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단둘이 지새운 밤
세 번째 집에선
나와 아이, 둘이서만 지냈다.
새로 발령받은 학교 근처에 집을 구했다. 운 좋게 신축 아파트 한 채가 급매로 나왔다. 34평형의 깨끗한 아파트였다.
거실에 앉으면 새파란 하늘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이 보였다. 탁 트인 풍경을 마주하니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안정적인 직장도 얻고- 어느새 이렇게 좋은 집에 살 수 있다는 게 큰 성공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 넓은 집이 훗날 얼마나 큰 외로움으로 다가왔는지를. 남편 없는 하루가 그렇게 길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것이 그렇게 버거운 일이었는지를.
그 집에서 주말부부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직장이 멀어 주중엔 사택에서 지내고 주말에만 내려왔다.
나는 어린이집과 하원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돌보며 직장에 다녔다. 단단히 각오했기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몇 달이 쌓이자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갔다. 남편 없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려니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양가 어르신들께 도움을 요청했다. 가장 먼저 달려오신 건 시어머니였다. 어머님은 왕복 1시간 거리를 자주 오가며 아이를 돌봐주셨다. 때로는 내가 시댁에서 자고 학교로 출퇴근하기도 했다.
맞벌이인 친정 부모님도 형편껏 도와주셨다. 방학 때면 아이와 함께 친정에 머무르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아이가 독감에 걸렸던 때에는 남편과 나, 친정 부모님이 번갈아 하루씩 연차를 내어 아이를 돌보기도 했다.
그때는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늘 조급했고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점차 철이 들었다. 친정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그 시절 젊었던 엄마는 어떻게 돈도 벌고 살림도 하고 아이 둘을 키워내셨던 걸까.
그제서야 이른 아침에 정장 차림으로 동동거리며 도시락을 싸던 엄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운동회날, 순서가 다 끝나갈 무렵 정장 스커트 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오시던 모습도 떠올랐다. 내가 그때의 엄마 입장이 되어본 후에야, 젊었던 엄마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낯선 학교에 적응하는 생활은 쉽지 않았다.
일손이 부족한 신설 학교에 근무하느라 할 일이 많았지만, 나는 두돌도 안된 아들을 키우는 초보 엄마이기도 했다.
그때는 육아시간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보란 듯이 잘해내고 싶었지만, 결국 양쪽 모두 낙제점을 받고 말았다. 남편과의 다툼이 잦아졌고 때로는 동료 교사들의 불만 섞인 뒷말이 들려왔다. 나를 향한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당시 출근길에 지나치던 주유소가 있었다. 그 주유소에는 작은 편의점이 딸려 있었다. 너무 피곤한 날이면 그곳에 차를 세우고 캔커피나 박카스를 샀다. 차 안에서 음료를 홀짝이며 숨을 고르던 5분이, 하루 중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박카스를 계산하고 돌아서려는데 편의점 사장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피곤하시죠? 커피 한 잔 하시고 힘 내세요."
중년의 사장님은 방금 내린 커피를 종이컵에 담아 건네주셨다. 얼떨결에 커피를 받아 들고 차로 돌아와 한두 모금 홀짝이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매일 좋지 못한 평가를 받던 때였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지독한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다. 낯선 이의 커피 한잔에 위축됐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날 아침, 나는 차 안에서 한참 흐느껴 울었다. 한 손에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든 채로.
눈이 퉁퉁 붓고 화장이 다 지워질 정도로 눈물을 쏟아낸 후에야 비로소 속이 개운해졌다. 그날부터 이겨내보자 하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조금씩 피어났다.
주말부부 생활이 삼 년이 흘렀다.
동동거리며 사는 것에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시간이 흐른 만큼 많이 단단해졌다. 아침이면 웃으며 아이 등원을 시키고, 퇴근하면 다시 씩씩하게 아이를 씻기고 책을 읽어주었다.
아들도 어느새 다섯살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는 커갈수록 점점 더 아빠의 빈 자리를 느끼는 듯 했다. 주말에 남편이 다시 올라가려 하면 그때부터 아빠, 가지말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쯤 아이가 또래보다 '발달이 느리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유치원 선생님께 발달검사를 받아보라는 조심스런 권유를 받기도 했다. 우유곽도 못 열고, 달리기도 꼴찌고, 말도 거의 안 한다고 했다. 아이에게 어떤 결핍이 생긴 걸까. 혹시, 나 때문인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서 그런걸까.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퇴근 후, 아이 손을 잡고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검사를 받았다. 근심에 휩싸여 찬바람을 맞으며 어둑어둑해진 길거리를 쏘다녔다. 여러 번의 검사 끝에 다행히 아이의 지능은 평균 이상, 대근육 발달도 정상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만 소근육 발달이 조금 약하고 말할 때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가벼운 언어 치료를 권유받았다.
그때부터는 다시 퇴근 후에 아이를 데리고 언어치료를 받으러 가거나 집 근처 공원과 놀이터를 오가며 바깥 놀이를 하는 게 일상이 됐다. 때로 너무 지치고 힘들면 젊은 시절의 친정 엄마를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유독 힘든 날에는 신경정신과에 들러 우울증 약을 처방 받기도 했다. 상담실에서 상담도 받고, 남편과 긴 대화를 나누면서 내게 주어진 상황들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바꿔보고자 힘을 썼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다. 늘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때 머물렀던 공간은 상대적으로 기억에 거의 남지 않았다. 늘 희뿌옇게 처리되어 마치 안개속의 집처럼 회상이 됐다. 아주 좋고 넓은 집이었지만, 그래서 더 공허하게 다가왔다.
나는 밤이면 가장 작은 방의 한 구석에 이불을 펴고, 아들과 꼭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좁게 몸을 맞대고 서로의 온기를 온전히 느껴야만 비로소 잠이 왔다.
아이의 작은 손, 다르랑거리는 숨소리가 마지막 남은 이성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때의 집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고통의 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