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유명 인사’가 되었던 순간
첫 직장, 암 병동에서 근무하던 4년 차 시절. 매년 연말이면 병원에는 ‘전 직원 장기자랑’이라는 커다란 행사가 열렸다.
말은 전 직원이라지만, 사실상 각 부서 막내들의 무대나 다름없었다.
고단한 3교대 근무 속에 장기자랑 연습까지 해야 한다는 건,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신규 간호사들에게 정말 가혹행위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우리 병동도 참가를 해야 했고, 회의 시간이 되자 모두가 조용히 바닥만 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누가 나가고 싶겠나. 숨 막히는 정적만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뜬금없이 손을 들었다.
"제가 할게요."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누군가 억지로 떠밀려 나가는 그 분위기가 싫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 안에 잠재된 엉뚱한 기질이 갑자기 꿈틀거린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조건을 하나 붙였다.
"대신, 저 혼자 하겠습니다."
단체 무대는 자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힘든데 듀티(근무표)를 맞춰가며 시간을 조율하고, 의견을 맞추고, 함께 모여 연습하고...
극 I + 극 T 성향인 나로서는 사람 맞춰가며 연습하는 건 춤추는 것보다 더 피곤한 일이었다. 차라리 나 혼자 고생하고 깔끔하게 끝내는 게, 나에게도 부서에게도 훨씬 효율적일 것 같았다.
그렇게 호기롭게 독무대를 자처하고 선택한 곡은... 당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가수 아이비(IVY)의 <A-Ha>. 일명 '의자 춤'이었다.
이왕 하겠다고 손을 들었으니 대충 하는 건 용납이 안 됐다. 어설프게 흉내만 내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느니, 욕은 안 먹게 준비해야 했다.
나는 매일 퇴근 후 정말 열심히 노래와 안무를 연습했다. 거울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웨이브를 연습하던 한 달. 참 치열하고도 웃픈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무대 당일.
나는 핫팬츠와 망사 스타킹, 풍성한 웨이브 가발에 진한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변신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참 낯설었다.
노래는... 민망하게도 '라이브'였다.
립싱크를 하면서 춤만 추는 건 왠지 반쪽자리 장기자랑이 되는 것 같아서, 잘하든 못하든 그냥 라이브에 도전했다. 방송국에서나 볼 법한 무선 마이크를 얼굴에 붙이고 무대에 올랐다.
(나중엔 숨이 턱까지 차올라 '아... 그냥 립싱크할걸...'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ㅠ-ㅠ ㅎㅎ)
음악이 흐르고, 나는 의자 위에서 연습한 대로 고개를 젖혔다.
"내 품에 숨어 A-Ha~ 그녀는 모르게~"
무대가 끝나자 객석에서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물론 내가 춤을 기가 막히게 잘 춰서라기보다는...
"와... 저걸 혼자 한다고?"
"진짜 열심히 준비했네..."
이런 놀라움과, 민망함을 무릅쓴 노력에 대한 격려의 박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시상식. 나는 당당히 ‘인기상’을 받았다.
솔직히 상 받을 실력까지는 아니었지만, 혼자 고군분투한 4년 차 간호사에게 심사위원님들께서 마음을 써주신 덕분이리라.
그리고 무대 뒤에서 만난 수선생님께서 함박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셨다.
"와, 이든아. 내가 평소에도 너 돌아이 기질 있는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하하하. 잘 봤어. 고마워~"
늘 긴장되고 고단한 일상이 반복되던 암 병동 시절. 그날의 무대는 나에게도, 우리 병동에도 작고 유쾌한 추억 하나를 남겼다.
어쩌면 나에게는 이불을 차고 싶은 '흑역사'일 수도 있지만, 덕분에 병동에 평화를 주었고 소소한 웃음을 주었음에 보람을 느낀다. 돌이켜보면 그저 피식 웃음이 나오는, 치열했던 그 시절의 한 페이지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병원 내 유명 인사가 되었다. (직원식당에서 모르는 타 부서 분들이 괜히 와서 인사를 건네곤 했다는 건, 안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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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참고로 그날 받은 두둑한 '인기상' 상금은, 병동 전체 '회식비'로 장렬히 전사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집니다.... (또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