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숙 Oct 24. 2024

<살아간다는 것>의 배경지 항저우

위화(余華)

<살아간다는 것>의 배경지 항저우

   

위화(余華, Yu Hua)는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작가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인간의 생존과 고통을 심도 있게 다룬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는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작가이며 그의 소설은 모두 번역되어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위화의 책은 <허삼관 매혈기>. <인생>, <제7일> 순이다.

     

위화 작가


위화는 중국에서도 최고 인기를 누리는 작가다. 그의 신작은 나올 때마다 초판으로 50만 부를 찍는다고 한다.


<인생>은 2018년 한 해에만 2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그는 자신의 책이 잘 팔리는 이유로 중국 학생들이 중국어 시간에 자신의 책을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 2010년부터 루쉰의 소설이 중국 교과서에서 빠지고 위화의 작품이 들어갔다.


루쉰의 작품 대신 새로 교과서에 포함된 위화의 단편은 1987년에 발표된 <십팔 세에 집을 나서 먼 길을 가다>라는 작품으로 18세 청년이 길을 나서 부딪치는 사회 부조리를 감수성 있는 필치로 그려냈다.     


위화의 문학은 중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시대와 국경을 넘어 공감대를 형성하는 힘이 있다.     


그는 1960년 4월 3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에서 태어났다.      


위화의 부모님은 의사였다. 가족은 장례식장 건너편 병원 구내에 살고 있었는데 이 같은 환경은 죽음과 너무 가까웠다.


후일 위화는 이때의 영향으로 그의 후기 작품들의 세계관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위화 가족이 살고 있던 사합원의 1층에는 가족의 집과 영안실이 있었고 2층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터인 병원이 있었다.      


당시 중국 농촌의 병원은 뒷마당 연못에 환자들의 살점과 피를 버려 파리가 들끓는 비위생적인 곳이었다. 위화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지만, 가족은 화목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도 문화 대혁명을 피할 수 없었다.     


위화의 아버지는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권파로 몰렸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아비판 투쟁을 해야만 했다.     


위화의 부모는 빈민들이 먹는 음식을 일부러 먹으며 이웃에 반성하는 모습을 연출해 겨우 살아남았다.      


문화 대혁명은 위화가 7살 때 시작되어 17세에 끝났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폭력과 혼란이 포함되어 있다.      


위화는 말한다.


“평온하고 질서 있는 사회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위화 작가


위화는 어린 시절 읽을 책이 없어서 <마오쩌둥 선집>을 읽으면서 자랐다. 문화혁명 후기에는 서양 소설도 몰래 빌려서 읽었지만, 대부분의 책은 서문과 결말이 뜯기고 없었다.


후일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높인 것은 결말을 알 수 없는 뜯긴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웃음이 나지만 실은 웃을 수 없는 대목이다.     


위화가 받은 교과서에는 소설, 산문, 시가 모두 루쉰과 마오쩌둥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어려서 그는 중국에는 작가가 두 사람밖에 없는 줄 알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가 학교에서 공부할 시기는 문화 대혁명과 겹친다. 학교에서 수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배운 것이 없으니 당연히 대학은 떨어졌다.


위화는 사람들의 이를 뽑는 발치사를 시작했다. 이후 치과 의사가 되었지만, 당시 중국에서 치과의사는 박봉의 가난한 직업이었다.      


위화는 자신이 작가가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80년대 중국에서는 치과의사도 가난했고 작가도 가난했다. 그러나 치과의사는 고생하면서 가난했고, 작가는 자유로우면서 가난했다. 나는 이를 뽑는 일보다는 글을 쓰는 게 좋았다.”     


위화는 1980년대 중반 중국 문단에 등장하여 점점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살아간다는 것>(活着, 1993년), <허삼관 매혈기>(许三观卖血记, 1995년), <형제>(兄弟, 2005년) 등이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인생>이라고 번역되어 책이 출간되었다.  

   

국내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위화의 책들


<살아간다는 것>은 문화 대혁명을 시대 배경으로 한 소설로 인간의 생존 의지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94년 장예모 감독이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문학적 특징을 살펴보기 이전에 그의 문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문화 대혁명에 대해 알아본다.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

문화 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에서 일어난 사회적, 정치적 운동으로, 당시 중국 공산당 주석이었던 마오쩌둥(毛泽东)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혁명은 중국의 경제적, 사회적 체제와 이념을 재구축하려는 시도였으며, 공식적인 명분은 자본주의적 요소와 반혁명 세력을 제거하고 순수한 공산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질적인 결과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박해였다.     


배경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1958~1962)의 실패로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자 당 내부의 실용주의적 지도자들, 특히 류사오치(刘少奇)와 덩샤오핑(邓小平)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마오는 자신의 혁명적 권위를 회복하고 중국 사회 내에서 그가 볼 때 부패하고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문화 대혁명을 시작했다.     


목표와 주요 이념

마오는 중국 내에서 자본주의적 경향, 특히 당 내의 ‘수정주의자’와 ‘반혁명 분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강력한 이념 투쟁을 요구했다.     


마오는 특히 홍위병(红卫兵)이라고 불리는 청년 학생들을 동원하여, 당과 국가 기관 내의 적들을 비판하고 제거하도록 했다.


이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교사, 지식인, 정부 관계자 등을 박해했다.     


홍위병 활동

1966년부터 1968년까지 홍위병들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학교, 정부 기관, 문화 시설 등이 파괴되었고, 많은 지식인과 교사들이 비판받고 처형당했다.


