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중간 세계다. 이것을 어떻게 만들까?
언어는 중간 세계다
언어라는 기호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현실, 실재’가 아니다. 언어라는 기호로 만들어내는 중간세계다.
꼭 허구적인 소설만 그런 게 아니라 글로 표현되는 모든 것이 그렇다. 언어철학자 바이스게르버에 의하면 인식의 대상인 객관세계와 인식의 주체인 ‘나’ 사이에는 언어의 장막이 있고, 그것이 나의 인식의 방식을 좌우한다고 한다. 즉 우리가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세계는 나와 현실 사이에서 만들어진 중간세계인 것이다.
이런 얘기의 근원을 파고들면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나온다. 그에 의하면 음성기호(말)든, 문자 기호(글)든 모두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든 것이지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말이나 글자로 표현되어진 것을 시니피앙(기표, 記票)이라 부르고, 그것의 뒤에 숨어 있는 개념, 뜻을 시니피에(기의, 記意)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개라는 기호는 개라는 시니피앙(발음, 혹은 글자)와 그것이 안고 있는 개의 개념, 의미 즉 시니피에가 결합하여 형성된다. ‘개’라고 발음하거나 글자로 썼을 때, 그것이 곧 현실 속의 ‘개’는 아니다. 다만 우리는 ‘개’라는 기호를 통해 개념을 연상하면서 인지한다.
오그덴과 리차즈의 삼각꼴
언어학자 오그덴과 리차즈도 비슷한 말을 한다. 그들에 의하면 기호는 대상과 1:1로 직접 관련되지 않고 기호 뒤에 숨겨진 대상의 개념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인지하고 소통한다.
오그덴과 리차즈의 삼각꼴
thought of reference
( 대상의 개념 )
Symbol -------------------------- referent
(상징) (대상)
개라고 했을 때 표현된 글자나 말 그 자체가 현실 세계의 개는 아니다. 언어는 다만 상징일 뿐이며 우리는 그것이 품고 있는 개념을 통회 우회적으로 개를 인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똑같은 언어를 써도 각자 자기 식대로 해석한다. 개라는 말을 듣고 떠올리는 개가 사람마다 다른데 하물며 정의, 선 등의 추상 명사나 형용사, 부사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우리가 기호로 인지하는 세상은 각자가 다르고, 상대적이며, 불안정하다.
우린 스스로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예전부터 언어권에서 형성된 ‘언어라는 굴레’에 갇혀 있다. 언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언어라는 구조와 굴레 갇힌 막힌 존재가 된다.
인간은 중간세계를 창조하는 존재다
그러나 철학자 폴 리쾨르 등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언어는 추상적인 체계, 구조에 갇혀 있지만 인간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언어를 통해 대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생성한다.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잡아내지 못하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직관, 상징, 의미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언어라는 굴레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고 결국, 마음이 중요하게 된다.
인간은 언어라는 굴레, 중간 세계에 갇혀 있지만, 동시에 언어를 통해 ‘중간세계’를 창조한다. 중간세계란 객관도 아니고 주관도 아니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 객관과 주관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나의 세계’다. 글쓰기란 돈벌이의 수단을 넘어서 이런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재미 때문에 하는 것이다.
기억의 세계는 언어화 되면서 규정된다.
소쉬르는 ‘언어로 형상화되기 전까지’ 우리의 기억은 부연 성운과도 같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언어화 될 때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에스키모인들은 설원에 펼쳐진 눈에서 수십 가지 형태의 눈을 보지만 한국인들은 한 가지 눈만 볼 것이다. 우린 우리의 풍토에 익숙한 몇 가지의 눈만 구별하지 북극의 설원에 펼쳐진 미세한 눈을 구별할 수 없다. 다르게 보인다 해도 인식의 세계에 잘 잡히지 않는다. 에스키모의 언어에는 눈을 표현하는 언어가 수십 가지가 있지만 한국어에는 몇 가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활 속에서 형성되었지만 그 언어는 우리의 인식을 한계 짓는다. 우리는 언어화된 것만 보며,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것들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고 부연 성운처럼 퍼져 있을 뿐이다. 흔히 생각이 명쾌해진 후에 그것이 언어화된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언어화 되었을 때 생각이 명쾌하게 드러난다. 즉 언어가 먼저라는 것이다.
