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찰 게워내기
"Game Over, Insert Coins To Continue."
태어나서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크게 부조리를 느꼈던 순간은 아마 문구점 오락기 앞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가 자본주의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 또한 그때 깨달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주신 백 원짜리 동전을 행여나 떨어뜨릴까 싶어 꼭 쥐고는 집 근처 문구점으로 뛰어가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백 원짜리 목숨이 끝나고 "더 하고 싶으면 동전 더 넣어라."라는, 영어로 쓰여 있어 읽을 줄은 모르지만 그 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던 그 화면 앞에서 항상 절망했었다. 옆에 있던, 우리 집과 형편은 비슷하지만 독자이기에 부모님이 쥐여준 용돈이 많은 친구는 오락기 위에 백 원짜리 동전으로 탑을 세워놓고는 캐릭터가 신음하며 죽을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탑을 깎아 캐릭터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에 반해 서서히 카운트를 세는 나의 오락기 위는 아무것도 없이 반질거릴 뿐이었고, 나는 그게 괜스레 부끄럽고 서운하여 "재밌었다."라며 애써 괜찮은 척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기에 그 동네에 사는 동안의 어릴 적 나는, 단 한 번도 그 게임의 끝을 본 적이 없었다.
군대를 전역한 뒤의 어느 날, 나는 영화를 기다리는 김에 상영관 내에 있는 오락실에 들어갔다. 그곳엔 내가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끝을 보지 못했던 그 게임이 홀로 번쩍이고 있었다. 너무 오래전의 게임이어서인지 다른 오락기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게임만이 예고편과도 같은 플레이 화면을 조용히 내보내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나는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 오락기 앞에 앉았다. 마치 그 동네 친구처럼 나도 동전으로 탑을 세워놓고는 게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 나는 "자본주의의 힘을 보여주마."라며 동전을 집어넣어 게임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날도 게임의 끝을 볼 수는 없었다. 영화 상영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멀뚱히 서 있는 나의 캐릭터를 뒤로하고 오락실을 나왔지만 끝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쉽진 않았다. 되려 게임이 썩 재밌게 느껴지질 않아 괜히 돈을 버린 듯한 찝찝함만이 끈적하게 남아있었다.
어쩌면 나는 위의 두 일을 겪고 행복에 대해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의 내게 만약 옆에 있던 친구가 백 원을 베풀었다면 그때의 나는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성인이 된 내가 상영시간에 구애받질 않고 게임의 끝을 봤다고 해도 딱히 기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 찐득한 찝찝함만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것은 기대와 욕구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다. 넘치는 것을 더한다고 해서 더 큰 행복이 찾아오진 않는다. 사람은 항상 부족한 것을 갈구하고 소망한다. 그리고 그것이 해소되었을 때에 행복을 느낀다. 그렇기에 우리는 굶주려야 한다. 부족함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인지하고 그것을 채워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또 항상 굶주려야 하고 부족해야 하는, 에피쿠로스적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생각하지만, "굶주림은 처절한 고달픔이고, 배부름은 불쾌한 더부룩"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사이의 중용을 찾아야 한다.
과도하고 반영구적인 굶주림은 행복을 느낄 새가 없다. 그러니 스스로를 너무 옭아매고, 옥죄여 살아갈 필요는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삶의 행복을 느끼려 하는 일들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굶주림은 욕망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항상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굳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까지 저버리며 자신을 극한에 가까운 상태로 몰아갈 필요는 없다. 이미 성인이 된 지금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겠다며 통장 잔고를 몇 천 원으로 유지하고 초콜릿 하나를 사 먹으며 행복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에피쿠로스의 뜻을 받들겠다며 구태여 빵 한 조각과 물로 삶을 연명하며 행복을 찾는 것은 멀쩡한 사과를 두고 굳이 썩은 사과를 베어 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너무 배불러서도 안 된다. 배부름은 우리를 무뎌지게 만들어 행복의 역치를 높일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는, "불쾌한 더부룩"의 상태가 될 것이고 그것 또한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배부름은 더욱이 굶주림보다도 조심해야 한다. 행복의 역치가 높아지는 것만큼 불행한 것이 없다. 그것은 역으로 우리에게 해소되지 않는 굶주림을 안겨준다. 과잉된 배부름이 불러올 해소되지 않는 굶주림의 상태는 우리를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에뤼시크톤처럼 자신의 몸까지 먹어치우는 파멸에 이르도록 만들 것이다. 배부른 것은 공허한 것이다. 공허한 쾌락은 더욱이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그것들은 얻을수록 더욱 공허해질 뿐이다. 우리는 항상 배부름을 경계하고, 지양해야 한다.
'그럼 대체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드는 이가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중용을 찾아야 한다. 굶주림과 배부름 사이의 중용. 그것은 섬닷함이다. ㅡ '조금 부족하게 배가 차는 것'이라는 말을 마땅히 치환할 만한 단어가 없어 "섬닷하다."라는 방언에서 차용해 왔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욕구를 지긋이 바라봐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지금 무엇이 하고 싶은가. 그 물음에 답이 되는 것을 깨우치고 그것을 채우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충족되는 순간은 아주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욕구가 충족되는 그 순간의 감사함과 행복함을 만끽해야 한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의 역치를 서서히 낮추어 차후엔 아주 소소한 것들에도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섬닷한 정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쉬이 부족해지고, 쉬이 채워지는 그 중용을 유지한다면 행복은 아주 잦은 박자로 우리의 삶을 채워줄 것이다.
고전 동화인 <파랑새>는 이미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행복은 거창한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우리의 가까운 곳에 소소하고 작은 형태로 아주 가득히 퍼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 채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이란 어쩌면 참으로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윤활유가 되어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은 우리에게 유의미하다. 그러니 가까운 주변을 둘러보자. 당신의 주변에 머무는 모든 존재가 당신의 행복일 것이다. 당신이 닿는 발걸음과 모든 손끝 또한 모두 당신의 행복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에 겨운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