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아리스토텔레스
이 과장은 PDA를 든다.
화면에 '사과(부사) 100박스'가 뜬다. 입고일은 3일 전. 유통기한까지 5일 남았다.
그는 사과 팔레트 앞에 선다.
박스 하나가 찌그러져 있다.
이 과장은 그것을 연다. 안을 확인한다. 사과 두 개에 멍이 들었다. 나머지는 괜찮다. 그는 멍든 사과를 따로 빼고 박스를 다시 닫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사과들은 지금 여기 있다. 하지만 여기 있으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과는 먹히려고 존재한다.
누군가의 장바구니에 담기고, 집으로 가고, 씻기고, 깎이고, 입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사과의 목적이다.
창고에 있는 사과는 아직 사과가 아니다. 될 수 있는 사과다.
이 과장은 팔레트를 옮긴다.
구석에서 통로 쪽으로. 눈에 잘 띄는 곳으로. 진열 담당이 먼저 가져갈 수 있게.
직원 김 씨가 지나간다.
"과장님, 냉동식품 먼저 안 해요?"
"사과 먼저."
"왜요? 냉동은 안 녹아요?"
"사과는 기다리면 썩어."
김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간다. 이 과장은 다시 팔레트를 민다.
오후가 된다.
사과 박스가 하나씩 빠져나간다. 진열 담당이 가져간다. 매대에 올린다. 고객이 집어 든다. 계산대를 지난다.
이 과장의 PDA에 숫자가 줄어든다. 100, 85, 60, 30.
저녁 6시.
'사과(부사) 0박스.' 출고 완료.
이 과장은 화면을 본다. 잠시 멈춘다.
그는 생각한다.
오늘 나간 사과들. 지금쯤 누군가의 집에 있다. 냉장고에 들어갔거나, 이미 씻기고 있거나, 아이 손에 들려 있거나.
그것이 사과가 사과인 이유다.
창고에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나가서 먹혀야 사과가 된다.
이 과장은 PDA를 주머니에 넣는다.
그는 다음 팔레트로 간다. 배 박스. 입고일 어제. 유통기한 7일.
"너희 차례는 내일이야."
그는 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박스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걸. 물건이 물건답게 되도록 돕는 것이라는 걸.
사과가 사과가 되게. 배가 배가 되게. 라면이 누군가의 밤참이 되게.
그것이 그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