물론 언어 이전에,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눈앞의 객관적인 현실이 있다. 하지만 인식하는 주관적인 세상은 각자가 다르다. 나는 여행 중에 그것을 종종 느꼈다. 영어권, 중국어권, 일본어권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른 관점, 다른 세계관으로 세상과 사람을 인식하고 있었다. 다른 언어의 굴레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경우 공통 인식을 갖기는 하지만, 미세하게 들어가면 다르다. 같은 것을 보아도 기억하고 판단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 인간은 현실을 언어라는 기호를 통해 우회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우리를 끌고 간다.
의식하는 자아보다 언어가 우리의 생각, 행동을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글쓰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많이 한다. 글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생각, 감정, 이미지, 충동 ‘한 조각’이 글로 표현되는 순간, 생각이 정리되고 명쾌해진다. 섬광과도 같은 언어의 한 조각이 글을 계속 쓰게 만든다. 언어화 되는 순간, 성운처럼 부옇게 고인 기억들이 분명하게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 누구나 단어를 던져 놓고 나면 글이 자연스럽게 잘 나올까? 그렇지는 않다. 부연 성운같은 기억의 세계가 풍부해야만 거기서 튀어나오는 언어가 풍부해지고, 경험의 세계가 풍부해야만 기억의 세계가 풍성해진다. 결국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경험의 세계, 즉 삶의 세계를 뻑적지근하게 살아야 하고, 그걸 기억으로 담아내는 프레임이 깊고 날카로워야 하며, 글을 쓰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여행기나 에세이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만들어진 맛있는 빵과도 같은 것
프로이트나 라캉 등의 정신분석가에 의하면 과거의 기억은 진실이 아니라 현재에 ‘형성되는’ 과거다. 정신 치료 행위에서 피분석자가 말하는 자신의 과거는 진실이 아니라 분석자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투영된 이야기라고 한다.
정신분석가와 피분석자와의 관계를 그대로 저자와 독자 사이로 볼 수는 없지만, 인간의 심리는 비슷한 것 같다. 저자가 자신에 대해 쓸 때 남들에게 이렇게 비추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투영된 상태에서 자신에 대해 편집한다. 이 말이 자신을 속이고 허상을 만들어낸다는 뜻이 아니라(그건 거짓말쟁이고) 글속에서 표현된 ‘나’는 과거의 경험에서 나왔지만, 독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존재라는 얘기다. 그 ‘나’가 표현하는 현실세계 역시 기억 중의 일부를 편집해서 표현한 것이다.
더 나가 한권의 책을 쓸 때는 저자 혹은 편집자의 기획, 의도가 개입되면서 전체 글이 편집된다. 그렇다면 편집된 기억과 글이라는 기호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현실과 나 사이에 펼쳐진 중간세계다.
나는 종종 여행기나 에세이는 현실이라는 밀가루에 ‘이스트’가 뿌려져서 약간 부풀게 만들어진 빵과 같다고 얘기한다. 빵이 거짓말로 만들어진 허구는 아니다. 또 이스트가 과도한 목적성, 상업성이라면 질 나쁜 빵이 된다. 내가 말하는 이스트는 자연스럽게 내부에서 솟구치는 자신의 가치관, 감성, 상상력, 현재의 기분, 그리고 언어의 속성을 말한다. 그것이 없으면 여행기나 에세이는 빡빡한 보고서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여행기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다. 여행기는 허구도 아니지만 리얼한 보고서도 아니다. 가이드북이나 문화탐사기 등은 좀더 리얼에 가깝지만, 그것 역시 수많은 현실 경험 중에서 저자의 프레임이 걸러낸 부분적인 기억을 편집해낸 것이다. 다만 여행기가 말랑말랑한 빵이라면 가이드북은 좀 딱딱한 빵이라는 것이 다를 뿐.
결국 저자는 현실과 자신 사이에서, 객관과 주관 사이에 생성되는 중간세계를 창조하는 재미에 여행기를 쓴다. 나는 한 때 글에 절망했다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글 쓸 의욕을 찾았다. 글을 통해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행위가 의미와 기쁨을 주었다.
