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춰도 괜찮습니다.

후배들에게, 온 마음을 다한 잔소리

by 온 이든

“선생님… 여기 병동은 많이 힘든가요…?”

“암 환자분들 치료하는 곳이니까, CPR도 자주 있겠네요?”


실습을 나온 학생들이 조심스럽게 묻곤 하는 질문이다.


“그렇지. CPR도 자주 있고, 쉬운 곳은 아니야.”


실습 학생들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익숙한 대화다. 이 대화의 끝에, 나는 늘 세 가지 잔소리를 덧붙인다.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이야기들이다.




잔소리 1.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의료인의 양심’을 지키세요.

가장 먼저 강조하고 싶은 건, ‘보이지 않는 순간의 정직함’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무균술(Aseptic technique)을 진행하다가 나도 모르게 멸균 구역을 오염시켰다고 가정해 보자. 주치의도, 프리셉터(Preceptor) 선생님도 보지 못했다. 그대로 진행하면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본인은 알고 있지 않은가.


비록 혼이 나더라도, 그 오염된 상(set)을 과감히 걷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투약(Medication) 상황도 마찬가지다. 만약 투약 실수를 했는데 환자도 모르고, 동료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직 ‘나’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떨까.


모른 척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욕을 먹더라도 주치의에게 사실을 알리고, 반드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별일 아닌 것 같은’ 작은 실수도, 환자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간략한 예로 두 가지 상황만 이야기했지만, 막상 임상에 있다 보면 정직이 요구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정말 많다.


작은 것 하나라도 양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그 단단한 마음가짐은 학생 때부터 다짐하고, 뼈에 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현실과 슬그머니 타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잔소리 2. 가능하다면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을 선택하세요.

“편한 부서는 어디인가요?”가 아니라,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를 묻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큰 병원에 취업을 하고, 정말 바쁜 병동이나 중환자실, 응급실 같은 곳에서 신규 생활을 시작해 보기를 권한다. 그러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점을 잘 받아두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이론을 많이 알아도 실전은 늘 어렵다. 그래도 이론이 탄탄해야 실제 상황에서 환자를 지키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된다.


그리고 가급적, 젊은 시기에 어려운 케이스(Case)와 응급 상황을 온몸으로 겪어보았으면 한다.


나는 여러분이 10년 차가 되어서도 CPR 한 번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채, 급박한 상황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간호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신규 때 깨지고, 혼나고, 부딪히며 배워야 훗날 누군가가 당황하는 순간에 옆에서 묵묵히 버텨주는 ‘진짜 선배’가 될 수 있다.


여러분 모두가 현장에서 당당하게 제 몫을 다하는, 멋진 동료로 우리 오래오래 만났으면 좋겠다.



잔소리 3. 그리고, 너무 힘들다면 ‘잠시 멈춰도 괜찮아요.’

마지막으로, 가장 현실적이고도 아픈 이야기를 해야겠다.


병원에는 여전히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태움(직장 내 괴롭힘) 문화가 존재한다. 크든 작든 여러분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흘러간다.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며 버티다 보면 조금씩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도 한다.


이유 없이 괴롭히는 사람도 많지만, 곁에는 의지할 동기가 있고 여러분을 이끌어 줄 사람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니 힘든 순간에는 그런 사람들에게 기대며 버텨도 괜찮다. 시간이 약이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예외는 분명히 있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역치(Threshold)는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견딜 만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태움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동료들의 소식을 종종 듣는다.


만약, 더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임상을 떠나기를 권한다.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내가 있어야 환자도, 병원도, 세상도 의미를 가진다. 내가 살아야 나의 세상도 존재한다.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다면, 그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곳이 나와 맞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과감하게 나와도 된다.


간호사 면허로 할 수 있는 일은 병원 밖에도 아주 많다. 꼭 임상이 아니어도 괜찮다.


부디,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후배들 중 의료인의 양심 앞에서 흔들리며 괴로워하거나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한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

# 이든의 덧붙임
- 프리셉터(Preceptor):

임상 현장에서 신규 입사자나 학생이 실무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1:1로 지도하는 숙련된 선배를 말합니다. 간호사뿐만 아니라 의사, 약사 등 의료계 전반과 여러 전문 분야에서 통용되는 개념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제 현장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며,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업무 태도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교육자이자 멘토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 내가 버틴 방법:

나 역시 태움과 갈등 속에서 기도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받았던 위로와 기도의 힘이, 지금 어둠 속에 있는 당신에게도 작은 등불로 닿기를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그 시절 나는 잠시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