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플라톤
새벽 5시. 창고는 컴컴하다.
김 반장은 손전등을 켠다. 불빛이 선반 사이를 비춘다. 찌그러진 라면 박스. 먼지 쌓인 팔레트. 구석에 밀려난 반품들.
그는 장갑을 끼고 일을 시작한다.
박스를 정리한다.
찌그러진 것은 뒤로 뺀다. 깨끗한 것을 앞으로 놓는다. 유통기한을 확인한다. 오래된 것은 위로. 새것은 아래로.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 오래 하다 보니 몸에 밴 것이다.
손전등 불빛 아래서 그의 손이 움직인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
아침 9시.
매장이 열린다. 김 반장이 정리한 라면이 진열대에 올라간다. 조명이 비춘다. 상품이 반짝인다.
고객이 지나가며 말한다.
"와, 깔끔하네. 물건이 새것 같아."
김 반장은 매장 통로에 서 있다.
그는 진열대를 본다. 완벽하게 정렬된 상품들. 먼지 하나 없는 표면. 찌그러진 흔적 없는 박스들.
그가 새벽에 본 것과는 다르다.
새벽에 그가 본 것은 찌그러진 것들이었다. 먼지 묻은 것들이었다. 땀으로 옮겨야 했던 것들이었다.
지금 고객이 보는 것은 그것의 그림자다.
김 반장은 쓴웃음을 짓는다.
고객들은 모른다. 이 반짝이는 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어둠 속에서 정리했는지. 새벽 5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그림자만 본다. 그림자로 충분하다.
하지만 괜찮다.
김 반장은 안다. 이 완벽한 그림자가 어디서 왔는지. 창고의 먼지와 땀과 찌그러진 박스들. 그것이 진짜다.
고객이 보는 것은 결과다. 그가 만지는 것은 원인이다.
그는 창고로 돌아간다.
밝은 매장을 지나 어두운 통로로 들어선다. 형광등이 깜빡인다. 다시 컴컴해진다.
김 반장은 손전등을 켠다.
새로운 박스가 도착해 있다.
찌그러진 것. 먼지 묻은 것.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 그림자가 되기 전의 것들.
김 반장은 장갑을 다시 낀다.
"자, 다시 시작하자."
그의 손이 박스에 닿는다.
진짜를 만지는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