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는데, 몰랐다

by 연우

친한 친구가 청혼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다 ‘나는 청혼을 어떻게 받았지?‘ 하고 좀 지난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2023년 3월 18일 토요일, 성수에서>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데이트 중이었다. 매주 만나긴 했지만 늘 결혼 준비를 위한 일정이었기에, 둘이서 편안히 보내는 시간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실 그날 나는 내가 왠지 청혼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의심(?)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 정황 및 증거가 있다.


우선, 첫 번째.

그날 데이트 장소가 성수였던 점.


그전까지 남편과 나는 성수에서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고 해야 맞을까. 거기에는 속 쓰린 사정이 있다.


젊은이라면 응당 성수에 가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도 말이 들었던 터라, 남편에게 성수에 좀 가보자고 했었다. 당시 회사 동료에게 성수의 맛집과 분위기 좋은 카페를 왕창 들어놓기도 해서 더욱 가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남편이 내 가슴팍에 작은 공을 퓩, 쏴 올렸다.


나: 성수가 그렇게 좋대. 가보자, 가보자!

남편: 우리 그때 갔었잖아. 가서 파스타 먹고 그랬잖아.

나: ...그래 ? (이때만 해도 그에게는 만회의 기회가 있었다.)

남편: 아~ 우리 갔잖아~ 기억 안나?

나: 나 집에 갈래.

남편: 미안해.


그래서 남편과 나는 성수에 그동안 가본 일이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수엘 가자니. 그렇다면 특별한 뭔가가 있는 거다.


두 번째.

느닷없는 남동생의 말.


문제의 토요일이 되기 하루 전,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에도 통화를 자주 하기 때문에 이상할 게 없었는데, 이어지는 말이 이상했다.


내가 전화를 받자, 동생은 세상 뜬금없이 말했다.


“야, 형한테 잘해라. 진짜. 너는 잘해야 돼. 잘해.”


이 놈이. 무척이나 뜬금없다. 이것은 필시, 당시 남자친구였고, 내 동생의 절친한 형이었던 남편이 나를 위해, 내 동생과, 무언가를 한 것이 틀림없는 거다.


세 번째.

갑작스레 등장한 필름 카메라.


남편은 성수에 도착하자마자 갈 곳이 있다고 했다. 필름 카메라를 하나 사야 한다고, 가게를 알아두었단다. 원래 데이트할 때 딱히 계획을 세우지 않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평소와 확실히 다르구나, 생각했다.


“아, 오늘이로구나.”


다행히, 오랜만에 데이트를 한다고 나름 꾸며 입고 나왔다. 청혼을 받게 된다면 사진을 한 천만 장을 찍어야 하는데, 이 정도의 상태라면 마음에 드는 사진 한, 두장은 건질 수 있겠다 생각했다.


필름 카메라를 사서 나오는 남편을 혼자서 의뭉스럽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필름 카메라가 일반 필름 카메라가 아닌가?

저 안에 혹시 뭐가 들어있나?

청혼할 때의 우리 모습을 남기기 위한 건가?


찰칵.


남편: 오, 신기하다. 이렇게 찍는 거구나. 이거 누르면 찍히네.


남편은 아무런 기색도 없이, 카메라를 들고는 나를 찍고, 길바닥을 찍고, 하늘도 찍고 했다. 어린애가 장난감을 갖고 놀듯이, 진짜로 필름 카메라만 신기해하고 있었다.


연막 작전인가?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성수의 골목골목을 걸어 다녔다. 이곳저곳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 남자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청혼을 할 것인가’하는 생각뿐이었다.


남편: 전시장 같은 게 있네. 가볼래?


옳다구나. 여기구나.

평소 전시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없는 흥미를 만들어 맞춰주던 남편이었다. 그런 그가 먼저 나에게 전시를 권하다니. 저곳에서 청혼하려는구나, 하며 긴장되는 마음을 품고 따라 들어갔다.


건물 1층에는 직원 두 분이 앉아있었다.


또다시 의뭉스럽게 그들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제가 오늘 여기서 청혼받게 되는 거죠?‘


한 직원 분이 물었다.

“사전 예약 하셨어요?”

남편이 대답했다.

“아뇨, 여기 뭐 하는 곳이에요?”


