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난'이 아니라 '성실'을 물려받았습니다.

냉장고는 견뎌도 자식에겐 무너지던 나의 슈퍼맨

by 온 이든

1954년생. 전쟁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 나의 아버지는 ‘달리기’를 잘하는 소년이었다. 공부도 곧잘 했고, 운동신경이 남달라 학교 선생님은 그를 육상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시키려 했다.


당시 선생님은 할아버지 댁까지 찾아와 사정했다고 한다.


"아버님... 야는 육상을 안 하더라도 원체 똑똑해가, 공부로도 충분히 성공할 깁니더. 제가 이래 부탁드리께예. 고등학교 쫌 보내주이소."


할아버지의 침묵 앞에서도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형편 때문에 그라시는 거면, 제가 학비 지원도 해 드리께예. 너무 아까운 학생이라, 꼭 고등학교 보냈으면 싶습니더."


그러나 할아버지는 거절하셨다. 너무 어려운 형편에, 아들이 당장에라도 일을 해서 생계를 돕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는 1남 4녀 중 장남이었다. 장남에게는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공부를 시킨다던 시절이었지만, 절대적인 가난 앞에서는 장남의 특권도 무용지물이었다. "아들이니까 그나마 중학교까지는 보낸 기다." 그것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는 그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고 했다. 하고 싶은 공부도, 달리고 싶은 꿈도 꺾여버린 열여섯 소년이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곤 고작 이런 것이었다.


방구석에 쌓아둔 나락(벼) 가마니를 밤새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터질 듯 꽉 찬 가마니를 바늘로 터뜨리며, 그는 속으로 얼마나 울었을까. 그 소심하고 슬픈 반항을 끝으로,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생계라는 전쟁터로 떠밀려 나갔다.


내가 기억하는 젊은 날의 아버지는 ‘슈퍼맨’이었다. 고된 공장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어린 우리 남매를 번갈아 자전거에 태우고 동네를 누비셨다.


마땅한 놀이거리가 없던 시절, 아버지가 태워주는 자전거는 세상 그 무엇보다 신나는 놀이기구였다. 내 눈앞을 가득 채운 아버지는 태산처럼 거대했다. 힘차게 페달을 밟던 그의 다리가 얼마나 고단하고 아팠을지, 어린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시내버스 운전대를 잡으셨다. 어느 날, 라디오 방송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우연히 아버지 버스에 탔던 대구 MBC 관계자가 아버지의 모습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아 사연을 소개한 것이다.


그때는 승객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급출발하는 게 예사였던 험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 승객이 자리에 완전히 앉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고, 내리실 때도 세심하고 안전하게 도와주셨다. 그 '당연하지 않은' 배려가 사연자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고 했다.


방송 진행자는 아버지와 전화 연결도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버지는 무척 수줍어하셨다. 쏟아지는 칭찬에도 그저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며 덤덤하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투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어린 나는 아버지가 사무치게 자랑스러웠다.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세상에서 제일 힘센 사람이니까.


하지만 가난은 착한 사람을 비껴가지 않았고, 불행은 예고 없이 가장의 어깨를 덮쳤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을 때였다.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하반신 마비 증세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내 쫌 일으켜봐라... 다리가 와 이라노... 어어?"


당시 오빠는 초등학교 6년이었고 엄마와 어린 자식 둘이 아버지를 일으키려 해도 그는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를 반복하셨다.


정말 감사하게도, 내가 다니던 교회 전도사님이 아빠를 등에 업고 교회 차에 태워 병원에 데려다주셨다. 하지만 하반신 마비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 이틀로 끝날 줄 알았던 마비는 한 달이나 지속되었다. 가장의 다리가 굳어버린 그 한 달은, 우리 가족에게는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이었다.


아버지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까 봐, 그리고 처자식을 굶길까 봐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슬픔에 잠겼다. 엄마 또한 혼자서 감당해 가야 하는 그 상황이 너무나 버겁고 무서우셨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일을 하며, 남편 병간호를 하며, 자식들을 건사하며 그 시간을 굳건히 버티셨다. 그리고 당시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엄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30일을 꼬박 새벽 기도를 나가셨다. 그 간절함 때문인지, 아버지는 한 달 만에 다시 두 다리로 일어서셨다. 다시는 쓰러지지 않겠다는 듯, 더 굳게.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화물차 운전대를 잡고 계셨다. 개인 용달로 이삿짐을 나르던 어느 날이었다. 화물칸 위에서 짐을 고정하던 밧줄이 ‘툭’ 하고 끊어지며, 아버지는 화물칸 아래로 추락하셨다. 그 바로 위로, 냉장고가 떨어졌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오셨다. 병원비가 무서웠던 걸까, 아니면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그랬던 걸까.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끙끙 앓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주무시는 줄로만 알았다.