단,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여행기에서 거짓말과 터무니없는 과장으로 장난치라는 것이 아니다. 그건 자신을 망치는 길이다. 조심해야 한다. 다만, 지금 말하는 결론은 언어를 깊이 파고 들다보니 나온 것이다. 결국 중간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윤리성, 가치관, 세계관이 중요해지며 거기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마음이 중요한 이유다.
언어에 대한 태도
과연 나는 언어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 이것은 사치스런 관념의 장난이 아니라 글쓰는 길을 계속 걸어갈 사람으로서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그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태도를 정리해보았다. 당신은 어떤 것이 끌리는가?
리얼리즘적 태도
언어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다고, 즉 미메시스(현실의 모방, 복제)가 가능하다고 믿는 태도가 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글을 엄숙하게 대한다. 진정성을 강조하고 수식이나 과장을 싫어하며, 있는 그대로 현실을 옮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힘을 믿으며 세상과 자신을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언어로 표현된 서술과 묘사를 곧이곧대로 믿는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과도한 감상, 미학적 감성에 의해 왜곡된 글들을 저자의 ‘뻥 튀기’ 정도로 폄하한다.
미학적, 유희적인 태도
이런 태도로 보면 언어는 ‘이미지의 유희’다. 어차피 언어는 현실을 재현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글을 쓰면 현실을 옮기는 여행기에서도 과도한 감성, 과장에 빠진다. ‘글을 위한 글’, 즉 미학적 감성을 추구하면서 현실과 다른 세계를 만들어 간다. 독자들도 현실과 상관없이 그 글이 주는 이미지와 미학적 감성을 즐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 너무 빠지면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글 잘 쓰는 재능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성이 타락하고 개차반이 되는 이유가 이런 데 있다. 어차피 장난이니까...글도, 인생도...이런 정도로 머물게 된다.
방편적인 태도
이런 태도에서는 언어가 메시지를 전파하는 방편이라고 본다. 즉 언어가 한계를 띠고 있다 해도 자신의 목적과 메시지를 위해 방편적으로 사용한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글들에 이런 태도가 보인다. 방편으로서 언어를 대하면서도 늘 ‘언어에 팔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병행한다. 이런 관점을 가진 여행기 저자들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이런 경향을 가진 독자들 역시 그 메시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회의적인 태도
선문답 식으로 상징과 비유를 통해 언어를 넘어선 세계를 지향하거나, 언어를 기피하고 절망한다. 이런 사람들은 여행기를 쓰지 않거나,스스로를 자조하며 쓰게 된다. 이런 태도의 성향을 가진 독자들 역시 냉소적으로 글을 대한다.
상업적인 태도
아예 언어 자체를 상품으로 보는 태도다. 세상은 원래 사고파는 시장이며 글 역시 거기서 팔리는 상품이란 관점을 갖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글을 파는 즐거움으로 쓴다.
이런 태도는 언어를 유희적으로, 방편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자칫 빠질 수 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미학적 감성이나 메시지를 중요시하다 결국 시장의 트렌드에 맞춰 글을 상품처럼 생산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나는 어떤 성향일까?
두루두루 거친 것 같다. 처음에는 리얼리즘적인 태도를 가졌다가 회의하고, 약간의 방편적인 태도도 취하다 미학적인 태도에도 조금 기울어졌던 것 같다. 상업적인 태도는 경계하고 있지만, 팔려야만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어떤 한가지 태도를 교조적으로 택하는 것보다 전체적인 과정을 분석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즐기는 편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메커니즘에 대한 끝없는 성찰과 사유다. 다만 요즘에는 글의 긍정적인 기능, 해석학적 관점을 좋아한다. 결국 좋은 의도, 좋은 메시지, 선함, 아름다움...이런 것을 갖고, 그런 글쓰기를 지향하되, 교조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유연하게 노력하고자 하는데, 쉽지 않은 길이다.
이글을 읽는 분들도 각자의 입장에서 어느 한가지를 중요하게 여길 텐데...나는 지난 30여년간의 글쓰기를 돌아보며 정리해 보았다. 각자의 사정에 맞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쓰기 연재는 오늘로서 그만 두고, 앞으로 다른 연재를 할 생각인데, 생각 좀 해보아야겠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