아.

여기도 아닌가?


남편과 나는 건물 층층을 지나며 전시를 구경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곧 개봉 예정인 한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특별 전시장이었다. 청혼의 ㅊ도 관련이 없었다.


순간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뻔뻔히 전시에 집중했다.


엽서 같은 소품도 둘러보고, 영화 한 장면을 구경하기도 했다. 전시 마지막에는 커다란 캔버스에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애칭을 나타내는 글자와 ‘사랑’이라는 글자를 각각 적어놓고 전시장을 나왔다.


그밖에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한참 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는 어느 식당에 들어섰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또다시, 나의 주책 버튼이 눌리고 말았다.

설마 여기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메뉴를 주문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남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오호라. 화장실을 간다고라.


남편이 화장실을 나가고 몇 분 후, 내 빈 접시 위에 갑자기 꽃 한 송이가 놓였다. 화들짝 놀라 위를 보니, 식당 직원 분이 웃으며 꽃을 들고 계셨다.


어머나. 청혼의 시작인가.

나: (부끄럽지만 기분은 좋은) 왜..주세요?

직원: 저희 식당 신메뉴가 오픈 돼서요. 이벤트로 테이블마다 꽃을 세팅해드리고 있어요.

나: (애써 모르는 척 하며) 아... 감사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게 다 남편의 귀여운 계획인 줄로만 알았다. 남편이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남편: 꽃 뭐야?

나: (오빠 정말) 몰라?

남편: (정말 몰라) 누가 줬는데?


남편은 그 꽃의 정체를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또 한 번 이게 아닌가, 생각하다가

오늘은 아니구나. 단념했다.


그냥 오늘은 오랜만에 데이트 나온 날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맘이 편해졌다.

음식을 맛있게 먹고, 얘기를 재밌게 나누고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계속 속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오늘 왜 이러냐.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미안.“


청혼은 언제 하려나, 혼자 상상의 날개를 펴고 나풀대는 동안 남편은 줄곧 속이 안 좋았나보다.


그제야 남편이 걱정되었다.


남편이 또 한 번 화장실로 가고, 나는 근처 약국을 검색했다. 다행히 식당 근처에 주말 저녁에도 영업을 하는 약국이 있었다.


남편이 다시 돌아오고, 우리는 계산을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얼른 약국을 가서 약을 좀 사야겠다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가려는데 남편이 계속 주춤주춤거렸다.


“빨리 와. 약국 문 닫는다니까. 많이 안 좋아? 어떡해.“


남편이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속이 안 좋았구나. 너무나 미안했다. 청혼이 뭐라고, 그거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루 종일 신경 써 주지 못한 거 같아 내 속도 너무 상했다.


남편: 어, 저게 뭐야?


남편이 놀라며 내게 물었다. 이 와중에 차에도 문제가 생긴 걸까. 오늘 좋은 날인데, 갑자기 마무리가 왜 이러나 싶었다. 차 앞으로 달려가서 앞 범퍼도 확인하고, 앞판 유리도 보고, 백미러도 보는데 남편이 내 어깨를 잡았다.


남편: 이게 뭐야. 거기 말고, 여기 좀 보라고.


다시 보니 창문 안으로 뭔가가 보였다.


조수석에 꽃다발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선물이 있었고, 그 위에는 아까 전시장에서 본 엽서가 있었다. 그리고 엽서 위에는


“나와 결혼해 줄래?”


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아. 이건 반칙이다.

분명 오늘인 걸 내가 분명 알았는데, 이건 몰랐다.

방심한 순간에, 주차장에서, 이런 모습으로 청혼을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예상과는 너무 다른 상황이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고, 계속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배 괜찮아? 약국 안 가도 돼?”

“...”

“배 괜찮냐고. 약국 안 가도 되냐고.”

“대답이나 좀 해줄래?”


“아. 당연하지!!!!! 결혼해야지!!!! 그럼 안하냐!!!!배 안아픈거지 그럼!!“


고마운 나의 연인은 그렇게 그답게 나에게 청혼했고, 나는 나답게 승낙했다.


2023년 3월 18일 토요일 저녁 성수동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우리는 기꺼이, 기쁘게 결혼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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