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는 못 했지만 인생은 포기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나의 성적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고2 마지막 모의고사 성적표는 202점, 400점 만점에 절반을 겨우 넘긴 점수였다. 사실 변명할 여지는 없었다. 그동안 내가 방송반 활동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탓이었으니까.
그런데 성적표보다 더 슬펐던 건 부모님의 체념 섞인 한마디였다.
“니는 그냥 고등학교 졸업하면 공장에나 가라. 공장에서 돈 쫌 벌다가 선 봐서 시집가면 된다.”
사실 그때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던 시절이라, 웬만한 집들은 차별 없이 대학 공부를 시키곤 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달랐다. 이유는 명확했다. 지독한 가난.
아들 하나 공부시키기도 빠듯한 살림에, 두 아이 모두를 대학에 보낼 여력은 없었다. 그러니 부모님의 결정은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아들이라는 기둥을 세우기 위해, 딸인 나를 ‘눈물 머금고 포기’하는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가슴이 안 아픈 건 아니었다.
부모님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겠구나. 그게 싫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스스로 헤쳐나가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한 현실을 바꾸는 것.
목표는 딱 1년. 고3 수험 기간 동안 나는 그냥 공부하는 기계가 되기로 했다.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외에는 펜을 놓지 않았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에도 책을 덮지 않았고, 화장실을 갈 때조차 요점 정리 노트를 보며 걸었다. 친구들과의 수다도, 좋아하던 야구도 끊었다.
얼마나 독하게 매달렸는지, 선생님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너거, 공부는 이든이처럼 해야 된다. 저래 미쳐가 해야 뭐가 돼도 되는기라.”
그리고 1년 뒤 수능 시험장. 마지막 답안지를 작성하고 나오는데, 1년 전과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망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성적표에 찍힌 점수는 343점. 딱 1년 만에 141점이 올랐다. 아주 높은 점수는 아니었지만, 대구 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4년제 간호대학에는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점수였다.
하지만 점수를 확인하자마자 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1년만 더 하면... 나도 훨훨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성적이 오르는 걸 확인하니 더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헛된 꿈을 꾸지는 않았다. 우리 집 형편에 재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장 대학 가는 것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친구에게 원서비를 빌려 부모님 몰래 간호대학에 지원했다. 안전하게 합격하기 위해 내 점수보다 몇 점 낮춰서 썼다. 모험보다는 ‘합격’이라는 결과값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합격자 발표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결과는 합격. 나는 그날 저녁,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합격 소식을 알렸다. 축하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내 노력을 인정해 주길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돌아온 건 내 생각 이상으로 가혹했다. 엄마는 방구석에 있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집어 들고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미쳤나! 니가 거길 우예 가는데! 등록금은! 등록금은 니가 낼 끼가!!!”
그날 나는 닥치는 대로 맞았다. 아팠지만, 울지는 않았다. 엄마의 매질이 미움 때문이 아니라, 합격 소식을 듣고도 돈 걱정부터 해야 하는 가난한 부모의 비명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나는 맞으며 소리쳤다.
“등록금은 내가 알아서 하께! 보내만 도.”
결국 나는 입학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대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소정의 장학금을 받기도 했고 학비가 모자랄 때는 잠시 휴학도 하고, 어쨌든 어렵사리 졸업했다. 물론 부모님이 아무것도 안 해주신 건 아니었다. 팍팍한 살림에도 가끔 쥐어주시던 용돈과 학비 보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재수를 포기하고 현실에 순응해 선택한 간호사라는 직업. 막상 해보니 나의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분들을 보는 것도, 3교대를 버티는 체력도, 응급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도 꽤 잘 맞았다.
돌이켜보면 대단한 인생 역전 드라마는 아니다. 내가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느라 공부를 안 한 탓이었고, 정신이 번쩍 든 순간 다시 열심히 해서 성적이 올랐지만 그렇다고 최상위권으로 진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주어진 현실 안에서 도망가지 않고, 내 몫을 해내며 묵묵히 버텨낸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지난날의 내가 부끄럽지 않다.
다만, 나의 자녀들에게는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중요한 시기에 엄마처럼 너무 한눈팔지 말라고. 좋아하는 일은 즐겁게 하되, 학생으로서의 본분과 성실함은 늘 중심에 두고 살아가라고 말이다.
물론 안다. 내 욕심으로 아이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그저 곁에서 묵묵히 돕고 가끔 조언을 건네는 조력자일 뿐이니까.
엄마의 욕심과 아이의 자율성 사이 ‘중도’를 지키는 것이 여전히 가장 어려운 숙제지만, 나는 오늘도 지난날의 나를 거울삼아 그 균형을 잡으려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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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대학:
당시 교수님들은 “돈 벌어야 하는 집안의 공부 좀 하는 딸들이 간호대에 많이 온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취업이 보장되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였지만, 사실 웬만한 마음가짐 없이는 버티기 힘든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