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없는 방, 그곳의 이름은 ‘행복한 고시원’이었다.

화재, 탈출, 그리고 우리들의 소란스러운 청춘

by 온 이든

나의 첫 직장은 서울의 한 대형 병원이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지방에서 올라온 사회 초년생에게 서울의 주거 비용은 너무나 높은 벽이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나는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목돈이 필요 없는 곳, 가방 하나만 들고 들어가면 되는 곳을 택했다. 병원 근처에 있는 고시원이었다.


다행히 혼자는 아니었다. 입사 동기 중 한 명도 나와 같은 처지라, 우리는 같은 고시원에 나란히 둥지를 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시원의 이름은 '행복한 고시원'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한 평 남짓한 방.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지내는 것이 서글플 법도 했지만, 우리는 씩씩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낯선 서울살이가 덜 외로웠다.


병동 선배들은 가끔 나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건네곤 했다.


"이든이는 좋겠다. 행복한 고시원에 살아서... 나도 좀 행복하고 싶다 얘."


선배들의 농담인지, 아니면 고된 병원 생활에 지친 넋두리인지 모를 그 말도 그때는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우리에겐 작은 방에서도 소소하게 웃을 수 있는 나름의 '행복'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시원 생활 6개월쯤 되었을 무렵, 사건이 터졌다.


나이트(Night)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오후 3시쯤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냄새에 눈이 번쩍 뜨였다.


동기의 방문을 두드려 서로가 안전한지 먼저 살피고, 냄새가 나는 곳으로 급히 향했다. 공용 주방이었다. 누군가 가스 불 위에 냄비만 올려두고 깜빡한 채 외출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우리가 주방 문을 열었을 때, 불길이 막 위로 치솟으려던 찰나였다.


그 순간, 잠기운이 달아나는 걸 넘어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우리가 조금만 더 늦게 깼다면? 이 밀폐된 공간에서 정말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우리는 말할 새도 없이 움직였다. 가스 밸브를 잠그고, 근처에 있던 행주와 수건을 물에 적셔 불길을 덮었다. 정말 일사천리였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 않았고, 초기 진화에 성공했다.


우리는 고시원 총무에게 가서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건 형식적인 사과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돈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목숨을 담보로 더 지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당장 나갈 곳은 없었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도 원룸 하나 얻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나는 고향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오빠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오빠의 도움으로 근처 신축 원룸에 반전세 방을 구했다. 함께 나온 동기 역시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당연한 듯 내 바로 옆방을 계약했다.


그렇게 우리는 '행복한 고시원'을 탈출해 '진짜 우리만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드라마 같은 반전이 일어났다.


우리 층에는 총 4개의 방이 있었는데, 신축 건물이라 아직 입주가 덜 되어 3명만 살고 있었다. 오가며 마주친 나머지 한 명의 입주자, 그녀는 놀랍게도 우리 병원의 또 다른 입사 동기였다.


"어?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그날부터 우리 셋의 생활은 시트콤 그 자체였다. 우리는 층 공동현관문만 잠가두고, 각자의 방문은 활짝 열어둔 채 살았다. 복도는 우리의 거실이자 광장이었다.


"야! 밥 먹자!"

"오늘은 내 방으로 와~~~"

"나 캔맥 사 왔다~!"


방 안에서 소리치면 복도를 타고 옆방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셰어하우스처럼, 아니 한 가족처럼 지냈다. 듀티(근무표)가 맞는 날엔 자연스럽게 한 방에 모여 밥을 먹고, 병원에서 겪은 서러움을 토해내며 울고 웃었다.


첫 사회생활, 낯선 서울, 그리고 감당하기 힘들었던 선배들의 태움. 모든 것이 서툴고 어렵기만 했던 그 시절,

내가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건 대단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왔냐?” 하고 반겨주던 열린 문틈,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 덕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우리는 잘해내고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의 하루를 무사히 넘겨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각자 다른 삶으로 흩어졌다. 나는 여전히 서울에 남아 있고, 그때의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의 하루를 건너고 있다. 가끔 지독하게 고단한 날이면 문득, 그 복도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그리워진다.


창문 없던 고시원과 문을 활짝 열어두었던 그 원룸의 복도. 나의 20대는 그 공간들 속에서,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졌다. 그때의 어린 나를 붙잡아 주었던 내 두 명의 동기들에게 뒤늦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보고 싶다, 친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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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든의 덧붙임

- 고시원:

원래는 고시 공부를 하는 수험생들을 위한 주거 시설이었으나, 지금은 저렴한 주거지를 찾는 사회 초년생이나 1인 가구의 거처로 더 많이 쓰인다. 보증금이 없고 월세가 싼 대신, 화장실과 주방을 공용으로 써야 하고 방음과 화재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 태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의 병원 내 괴롭힘 문화를 일컫는 은어. 생명을 다루는 직업 특성상 엄격한 교육은 필요하지만, 때로는 그 뜨거움이 도를 지나쳐 후배를 벼랑 끝으로 내몰기도 한다. 나는 그때 친구들이 없었다면 아마 그 열기 속에 타버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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