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만의 '세계'를 인정하기 시작하다.
내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 늦깎이 엄마인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이고, 새롭고, 어렵다.
어느 날 하이클래스 앱에서 알림이 왔다. [재능발표회 영상 제출 안내]
학교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 학교는 각자 자신의 꿈이나 끼와 관련된 영상을 직접 촬영해 제출하고, 학년별로 함께 시청하는 방식으로 ‘재능발표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제출은 '선택 사항'이었다. 하고 싶은 사람만 하면 되는, 강제성 없는 행사. 하지만 나는 뼛속까지 T 성향의 엄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자. 경험은 많을수록 좋다.”
이것이 나의 육아 철학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제안했다. 최근 피아노 진도가 ‘체르니 100’으로 나갔으니, 피아노 연주 영상을 촬영해 제출해보지 않겠냐고. 다행히 아이는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고, 기본적으로 성실함이 몸에 밴 아이라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노 선생님의 추천으로 정한 곡은 <학교 가는 길>. 경쾌한 멜로디의 곡이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공지를 확인한 날로부터 제출 마감일까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단 5일뿐이었다.
곡을 배우고 온 다음 날부터 우리는 그야말로 '맹연습'에 돌입했고, 나도 옆에서 함께 점검하며 격려했다.
처음엔 우리 둘 다 즐거웠다. 그런데 매일 30번씩 스파르타식 연습을 강행한 끝에, 거기에 내 T 엄마식 지적과 잔소리까지 더해져, 연습 삼일째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영상 촬영 그냥 포기하고 싶어..."
그 순간 ‘아, 내가 너무 몰아붙였나’ 싶은 마음이 스쳤지만 나는 곧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그만두면, 아이에게 '힘들면 언제든 포기해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것만 같았다.
"OO아, 노력 없이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힘들게 연습해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 그게 더 보람 있는 거야.
지금 너무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하면 완성할 수 있어."
......
하지만... 고작 8살 아이에게 '보람'이니 '노력'이니 하는 이야기가 와닿을 리 없었다. 아이는 엄마의 고집을 고스란히 닮아, 확실한 동기부여가 없으면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는 편이었다. (굳이 고집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결국 나는 아이에게 '가장 확실한 제안'을 건넸다. 평소 아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그것.
"OO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영상 제출하면... 네가 갖고 싶어 하던 레고 '블랙 펄' 사줄게. 대신, 억지로 하면 안 되고 웃으면서 즐겁게 해야 해. 알았지?"
"... 응? 블랙 펄... 진짜?"
눈물 젖은 눈으로 몇 초간 고민하던 아이는 금세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정말 사주는 거지?"
그 순간부터 피아노 연습은 초반의 눈물 바람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로 채워졌다. 아이도 웃고, 나도 웃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영상 촬영에 성공했고, 영상 편집 앱의 도움을 받아 ‘멋지고 귀여운’ 영상이 완성됐다.
나는 그것이 '노력 끝에 얻은 아름다운 결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은 일주일쯤 뒤에 일어났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평소와 달리 진지한, 아니 조금은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내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말아 줘."
상황은 이랬다. 며칠 전,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같은 반 친구 엄마와 메시지를 하다가 '재능발표회'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리고 내심 아이가 대견한 마음에 연습 과정을 이야기했다. 아이가 연습하다가 힘들어서 울기도 했지만, 결국 마음을 다잡고 성공했다는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화근이었다. 그 엄마가 무심코 자기 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고, 학교에 간 그 친구가 내 아이를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야, 너 피아노 연습하다가 울었다며? 하하. 울보래요~"
내 아이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정색을 하고 말려도, 친구는 재미있다는 듯 반복적으로 놀려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그저 아이가 힘든 과정을 이겨냈다는 '기특함'을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아이들의 세계에서 그 이야기는 그저 좋은 '놀림감'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내 생각이 짧았다. 엄마의 가벼운 입이 아이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나는 아이의 눈을 보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OO아, 미안해. 엄마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네가 힘들어도 잘 해낸 게 자랑스러워서 말했던 건데, 친구가 놀릴 줄은 몰랐어. 정말 미안해. 앞으론 엄마가 밖에서 네 얘기 함부로 하지 않을게."
아이는 엄마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의외의 말을 덧붙였다.
"엄마, 그런데 OO, XX, OX... 이 세 명한테는 내 얘기해도 돼. 하지만 학교에서 알게 된 다른 친구들한테는 절대 하지 말아 줘."
아이가 허락한 세 명의 이름. 세 살 때부터 같은 어린이집을 거쳐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까지 쭉 함께 자라온, 자그마치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찐친'들이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내 아이는 더 이상 엄마 품 안의 아기가 아니었다. 자기만의 세계가 생겼고, 그 세계 안에서 '내 모습을 보여줘도 되는 사람'과 '보여주기 싫은 사람'을 스스로 판단하고 구분하는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엄마인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이의 사생활을 내 기준대로 판단해 공유하려 했던 것이다.
엄마는 많이 미안했지만, 그래도 아이는 약속대로 손에 쥔 레고 '블랙 펄' 덕분에 금세 행복해졌다. 거실에 앉아 한참 레고를 조립하던 아이가, 문득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엄마, 근데 재능 발표회 때 내 영상 나오니까 기분 진짜 좋았어. 선생님도 나 피아노 잘 친다고 칭찬해 주셨어."
말을 마친 아이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다. 엄마의 말실수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성취감'은 남은 것 같아서.
레고에 집중한 아이의 작은 등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너를 마냥 아기 취급하지 않겠다고. 너만의 세계와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
- 하이클래스 (High Class):
초등학교와 가정을 연결하는 스마트 알림장 애플리케이션. 매일의 알림장, 학교 공지사항, 급식 정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아이는 1학년이라 그런지, 반 활동 사진도 자주 올라와서 보는 재미가 있다.
- 학교 가는 길: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대표적인 연주곡. 등굣길의 설렘을 담은 경쾌한 리듬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매력적이다. 듣기에는 편안하지만 막상 연주하려면 까다로운 박자 감각이 필요한 곡이다.
- 레고 블랙 펄 (Lego Black Pearl):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해적선을 재현한 레고 시리즈. 검은 돛과 웅장한 선체 디테일 덕분에 아이들은 물론 성인 수집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아이의 '눈물 값'으로 지불된, 묵직한 가격의 레고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