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대신 콘솔을 잡았던 날들의 기록
1997년. 세상은 H.O.T. 와 젝스키스에 열광했지만, 나의 관심사는 오빠들이 아니라 기계였다.
나는 고등학교 방송반 엔지니어(ENG)였다. 우리 학교 방송실은 대구 시내 다른 학교들이 벤치마킹을 올 정도로 시설이 좋았다. 교실 하나를 통째로 개조해 만든 스튜디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LP와 CD, 완벽한 방음 장치가 된 아나운서 부스, 그리고 삼원 방송이 가능한 밀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공간을 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각 학년당 딱 3명(프로듀서, 엔지니어, 아나운서). 일개 고등학교 동아리였지만 선발 과정은 꽤 체계적이었다. 성적을 보는 서류 전형부터 시작해 작문 시험, 면접, 그리고 카메라 테스트까지. 몇 차례에 걸친 오디션이 있었고, 나는 그 과정을 통과하여 방송반 명찰을 달았다.
나의 포지션은 엔지니어. 방송실 내 모든 기계 장비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콘솔(Console) 앞에 앉아 페이더(Fader)를 미세하게 밀어 올릴 때의 손맛. 앞 곡의 끝자락과 다음 곡의 도입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믹싱(Mixing). 그 소리가 교내 스피커를 타고 전교생에게 들릴 때, 나는 내가 그 일을 해낸다는 것이 신기하고 뿌듯했다.
방송반에게는 약간의 특권도 있었다. 학교의 수업 종(시보기)을 관리하는 것도 우리였고, 쉬는 시간 선생님들이 안내 방송을 하려 하실 때 마이크를 켜주는 것도 우리였다. 수업 중에 시보기가 오작동해서 엉뚱한 시간에 종이 울리면, 나는 수업하시던 선생님께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고 교실을 뛰쳐나가 방송실로 달렸다. 선생님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주셨다.
아침 0교시, 전교생이 대성학원 녹화 강의를 시청하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방송 송출과 마무리를 담당해야 했기에, 우리는 교실 대신 방송실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함께 공부했다. 그러다 가끔 영상이 나오지 않는 반에서 연락이 오면, 공부하던 책을 잠시 덮고 리모컨을 챙겨 해당 교실로 향했다. TV 자체의 문제인지 단순 조작 실수인지 확인하고 해결하는 일. 그것 역시 우리의 몫이었다.
학생이면서 동시에 스태프(Staff) 같았던 그 묘한 위치.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 학교를 누빌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친구들에게 알게 모르게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수능 시험 일이었다. 다른 학교의 경우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 선생님들이 직접 방송을 하시지만, 우리 학교는 방송반 학생들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시험 유의사항’, ‘OMR 카드 표기 방법’ '휴대품 주의 안내' 등 중요한 안내 방송을 직접 진행하며 우리는 긴장감 속에서 실수나 사고 없이 그 일을 해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교시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릴 때. 고3 선배들이 학교를 빠져나가는 그 순간, 우리는 미리 준비해 둔 배경음악의 볼륨을 올렸다.
Queen의 <We Are The Champions>.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가 교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가는 선배들의 뒷모습 위로 그 노래가 쏟아질 때, 방송실 유리창 너머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우리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우리는 점심, 저녁 도시락도 방송실에 모여 먹었다. (그땐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도시락을 두 개씩 싸 다녔다.) 도시락을 먹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방송실이라는 공간과 쉴 새 없는 우리의 수다, 그리고 깔깔대며 웃던 시간들 때문에 더 행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자리는 거저 유지되는 게 아니었다. 1학년 초 어느 금요일, 2학년 엔지니어 선배가 나를 불렀다. 신입에 대한 일종의 ‘기선 제압’이자 ‘자질 테스트’였다.
