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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아바초코송이 May 31. 2024

홍콩의 습한 첫 공기

뭐든지 처음은 새롭고 재밌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2주의 격리기간이 끝나고, 작은 캐리어, 검은 보스턴백, 그리고 대학생용 가방이라고 엄마가 사주신 노스페이스 배낭을 낑낑거리고 끌고 나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에어비앤비였다.


2021년 코로나에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홍콩은 해외 입국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는데, 니콜 키드먼이 아니라면(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다면 뉴스를 찾아보도록) 누구든지 자가격리 2주에서 길면 3주에 셀프 모니터링 기간 (사실 별 의미가 없는 기간이다)을 합쳐 한 달가량을 좁은 홍콩 숙소에서 보내야 했다.

 

이미 격리호텔로 돈도 많이 썼겠다, 7일만 좁은 방에서 딱 참고 견디자.


사진으로는 좁지만 깨끗해 보이고 리뷰도 좋았던 홍콩 에어비엔비의 첫인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발을 디딜 틈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 문을 열자마자 한 발자국 떼면 사방이 막힌 침대가 있고, 침대 바로 옆에 비스듬한 타일로 구분된 미니욕실 (이라 해봤자 세면대에 변기가 다다.)이 있다. 이동을 할 수가 전혀 없는 구조다. 홍콩의 흔한 월세방들은 정체성이 불분명한 낡고 으스스한 건물 십몇층 정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러다 보니 여자 혼자 사람도 잘 없는 어두컴컴한 건물에 들어가서 언어가 안 통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지내는 것이 나에게는 조금 어려웠다.(물론, 3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학교는 개강을 했고,  새내기였던 나는 대학교 첫 수업을 줌을 통해서 들어야 했다. 초스피드로 짐을 던져두고, 근처 스타벅스에 가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이어폰은 연결이 안 되지, 교수님은 나한테 질문폭격을 하시지, 충전기 꽂을 곳은 없지... 혼비백산이었다.


어찌어찌 수업을 마치고 짐을 싸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20대 후반 정도의 남자가 광둥어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정신없이 수업을 듣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나를 꽤나 관찰하고 있었나 보다. 훅 들어온 광둥어를 영어로 받아쳐 미안하지만 나는 광둥어를 할 줄 모른다고 했다. 그러더니,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는 홍콩남은 이렇게 말했다.


너무 제 취향이신데, 혹시 핸드폰 번호 좀...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호감을 갖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취향이나 접점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내 쪽에서는 그쪽이 취향이 아니었다. 재빠르게 얼버무리고 짐을 싸서 정신없는 스타벅스를 나왔다.


습관처럼 줌 과외알바를 하기 위해 에어비엔비에 왔는데, 심하게 작은 방에 다시 한번 적잖이 놀랐다. 그래도 잠만 자는 곳으로는 괜찮다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문제가 터졌다.


좁디좁은 침대에서 고개도 빳빳이 들 공간이 없어 목을 45도 구부린 채로 줌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주먹만 한 크기의 반짝거리는 바퀴벌레가 내 다리 쪽으로 기어 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벌레를 포함할 수 있을 만큼 벌레를 극도로 무서워하는데, 발 디딜 틈조차 배낭이 차지해 버린 좁아터진 방에서 바퀴벌레를 피할 공간조차 없었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나도 이것을 경험했다. 개미 하나도 못 잡는 내가 거대한 바퀴벌레를 휴지로 때려죽였다. 어디선가 바퀴벌레는 죽을 때 알을 낳으면서 죽는다고 들어서 더 이상 그 납작해진 바퀴벌레 시체가 있는 침대를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결심했다.

나는 여기서 더 이상 못 있겠다. 환불이 안 된다고 한들, 바퀴벌레와의 동침은 할 수 없어.


지하철을 타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는데, 생각보다 금방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독일인 나딘이라는 친구였는데, 우리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것이었다. 데이터과학 수업을 듣던 중, 이 친구 역시도 셀프모니터링을 하고 있는데 호텔비가 비싸서 룸메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간절한 기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느낌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바퀴벌레 방을 탈출하고 싶었기에, 바로 친구의 호텔로 옮겨갔다. 그렇게 나의 홍콩 첫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이 친구와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주하이에 친구들과 staycation을 갔을 때의 뷰다. 강물이 이렇게 탁한 초록색인 걸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 이야기는 냉동실에 넣어둔 파파야를 잘라먹은 뒤 계속해보겠다.

흐르는 강물과 같이, 때로는 이어지고 때로는 갈라지는 형태로 연재를 할 예정이니 저의 구독자가 되어 꾸준히 읽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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