 됐다.
아파트 내 키즈카페가 새로 문을 여는 날이었다.
키즈카페는 작지만 알찼다. 볼풀장과 미끄럼틀, 방방이, 각종 장난감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새 커피머신과 쉴 수 있는 의자들도 있었다.
그곳에 처음 간 날,
세 분의 이모님들과 처음 말을 하게 됐다. 낯익은 아이 셋과 함께였다. 세 아이의 이름(별명)은 벼리, 동호, 꾸꾸. 모두 내 아이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님은 뵌 적이 없었고, 그래서 이모님들만 낯이 익었는데, 알고보니 그분들은 모두 '입주 도우미'였다.
이모님들은 나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었다. 엉덩이를 살짝씩 옮겨 앉으며 "여기요, 이쪽으로 앉아요."하며 반겨주었다. 내가 그 동네에서 처음 사귄 육아 동지들이었다.
꾸꾸네 이모님은 체격이 크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한국말보다 중국말이 더 편한 조선족 이모님이었다.
언젠가 내가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하자, 그는 자랑스럽게 시험문제를 내기도 했다.
" 你是北京人吗?(당신은 베이징 사람입니까)?"
이모님의 또렷한 발음 덕분에 더듬더듬 어설프게나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자 세 분 모두 손뼉을 치며 잘 한다고 칭찬해주었다.
동호네 이모님은 조용하고 단정했다. 본인 손으로 키운 손주가 이미 다섯이라 했다. 최근에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좀 쉴까 했지만, 같은 성당을 다니는 젊은 부부의 간절한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모님의 동그란 얼굴과 처진 눈매는 동호와 꼭 닮아 있었다. 친 손주라고 해도 믿겠다 하자, 이모님은 흐뭇하게 웃으며 좋아하셨다.
벼리네 이모님은 유독 말수가 적었다. 앞니 하나가 빠져 있어서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래도 아이를 대하는 목소리는 늘 부드럽고 다정했다. 무겁지도 않은지 항상 아이를 안거나 업어주곤 하셨다.
그분들은 초보 엄마라 서투른 내게 육아에 관한 여러 팁들을 전수했다. 어느 날은 애 옷을 춥게 입혔다면서 목에 가재수건을 둘러주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애기 밥은 잘 해 먹이냐면서 직접 만드신 반찬을 나눠주기도 하셨다.
나는 이모님들의 오지랖 넓은 말들이 좋았다. 이 아파트에 살면서 가장 쉽게 마음을 열고 기댄 이웃들은 또래의 엄마들이 아닌, 입주 도우미 이모님들이었다. 우리의 공동육아 시간만큼은 아이도, 나도 긴장감을 내려놓고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추석이 끝난 후 이모님들은 각자 집에서 싸온 명절 음식을 푸짐하게 내놓기도 했다. 그날은 키즈카페에서 우리만의 잔치를 열었다.
꾸꾸네 이모님은 월병을 들고 오셨다. 갈색의 둥근 밀가루 과자 속에 견과류와 말린 열대과일이 들어 있어 달고 맛있었다. 동호네 이모님이 가져오신 색색의 전들도 하나같이 맛이 있었다. 그때는 배만 고팠던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허기진 상태였다. 아무런 접점도 공감대도 없을 것 같던 이모님들이 그때의 공허한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벽 시계가 7시를 가리키면 내일 또 보자며 훌훌 털고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던 날들처럼, 연락처 하나 남기지 못한 채 그렇게 끝났다. 그분들의 소식은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항상 그 시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모님들의 모습도 어느새 오래된 꿈처럼 희미해졌다.
동호, 벼리, 꾸꾸.
아이들은 지금 어떤 열한 살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을까.
세 분의 이모님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부디 잘 지내고 계시기를,
외로웠던 생활 속 유일하게 힘이 되어준 그 모습들 그대로 어딘가에서 평안히 살고 계시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