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위험을 몰랐던 아르바이트

그때는 몰랐던 일의 무게

by 온 이든

간호대 1학년 시절. 선배들은 "1학년 때가 아니면 놀 시간이 없다"라며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라 했지만, 나의 1학년은 치열한 ‘생존’의 시간이었다.


1학년 때는 대부분이 교양 수업이었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일주일의 모든 수업을 오전 11시 이후로 몰아넣었다. 늦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등교 전 오전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 대학생 아르바이트의 보편적인 시급은 2,000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눈에 ‘시급 4,000원’이라는 파격적인 문구가 들어왔다. 무려 두 배 이상이었다.


그건 바로 ‘일수 명함 뿌리기’. "차를 이용한 대출"이라 적힌 명함을 길가에 주차된 차 앞 유리에 놓아두는 일이었다.


내 하루는 이른 아침 6시에 시작되었다. 약속된 장소에 승합차가 도착하면, 나와 다른 알바생들이 차에 몸을 실었다. 차는 동네마다 한 명씩 우리를 내려주었고, 우리는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기계적으로 차 앞 유리에 명함을 올려놓았다. 하루 4시간, 쉴 새 없이 걷고 또 걷는 단순 노동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기묘한 풍경이었다.


나와 함께 일하는 분들은 대부분 50~60대 아주머니들이셨고 다들 걷기 편한 펑퍼짐한 옷에 등산화를 신고 나오셨다. 누가 봐도 ‘일하러 나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새벽 골목길을 누비는 내 복장은 늘 ‘대학생 풀세팅’ 상태였다. 하늘하늘한 시폰 원피스에 곱게 화장을 한 여대생. 단, 신발만은 예외였다.


원피스 아래 발은 늘 하얀색 스니커즈가 신겨져 있었다. 하루 4시간을 꼬박 걸어야 했기에 구두는 언감생심이었다. 원피스에 운동화라니, 어울릴 듯 말 듯 한 그 묘한 차림새.


이유는 단순했다. 일이 끝나면 곧장 학교로 달려가 수업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집에 들러 옷 갈아입을 시간을 아껴야 했기에, 나는 그 이질적인 차림으로 새벽 골목을 누비며 명함을 뿌렸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명함 꾸러미를 받고, 묵묵히 뿌리고, 다시 차에 타서 흩어지는 건조한 관계. 하지만 그중 유일하게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를 관리하던, 이른바 ‘중간 보스’.


말투는 좀 무서웠지만 그는 나에게 꽤 호의적이었다. 내가 대학생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어린 학생이 애쓴다"며 음료수를 건네기도 했고, 긴장을 풀어주려 농담도 던졌다. 나는 그저 그가 '생각과는 다르게 친절한 어른'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달쯤 지났을 때였다. 그가 "고생하는데 밥 한번 사주겠다"라고 했다. 그때 나는 정말 세상 물정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범죄의 표적이 되기 딱 좋은, 너무나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세상의 무서움을 잘 몰랐고, 그의 호의를 100% 순수한 격려로 받아들이고 덜컥 그의 차에 올랐다.


그런데 차가 향하는 곳이 이상했다. 시내 식당이 아니라, 점점 어두운 산 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 어느덧 한적한 곳에 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뒤에 보이나? 내 똘마니들 대기하고 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감히 뒤를 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내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좁은 차 안에 갇혔다. 도망칠 곳은 없다. 뒤에는 그의 부하들이 지키고 있다.


그제야 나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공포가 몰려오고, 숨이 턱 막히는 적막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이든아. 니 내랑 사귀자."


"... 네?"


"내가 니 학비도 대주고, 책값도 주고, 용돈도 주께. 니 맨날 그래 고생하는 거 보니까 안쓰러워가 안 되겠다. 내 그래 나쁜 사람 아이다. 한번 생각해 봐라."


"........."


"그리고, 내 아저씨 아이다~ 내 니보다 다섯 살 밖에 안 많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지? 뒤차에 있는 아저씨들이 내리는 건가? 여기서 소리쳐도 아무도 못 들을 텐데. 차 안은 너무 좁았고, 스무 살의 나는 너무 어렸다. 세상은 그날 처음으로 내게 위협적인 얼굴을 드러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내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나중에는 공포와 서러움이 뒤섞여 엉엉,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었다.


"엉... 엉....!!! 흐어엉... 흑흑흑... 엉엉.."


"저... 학교 가야 돼요... 흑.. 엉엉.. 대학.. (꺼이꺼이) 졸업도.. (흑흑) 해야 하고.. 엉엉.. 저는 지금 연애할 생각 없어요... 제발 (꺼이꺼이).. 저 좀 보내주세요... 제발요... 엉엉 흑.. 으아앙..!!!"


그건 거절의 말이 아니라, 살려달라는 절규에 가까웠다.


내 반응이 예상 밖이었던 걸까.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 동안 우는 나를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울지 마라. 내 니한테 나쁜 짓 안 한다. 그만 울고 집에 가자."


그는 차를 돌려 나를 일하던 동네 근처에 데려다주었고, 나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차에서 내린 나는 엉엉 울면서도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살려줘서 고맙다는 뜻이었을까, 그저 몸에 밴 습관이었을까.)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사무실에 전화해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는 나름대로 ‘신사적’이었던 것 같다. 거칠게 살아온 그에게, 새벽마다 원피스를 입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 여대생의 모습은 묘한 연민과 보호 본능을 자극했으리라. 비록 그의 방식은 투박하고 공포스러웠지만, 내 생각이 자신과 다르다는 걸 알고는 깔끔하게 물러나 주었으니까.


참으로 아찔한 시간이었다. 그가 (최소한 나에게는) 진짜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위험천만했던 그 세계를 큰 탈 없이 건너온 것 또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순진함은 미덕이 아니라는 것. 생존을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믿음보다 냉정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내가 새벽마다 뿌린 그 명함들이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덫’이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당장의 시급 4천 원이 급해, 그 명함 뒤에 숨겨진 무게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몰라서 한 일이라 해도, 그 무지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봐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그때를 거울삼아, 매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오늘도 감사하며 살아간다. 내 인생에 로또 같은 거창한 대박은 없었을지 몰라도, 삶의 결정적인 위기마다 최악을 비켜가게 해 준 그 모든 순간들에 깊이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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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든의 덧붙임

- 일수 (日收):

매일 도장을 찍듯 원금과 이자를 나누어 갚는 사금융의 일종. 내가 뿌린 명함들이 누군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빚의 시작이었음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ㅠㅠ


- 그 시절 최저시급:

2000년 당시 법정 최저시급은 1,600원이었다. 즉, 시급 4,000원은 최저임금의 2.5배에 달하는 엄청난 '고수익 알바'였다. 가난한 간호대생이 위험을 무릅쓰고 새벽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던, 거부할 수 없는 이유였다.


- TMI:

당시엔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는 게 참 이상해 보였는데, 요즘은 그게 유행이라더라.(믹스매치 !!) 먹고살기 위해 했던 생계형 코디가 20년 뒤의 패션 트렌드가 될 줄이야. 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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