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편 헤르만 헤세
최 사원은 커터 칼을 쥔다.
오후 2시. 창고에는 수백 개의 상자가 쌓여 있다. 갈색 골판지로 밀봉된 것들. 침묵하는 것들. 아직 열리지 않은 것들.
그는 칼날을 상자 위에 댄다.
'드르륵'
테이프가 갈라진다. 그 소리가 좋다. 무언가 닫혀 있던 것이 열리는 소리. 껍질이 깨지는 소리.
"자, 나와."
그는 박스를 연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것들이 빛을 만난다. 햇반. 통조림. 샴푸.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아직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것들. 최 사원은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 카트에 싣는다.
창고에서 매장까지, 열 걸음.
그에게 이 열 걸음은 단순한 거리가 아니다. 안에서 밖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기다림에서 만남으로. 그는 이 길을 수십 번, 수백 번 걷는다. 매번 같은 길이지만, 매번 무언가를 건너편으로 데려다주는 길이다.
점장이 옆을 지나며 묻는다.
"최 사원, 힘들지 않아? 박스만 뜯고 있으면 지겹잖아."
"아닙니다."
최 사원은 손을 멈추지 않고 답한다.
"저는 연결하고 있거든요."
"뭘?"
"여기와 저기를요."
점장은 잘 모르겠다는 듯 웃으며 지나간다. 최 사원은 개의치 않는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느끼는 것이다.
그는 안다.
자신이 이 상자를 열지 않으면, 안에 있는 것들은 영원히 어둠 속에 남는다. 이름은 있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 가치는 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가치. 그것들이 빛을 보려면 누군가 껍질을 깨야 한다.
오늘은 그가 깬다.
오후 6시. 마지막 상자.
최 사원은 칼날을 댄다. '드르륵' 테이프가 갈라진다. 그는 박스를 열고, 안에 든 것들을 꺼낸다. 카트에 싣는다. 매장으로 걸어간다. 선반에 올린다.
끝이다.
아니, 끝이 아니다. 내일이면 새로운 상자들이 도착한다. 또 다른 껍질들. 또 다른 어둠들. 그리고 최 사원은 다시 칼을 들 것이다.
그는 땀을 닦으며 창고를 돌아본다.
텅 빈 팔레트들. 접힌 골판지들. 오늘 그가 깬 껍질들의 흔적.
최 사원은 조용히 생각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는 오늘도 세계를 깼다.
작은 세계들을. 수백 개의 알들을.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것들은 이제 누군가의 장바구니에 담길 것이다. 누군가의 식탁에 오를 것이다. 누군가의 하루가 될 것이다.
최 사원은 퇴근 준비를 한다.
그의 손에는 커터 칼자국이 남아 있다. 작은 흔적. 하지만 그는 안다. 오늘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는 연결하는 사람이다. 안과 밖을. 어둠과 빛을. 기다림과 만남을.
내일도 그는 알을 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