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사람, 나의 엄마

My Way 인생을 살아낸 한 여자에 대한 기록

by 온 이든

1954년생. 전쟁의 폐허 위, 3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난 우리 엄마. 어린 시절 잠시 유복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군수 출마’라는 꿈에 사로잡혀 수차례 도전했고, 번번이 낙방했다. 무모한 욕심은 결국 집안의 모든 재산을 탕진했고, 엄마의 성장기는 혹독한 가난과 함께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특유의 긍정으로 매 순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운명과 싸우기보다, 그 운명을 등에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단단한 성격.


그리고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무엇보다 대담했다. 엄마가 9살, 이모가 6살이던 어느 날. 우물가에서 놀다가 어린 이모가 우물에 빠졌다.


보통의 아이라면 울며불며 어른을 부르러 뛰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스쳤다고 한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곧바로 한 번은 물 위로 떠오른다."


엄마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도와 달라고 계속 소리를 치면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우물 아래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동생이 수면 위로 잠깐 떠오른 순간을 포착해 낚아채듯 끌어올렸다. 9살 아이의 판단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냉철함이었다.


그 판단 하나가 동생의 생명을 살렸다. 이모는 지금도 엄마를 평생의 은인이라고 한다. (아주 충성스럽게... ㅎㅎ)


엄마는 그런 아이였다. 단순히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다.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게 길을 찾는, 삶의 지혜를 가진 아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 한 가정을 버텨내는 어른이 되었다.


집안 생계를 돕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엄마는 27살, 당시로선 꽤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후 마주한 현실은 더 거친 파도였다.


지지리도 가난한 두 집안이 만났으니 가난은 배가 되었고, 엄마는 자식들 건사하기도 벅찬 살림에 시누이 3명의 뒷바라지까지 도맡아야 했다. 어렵게 일해 번 돈으로 시누이들 결혼까지 시켰건만, 돌아온 것은 고마움이 아닌 '철저한 소외'였다. 며느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똘똘 뭉쳐 엄마를 보이지 않는 벽 밖으로 밀어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병이 나거나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멘탈 갑'이었다. 시월드가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My way'를 갔다.


남몰래 수없는 눈물을 삼켰을지언정,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냈다. 남편의 병환과 사고 앞에서도 엄마는 가장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며 우리를 지켜냈다.


...


엄마는 젊은 시절 공장 2교대 근무를 하셨다. 야간 12시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돌아오면, 잠을 청하기보다 밀린 집안일을 먼저 했다.


철없던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두 살 터울의 오빠는 그런 엄마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오빠가 고사리손으로 빨래를 하면, 나도 덩달아 마당에 빨래를 널곤 했다. 엄마는 훗날, 그때 우리가 도와준 그 작은 손길이 고단한 삶을 버티게 한 힘이고 기쁨이었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취업을 하고, 서울에서 제법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이었다.


엄마를 서울로 모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대접했다. 자식들 앞에서 늘 바위처럼 묵묵하던 엄마가, 스테이크 앞에서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내게 처음 보인 약한 모습이었다.


"내가 니 대학 반대한 거 미안타... 그때 내가 무슨 빚을 내서라도 니 재수시켜 줄 껄. 엄마가 너무 미안타."


가슴이 찡했지만, 나는 엄마의 딸답게, 경상도 여자답게 덤덤하게 대답했다.


"엄마~ 개얀다(괜찮다). 별소리를 다 한다. 그 시절에 안 어렵게 살았던 사람 누가 있노? 내 이래 사람 구실 하면서 사는 게 다 엄마 아빠 덕분인데. 안 미안해도 된다. 울지 말고 밥 묵자."


투박한 사투리 속에 우리는 알고 있었다. 어떤 아름다운 수식어가 없어도, 이 덤덤한 대화 속에 세상 무엇보다 큰 사랑이 들어 있다는 것을.


...


칠순이 넘어서도 엄마는, 피할 수 있었던 일을 스스로 떠안는 선택을 했다.


그 혹독했던 시집살이의 주역 중 한 명, 막내 시누이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가족도 없이 홀로 투병하는 시누이. 피를 나눈 형제들조차 각자의 삶이 바빠 외면했던 그 마지막을, 엄마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 기꺼이 떠안았다. 당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미움이 왜 없었을까. 하지만 엄마는 별말 없이 묵묵히 아픈 시누이를 간병했고, 결국 마지막 임종까지 곁을 지키며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것이 그저 세월에 쌓인 정이었는지, 맏며느리의 책임감이었는지, 혹은 단순히 불쌍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엄마는 과거의 원망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환자를 거두는 쪽을 택했다. 그게 엄마가 생각하는 가족의 방식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어떤 폭풍 앞에서도 굳건히 서 있는 나무 같은 사람이다. 아버지가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엄마는 그 울타리 안에서 늘 흔들림 없는 ‘굳센 나무’였다.


엄마와 나는 닮았다. 삶을 버티는 방식도, 마음의 결도, 말투도, 성격도. 그리고 성실함도.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My Way 인생. 넘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매번 다시 일어서며 여기까지 온 삶이었다. 오늘도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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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든의 덧붙임

- 물에 빠지면 정말 떠오를까?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짧은 순간 수면 근처로 떠오르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

물에 빠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신 폐 속의 공기와, 마른 옷감 사이에 갇힌 공기층(에어 포켓)이 일시적인 튜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옷이 물을 완전히 흡수하기 전, 길어야 수십 초에 불과한 이 짧은 시간. 9살이었던 엄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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