금요일 정규 방송이 끝난 후, 선배는 방송실 내의 모든 기계와 TV에 연결된 수십 개의 선을 무작위로 다 뽑아버렸다. 바닥에는 검은 전선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월요일 아침 방송 나갈 수 있게 원상 복구해 놔.”
매뉴얼도 없었다. 막막했지만 일단 그냥 시작했다. 토요일 수업 후 저녁까지, 그리고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서 종일 그 전선 뭉치들과 씨름했다. 입력(Input)과 출력(Output) 단자를 하나하나 대조하며 퍼즐을 맞췄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교내 방송이 진행되었다. 선배는 말없이 놀란 눈치였다. 그날 이후 나는 진정한 ‘엔지니어’로 인정받았다.
나의 집요함은 기계에만 그치지 않았다. 학교 축제인 ‘방송제’를 앞두고 선배가 무대 메인 조명 디자인을 해오라고 시켰을 때였다.
나중에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당시 선배는 내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학년이 해와 봤자 세네 개 정도 끄적거려 오겠지. 사실 그래갖고, 나는 니가 대충 해오면 따끔하게 한소리 할라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가~ 하하하”
하지만 선배의 그 예상은 빗나갔다. 내가 내민 건 공책 한 권을 빽빽하게 채운 수십 가지의 디자인이었으니까.
네온사인의 배치, 색감, 깜빡이는 패턴까지... 공책 한 권을 통째로 사용한 나의 무식한 성실함 앞에 선배는 할 말을 잃었다. 결국 ‘1학년이었던 나'의 디자인이 채택되어 축제 메인 무대의 배경을 장식했다. 어둠 속에서 내가 설계한 조명이 켜질 때, 그 순간의 뿌듯함과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이토록 뜨겁게 몰입했던 대가는 혹독했다. 학교 수업보다 방송실 기계가 더 좋았고, 영어 단어보다 영상 편집(그때는 '1:1 데크 편집'이라는 고된 수작업이었다)이 더 재밌었으니 모의고사 성적이 202점까지 곤두박질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십 개의 엉킨 선을 풀기 위해 주말을 반납하고, 공책 한 권을 조명 디자인으로 채우며 밤을 새우던 그 시간들. 매일의 방송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아이디어 회의, 그리고 단 하루의 방송제를 위해 수개월을 울고 웃으며 준비했던 날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내 모든 마음을 쏟아부었던 시간들이었다.
학생의 본분을 잊은 채 한 곳에만 치우쳤던 나의 10대는, 결국 고3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으로 그 값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난 그때 정말 행복했고, 앞뒤 재지 않고 순수하게 한 가지에 몰두해 있던 그때가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찬란한 시절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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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G (Engineer):
방송반의 기술 총괄. 카메라 촬영부터 음향, 조명, 기계 관리, 영상 편집까지 방송 송출에 필요한 모든 기술적인 부분을 책임지는 역할이다.
- 1:1 데크 편집 (Linear Editing):
컴퓨터가 아닌 비디오 데크 2대를 연결해 테이프에서 테이프로 영상을 복사하며 편집하는 아날로그 방식. ‘Ctrl+Z(실행 취소)’가 없기 때문에, 0.1초만 엇나가도 처음부터 다시 녹화해야 하는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다.
- 콘솔 (Console):
여러 오디오 신호를 섞고 조절하는 음향 기기. 볼륨을 조절하는 막대인 ‘페이더(Fader)’를 손끝으로 미세하게 밀어 올릴 때, 교내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그 짜릿한 손맛은 엔지니어만의 특권이다.
- 대성학원 녹화 강의:
90년대 후반, 인강(인터넷 강의)이 있기 전 고등학교 교실의 풍경. 학교에서 서울 유명 입시학원의 수업 실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VHS)를 구매해, 아침 자습 시간(0교시)마다 교내 TV로 송출했다. 지방 학생들에게는 서울의 ‘일타 강사’ 수업을 접할 수 있는 귀한 자료였으나, 화질이 좋지 않거나 내용이 지루해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