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것'
결핍을 가진 인간이 신이 되고자 괴물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 괴물은 인간이 되고자 합니다.
그 둘은 당연하게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인간인 ‘빅터’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빅터의 창조물인 ‘크리처’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죠.
결코 닿은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두 주인공은 신이 될 수 있다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완성되지 못할 자화상을 갈가리 찢고 나서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선 존재의 이유를 가느다랗게 유지해 주던 주변까지 완전히 파멸시키고 나서야 서로를 쫓고 쫓기는 전면전에 나섭니다.
그러나 그 전면전 역시 죽일 수 없는 존재를 죽여야 하는, 죽을 수 없지만 죽어야 하는 또다시 닿은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한 것이었지요. 그렇게 서로 모든 것을 쏟아붓고서야 증오의 응어리는 녹아내리고 이해와 용서가 남아 상대를 인정하게 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오만함과 그릇된 욕망, 그리고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이해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다운 것에 대해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경쟁하고 미워하고 때로는 거짓으로 회피하는 것 역시 분명 인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친구와 가족을 원했던, 인간처럼 살고 싶었던 크리처와 신의 이름에 도전했지만 결국 공허함과 자기 파멸만 남은 빅터를 통해 잘 보여줍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빅터가 그가 이야기하는 신이란 이름에 꽤 가까이 갔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탄생시키고 죽음을 정복했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극 중 다수의 등장인물이 빅터에게 본인의 바람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가 신에게 기도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빅터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바람에 신은 침묵으로 우리를 위로하는 반면, 빅터는 억지를 부리거나 도망치기에 급급했죠. 우리는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 때 종교를 찾습니다.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닌 그저 들어줄 누군가가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누군가가 필요하기에 그렇습니다. 빅터는 생명체를 만들고 뛰어난 과학적 성취를 이뤘을지언정 결코 신에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이런 역설로 점철된 주제를 그로테스크한 영상미와 상반되는 동화적인 음악과 분위기로 잘 살렸습니다. 또 잔혹동화 특유의 칙칙한 색감에 포인트가 되는 붉은색 터치로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1800년대 유럽의 분위기를 현실적이지만 또 동화적으로 표현해 굉장한 몰입도를 보였습니다.
특히 이야기를 전해 듣는 선장을 등장시켜 독자를 대신하게 함으로써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고 여정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목격하고는 뱃머리를 돌리게 하는 식의 전달을 통해 몰입도를 높였습니다.
인간다운 것의 끝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인정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는 저마다 괴물일지 모릅니다. 서로 다른 자유로운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것을 좋아하며 완전히 같은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프랑켄슈타인은 빅터가 되라고 혹은 크리처가 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남들과 다른 나 자신을 백 퍼센트 인정하고 사랑해 주자, 가 주제가 되지 않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