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건 끝이 없고, 여유는 늘 부족했다.
서른여덟. 늦깎이 엄마가 되어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찾아볼 때마다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이유 없이 비싸 보이는 가격표였다.
이름 있다 하는 유모차 한 대는 웬만한 가전제품보다 비쌌고, 젖병 소독기와 바운서는 ‘국민 육아템’이라 불리면서도 정작 가격만큼은 전혀 국민적이지 않았다. 특히 플라스틱에 ‘BPA Free’ 라벨 하나 붙었다고 가격이 몇 배로 뛰는 걸 보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성능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불안한 마음에 붙은 값이구나.”
필요한 건 끝이 없는데 아이는 금방 큰다. 모든 걸 새것으로 준비하기엔 현실적인 부담이 컸고, 무엇보다 내 안의 ‘가성비 계산기’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발을 들이게 된 곳이 있었다.
“당신 근처의 마켓, 당근.”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위생 관념 철저한 내가, 다른 사람이 쓰던 물건을 내 아이에게 준다는 것이 영 낯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거래에서 상태 좋은 아기띠를 정가 대비 놀라울 만큼 저렴한 가격에 들여온 순간, 나의 고정관념은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는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쇼핑몰보다 이 주황색 앱을 먼저 켜는 사람이 되었다.
과하지 않게, 그러나 꾸준하게.
키워드 알림을 걸어두고 시세를 확인하고, 상태가 좋은 물건이면 주저 없이 거래를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자 우리 집 거실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변해갔다.
트램펄린, 국민 문짝, 미끄럼틀, 각종 블록, 편백나무 존, 플레이도우, 주방 놀이 세트, 그리고 자동차들…
장난감 종류는 정말 무궁무진했다.
새 제품이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장난감들이 하나둘 자리 잡으며, 거실은 웬만한 키즈카페 못지않은 공간이 되었다. ‘조금 더 합리적인 방식으로’ 풍요로운 육아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들이 있었다.
어린이집 하원 길, 다른 엄마들이 내 아이의 장난감을 보며 물어올 때였다.
“어머, 이거 어디서 샀어요? 너무 좋아 보이네요.” “아, 그거요? 당근에서 구했어요.”
그 짧은 대답을 내뱉던 순간, 묘한 감정이 스쳤다. 속으로는 늦깎이 왕초보 엄마인데, 겉으로는 잠시나마 ‘육아템 잘 아는 인싸 엄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뿌듯함이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사실 나는 극 I + 극 T 성향이다. 그런 내가 물건을 주고받으며 낯선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동네 카페에서 번개 모임으로 ‘육아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래하는 남의 집 앞, 혹은 지하철역 출구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들.
“이거 저희 애도 정말 잘 썼어요. 잘 쓰세요.”
그 별거 아닌 문장 하나에도 초보 엄마였던 나는 이상하게 위로를 받았다. 누군가와 ‘육아’라는 공통분모로 잠깐 연결되는 그 느낌이, 생각보다 따뜻했으니까.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어머, 이건 너무 싸잖아. 일단 사두자!”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나오기 시작했고, 그 결과 베란다 한켠에는 ‘언젠가 쓸 것 같은 물건들’이 층층이 쌓였다.
하지만 돌아보면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
둘째가 태어나고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약 3~4년. 그 시절의 나는 당근마켓을 생활의 한 부분처럼 사용하며 살았다. 나의 ‘매너 온도’가 95도를 넘길 만큼, 꽤 성실하게.
누군가에게는 그저 단순한 중고 거래 앱일지 몰라도, 그때의 나에게 당근은 육아 초반의 혼란과 경제적 부담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해 준 고마운 비상구였다.
지나고 나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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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근마켓(Danggeun Market):
한국의 대표적인 동네 기반 중고 거래 플랫폼.
특히 육아용품은 사용 기간이 짧아 상태 좋은 물건이 자주 올라온다.
그래서 육아맘들 사이에선 “제2의 친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 매너온도:
당근마켓에서 사용자의 매너를 보여주는 지표.
36.5도에서 시작해 99도가 최고치이며, 95도 이상이면 당근마켓 고인 물 혹은 성인군자 수준임을 의미한다.
- BPA Free:
환경호르몬인 ‘비스페놀 A’가 검출되지 않았다는 의미.
아기 용품에서는 필수지만, 가격이 유독 비싼 이유이기도 하다. 육아템 가격을 급상승시키는 주범 중 하나.
- I 성향(내향형 Introversion):
MBTI 유형 중 하나. 사람 만나는 것보다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타입.
그런 내가 중고 거래를 위해 낯선 사람과 약속을 잡고 외출했다는 것 자체가 큰 용기였다.
- T 성향(사고형 Thinking):
MBTI 유형 중 하나. 감정보다 논리·효율·합리를 중시하는 성향.
"예쁘다"보다 "사용 기간 대비 가격이 맞나?"를 먼저 계산하는 타입.
육아템 앞에서도 본능적으로 ‘가성비 분석 모드’가 발동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