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컸던 이유
살다 보면 우리가 계획했던 일보다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더 많이 발생한다. 스무 살에 홍콩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도 평생 생각조차 안 했던 일이지만, 어쩌면 여태까지 스스로 내렸던 결정 중 가장 현명했던 일이 아닐까 싶다.
과외 알바를 하면서 뼈 빠지게 벌어놓은 돈을 처음부터 왕창 날렸다.
코로나가 세계를 마비시켰던 당시 홍콩은 엄격한 격리 규칙을 세워뒀었고, 덕분에 나는 홍콩에 입국하자마자 격리호텔로 이송이 되었다. 14일의 격리 기간에 더불어 7일 동안의 "셀프 모니터링"기간을 더해 21일간의 숙소 비용을 냈어야 했는데, 룸메이트가 잘못 얻어걸리면서 트러블이 생겼고, 그 과정에서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안 써도 될 돈을 두 배 이상 지출하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충분한 성적을 얻고, 그 경험으로 남을 가르쳐서 돈을 버는 행위를 하고 나니 내 손에 쥐어지는 만 원, 이만 원이 너무 소중했다. 그래도 그토록 바라던 학교에 입학을 하고 홍콩에서의 새 막을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그러다 보니, 창문 하나 없이 걸어 다닐 틈도 없는 격리호텔 1인실도, 벌레 끼어있는 호텔 도시락도, 14일 동안 방에서 한 발자국 못 나가는 나의 처지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홍콩에서 혼자 산 지 어느덧 3년이 넘어가면서 인간이라면 많이들 가지고자 하는 것 - 돈, 지식, 사람, 시간은 절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들보다 월등히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어도 노력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나를 그들과 비슷한 선상으로 끌어올려줄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처음 홍콩에 왔던 스무 살, 14일의 숨 막히는 격리를 마치고 먹어본 첫 딤섬은 설렘 그 자체였다. 3년이 지날 동안 여전히 딤섬은 맛있기만 하다.
꿈에 그리던 회사에서 인턴도 해보고,
외국인과 연애도 해보고,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해지기도 하고,
한국-홍콩 두 나라의 지옥의 출근길에 질려도 보고,
미국인 교수님과 싸워도 보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내일 아침 시원한 동랭차 (홍콩의 국민 아이스티)를 마시면서 이어보겠다.
흐르는 강물과 같이, 때로는 이어지고 때로는 갈라지는 형태로 연재를 할 예정이니 저의 구독자가 되어 꾸준히 읽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