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하회탈 닦기요...?"

알바의 향연

by 온 이든

대학 시절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나는 정말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휴학 1년을 포함해 총 5년 동안의 대학 생활 내내 노동은 나의 일상이었다. 그중 가장 오래 했던 일은 이마트 카트와 주차 요원 일이었고, 그런 몇몇 아르바이트 이야기들은 이미 따로 글을 남겨 두었다.


오늘은 방학이나 주말에 단기로 했던 소소한 아르바이트 이야기들을 꺼내 보려 한다.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보통 눈을 크게 뜨고 이렇게 되묻는다.


“잠깐만요... 하회탈 닦기요...?”


맞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하회탈 닦기: 얼굴을 찾아주는 일

벼룩시장 구인 광고에서 ‘하회탈 닦기 아르바이트’라는 문구를 봤을 때, 나는 정말 그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회탈을 닦는다니? 도대체 어떤 일인지 너무 궁금했다. 게다가 일터가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라는 사실에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그곳은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사장님과 알바생 세 명이 작은 방에 옹기종기 앉아 가내수공업처럼 작업을 했다.


제작된 하회탈은 처음엔 전체가 흙색으로 칠해져 있어 얼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가정용 난로 두 개 아래에 큰 철판을 깔고 그 위에 탈들을 올려놓으면, 철판의 온기로 탈이 살짝 따뜻해진다. 그때 마른 천으로 얼굴 부분을 닦아내는 것이 내 일이었다.


닦아낸 부분은 빛이 돌며 윤곽이 드러나고, 닦지 않은 주변은 흙색으로 남아 명암이 생긴다. 그렇게 비로소 탈의 얼굴이 나타난다.


처음엔 단순해 보였지만 막상 해보니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과하게 닦아도 탈의 인상이 아예 달라졌고, 눈과 코, 입의 균형이 어긋나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함께 일하던 한 분은 탈의 얼굴 모양이 계속 다르게 나오는 바람에 며칠 만에 그만두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은근히 긴장이 되어 꽤나 심혈을 기울여 닦았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의 웃음을 완성하는 일은 생각보다 뜨겁고 정교한 노동이었다.



베개 공장: 블랙이 화이트가 된 웃픈 사연

다음은 작은 베개 공장이었다. 직원은 네댓 명 정도였고 대부분의 공정이 수작업이었다.


나는 하얀 베갯잇 안에 손으로 일일이 솜을 채우는 작업을 맡았다. 어느 한 곳 뭉치거나 꺼지지 않도록 전체를 평평하고 푹신하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처음엔 쉬워 보였지만 몇 시간이 지나자 오른팔이 점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공장 안엔 솜 먼지가 엄청나게 날렸다. 마스크를 써도 잔기침이 계속 나왔다.


문제는 첫 출근 날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올블랙’ 옷을 입고 갔는데, 퇴근 무렵 나의 검은 옷이 온통 하얀 솜가루로 덮여 있었다. 그야말로 ‘흰 곰’이었다.


그 모습을 본 현장 선배님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각자 박스테이프를 하나씩 들고 달려드셨다.


“아이고, 학생! 신고식 한번 제대로 치르네~! 하하하~”


서너 분이 내 몸에 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 하며 솜가루를 일일이 제거해 주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쩍쩍 소리가 날 때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 투박한 손길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날 이후 나는 그 공장에 갈 때 절대 검은 옷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약물 임상시험: 가난했던 우리들의 엠티

이건 시험을 하는 쪽이 아니라, 대상자가 되는 아르바이트였다.


학교 약리학 교실 교수님이 학기에 한 번씩 우리 학번 학생들에게 용돈 벌이 겸 참여해 보라고 권하셨다. 대체로 고지혈증 약이나 당뇨약 시험이었고 누가 대조군인지 시험군인지는 모른 채 똑같은 조건으로 임상 시험에 임했다.


정확한 결과를 위해 음식 제한이 필요했는데, 혈기 왕성한 20대 여대생들이 음식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이 뻔했기에, 우리는 사실상 '강제 용'되듯 합숙을 하게 되었다.


합숙 장소는 병원 캠퍼스 안 게스트하우스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로지 제공되는 급식만을 먹으며 간식은커녕 외부 음식은 일절 금지였다. 과자도, 야식도, 탄산음료도 없는 강제 다이어트 합숙이었던 셈이다.


풍경은 꽤 독특했다. 파자마 차림의 학생들이 팔에 주사 바늘 하나씩을 꽂고 줄줄이 앉아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고 정기적으로 채혈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맥주 한 캔조차 없는 가난한 엠티 같기도 했다. 그런데 장소는 또 '귀빈을 모시는 고급스러운 공간'이었다. 그 묘한 상황 속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시간은 꽤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과외와 학원 강사: 웃음바다였던 날들

가장 ‘대학생다운’ 아르바이트도 있었다. 과외와 학원 강사였다. 수학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고3 입시학원에서 몇 달 동안 대타 수학 강사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했지만, 나는 그보다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다.


지금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학교 생활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은 없는지 등 아이들의 고민에 귀를 기울였다. 나 또한 아직은 서툰 어른이라,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과 정서적 교감을 쌓아갔다.


영어 수업을 할 때는 종종 팝송을 함께 들으며 가사를 해석했다.


가장 자주 들었던 노래는

“I believe I can fly~

I believe I can touch the sky~~~"


물론 아이들과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다. 가끔은 흥이 올라 내가 더 신나게 부르다가 음이탈이 나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아이들은 정말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갑자기 야심 차게 1년 치 공부 계획표를 짜기도 하고 말이다!



4학년, 도서관 근로 장학생

대학 4학년이 되자 졸업시험과 국가고시 준비로 외부 아르바이트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방학도 휴일도 없이 매일 도서관에 출석해 조교 선생님의 출석 체크를 받으며 열람실 지정석을 지켜야 했다. 마치 고3 독서실 같은 공기였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고4'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에는 왜 이렇게까지 통제를 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공부할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준 학교에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아침에 출석 체크만 하고 가방을 던져 놓은 채 바람을 쐬러 나가는 친구들도 있기는 했다.


나는 고민 끝에 간호대 도서관 근로 장학생에 지원했다. 다행히 합격했고, 중앙도서관에 비해 대출 건수가 적은 단대 도서관에서 자리를 지키며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할 수 있었다. 일한 것에 비해 소득도 꽤 높았으니, 당시 나에게는 최고의 일자리였다.




돌이켜보면 항상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최저 시급에 가까운 보수를 받으며 힘들고 서러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어 감사했고, 내 손으로 학비와 용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대견했다.


지금 병원 현장에서 일을 하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치는 순간이 오면, 나는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러면 피식 웃음이 먼저 나온다. 그때에 비하면 훨씬 좋은 환경에서, 훨씬 높은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다. 하회탈의 명암을 닦고, 베개 솜을 채우고, 임상시험 대상자가 되어보았던 이런 다채로운 경험을 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배움과 재미와 웃음이 있었던 시간.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젊은 날, 알바의 향연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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