한참 뒤에야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를 듣고 119를 불렀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팔이 으스러지도록 골절되었고, 한쪽 눈의 시력을 잃으셨다. 냉장고에 깔리고, 뼈가 부러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그 고통을... 그는 대체 어떻게 집까지 참으며 걸어왔을까.


그렇게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부모님은 처음에 나의 대학 진학을 반대하셨다. 잠깐 동안은 그게 참 야속하고 서러웠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아버지는 결국 나의 고집을 꺾지 못하셨다.


반대는 하셨지만, 막상 학교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나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셨다. 여력이 되실 때마다 꼬깃꼬깃한 용돈을 쥐어주셨고, 빠듯한 살림을 쪼개어 학비를 보태주기도 하셨다.


본인도 배우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라 했는데... 가난 때문에 자식에게 똑같은 상처를 줘야 했던 그 심정은 오죽했을까. 아버지의 속은 나보다 더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 마음을 너무나 알 것 같아서, 나는 차마 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 태어나,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이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쳐야 했던 그들에게 '생존'은 매일매일 치러야 하는 전투였다는 것을. 어떤 이들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식을 버리기도 했던 그 모진 세월 속에서. 잘해주든 못해주든, 끝까지 우리를 품고 먹이고 입혀준 것만으로도...


그것은 기적 같은 사랑이었음을 이제는 알고 느낀다.


아버지는 그 큰 사고를 겪고도 회복 후 다시 운전대를 잡으셨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불편한 몸으로, 칠순이 넘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하셨다.


운전면허 갱신의 시기가 되면 몇 날 며칠을 잠을 못 이루셨다. 혹여나 보이지 않는 한쪽 눈 때문에 운전면허 갱신이 안될까 봐. 그러면 생계가 어려워지니까. 그렇게 아버지는 평생을 노심초사하며, 운전 중 단 한 번의 교통 사고 없이 가장의 역할을 다 하셨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늘 엄마에게는 고생시켜 미안하다 하셨고, 자식들에게는 해준 것이 없다며 미안해하셨다.


얼마 전, 부정맥과 노환으로 몸이 약해지신 아버지는 드디어 긴 노동을 멈추고 은퇴를 하셨다. 평생을 쉼 없이 달려온 육상 선수 같은 삶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억척스러운 가장으로만 알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 눈물이 많은 남자였다. 냉장고에 깔려 뼈가 부러졌을 때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던 그 독한 사람이, 자식 일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오빠가 군대에 입대하던 날, 훈련소 앞에서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내가 취업을 해서 처음 서울로 떠나던 날도 그랬다. 기차역에서 멀어지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자신의 고통에는 그토록 무디면서, 자식이 둥지를 떠나는 뒷모습에는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속 짐은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신 듯하다. 요즘 아버지는 당신의 손자 손녀인 내 아이들과 이야기할 때면, 불쑥불쑥 묵혀둔 회한을 꺼내 놓으신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와, 우리 OO이 진짜 똑똑하네! 너거 엄마가 어릴 때 그렇게 똑똑했는데... 할아버지가 아무것도 못 해줘가 미안타. OO이가 너거 엄마 꼭 닮았는갑다!"


손주를 칭찬하는 그 말속에는, 미안함에 가려 차마 해주지 못했던 '딸에 대한 칭찬'이 들어 있다. 가난 때문에 딸에게 아무것도 못해줬지만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마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아빠, 나는 진짜 괜찮은데. 아빠 덕분에 이만큼 잘 컸는데.


가끔 생각한다. 내가 가진 이 ‘무식한 성실함’은 어디서 왔을까. 극한의 어려움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내는 이 ‘질긴 맷집’은 누구의 것일까.


그것은 돈보다 귀한, 나의 부모님이 온몸으로 물려주신 유산이다. 나락 가마니를 터뜨리며 울분을 삼키던 소년이, 냉장고에 깔리고도 가족을 위해 다시 일어선 가장이 남겨준 위대한 유산.


그래서 나는 나의 아버지를, 그리고 엄마를 누구보다 존경한다. 매일매일 사무치게 사랑하고 감사한다. 당신들이 온몸으로 버텨준 덕분에, 오늘의 내가 숨 쉬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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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든의 덧붙임

- 다음 이야기 예고:

추락한 냉장고에 깔려도 참아냈던 아버지의 삶 뒤에는, 비슷한 듯 다른 엄마의 삶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나의 또 다른 뿌리, <나의 엄마> 이야기는 추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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