이들은 ‘4대 구습’(옛 생각, 옛 문화, 옛 풍습, 옛 관습)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유적지와 문화재를 훼손했다.     


대규모 숙청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같은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은 마오쩌둥의 정적으로 지목되어 정치적으로 제거되었다.


류사오치는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덩샤오핑은 실각 후 복권되었지만 오랜 기간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     


사회적 혼란

문화 대혁명은 10년 동안 중국 사회에 극심한 혼란을 초래했다. 학교와 대학은 문을 닫았고, 지식인, 교사, 전문가들이 박해당하면서 교육과 학문이 큰 타격을 입었다.     


경제적 후퇴

중국 경제는 문화 대혁명 기간에 성장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혼란 속에서 많은 산업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인적 피해

수백만 명이 박해를 받았으며, 그중 많은 사람이 고문을 당하거나 사망했다. 특히 지식인, 예술가, 교사들이 큰 타격을 입었고, 많은 가족이 분열되었다.     


종결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에 끝났다. 마오의 후계자였던 화궈펑(华国锋)이 권력을 잡으면서, 덩샤오핑이 복권되고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문화 대혁명을 대재앙으로 규정하고 공식적으로 부정했다.     


영향

문화 대혁명은 중국 현대사에서 깊은 상처를 남겼다. 중국 사회의 교육, 문화, 경제 시스템이 큰 타격을 받았고, 정치적 박해로 인해 수많은 지식인과 가족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위화 문학의 특징

위화는 개인의 고난과 생존을 통해 중국 현대사를 조명하고 있다. 특히 국가와 개인의 관계,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그의 소설은 잔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유머와 인간미를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국내외 영향력

위화의 작품은 중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는 프랑스 문학예술 훈장을 비롯해 다수의 국제 문학상을 수상했다.      


<살아간다는 것> 줄거리

<살아간다는 것>(活着)은 20세기 중국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생존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은 중국 현대사 속에서 개인이 겪는 비극과 그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인간의 회복력을 강렬하게 그려냈다.


왼쪽은 번역본 인생, 오른쪽은 세트로 되어 있는 원본 책

    

이야기의 시작은 시골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수집하는 한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시골길을 걷다가 소와 이야기를 나누는 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의 이름은 푸구이(福贵)로 소설의 주인공이다.


푸구이는 민요를 수집하는 남자에게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들려준다.     


나는 원래 부유한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네. 집은 모자라는 게 없는 부자였지. 그러나 얼빠진 내가 도박에 빠져서 집안을 완전히 말아먹고 말았네.      


나는 도박을 하면서 빌린 돈을 장부에 기재해 두고 사인만 했는데 도박에만 몰두하다 보니 그 많은 땅을 다 빼앗긴 줄도 몰랐다네.      


결국 땅은 물론 집까지 도박장에서 계교를 부린 룽얼에게 모두 빼앗겼지.     


집을 빼앗기고 우리 가족은 성밖 초가집으로 이사했네. 그 충격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네.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 원래 내 땅이었던 룽얼의 땅의 소작농이 됐다네. 참 한심한 인생이었지. 다행히 아내는 내게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어.      


얼마 후 어머니도 쓰러지셨지. 나는 어머니 진료를 위해 의원을 부르러 가던 길에 국민당 군대에 잡혀 전쟁터로 끌려갔다네.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기회가 없었어. 결국 부대를 따라 양쯔강까지 넘어갔네.     


2년 만에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딸 펑샤는 고열로 인한 후유증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네.


나는 자식 노릇,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한 등신이었네.     


얼마 후 문화 대혁명으로 세상이 달라졌네. 다행히 나는 땅을 배분받았어. 그리고 내 땅을 빼앗은 룽얼은 악덕 지주로 지목되어 총살을 당했다네.


만약 도박으로 내가 재산을 탕진하지 않았다면 총살당한 사람은 아마 나였을 거야.     


아들 유칭을 학교에 보내려고 딸 펑샤를 남의 집 식모로 보냈네. 펑샤는 말을 못 하니 얼마나 구박이 심했겠나?


그로부터 몇 개월 후 펑샤가 펑펑 울면서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왔다네.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식구 모두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 같이 지내기로 작정했다네.     


집안에 양식은 떨어지고 아내가 구루병에 걸렸는데 병이 점점 심해졌네.      


어느 날 13살이던 아들 녀석은 헌혈하러 갔다가 망할 놈의 의사가 피를 너무 많이 뽑는 바람에 병원에서 죽고 말았네.


가슴이 찢어졌지만 차마 아내에게 알릴 수 없어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는 이미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네.      


얼마 후 딸이 성실하고 착한 사위를 만나서 결혼했다네. 이제 행복하게 살겠지, 하고 한시름 놓았는데 딸은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고 말았네.     


투명 중이던 아내도 두 아이를 앞세운 뒤 더는 못 버티겠는지 아이들의 뒤를 따라갔다네.      


또 착한 사위는 현장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죽고, 손자 녀석은 내가 준 콩을 너무 많이 먹어서 질식사했다네.     


다 내 잘못이지. 그런데 그 지경이 되고 보니까 세상 모든 일에 초연해지더군.      


가족들이 모두 떠난 다음에 나는 늙은 소 한 마리를 샀네. 소의 이름도 내 이름과 같은 푸구이라네.      


마을 사람들은 소가 2~3년 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나를 비웃었다네. 하지만 이 소와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을지 그 누가 알았겠나?


이 녀석도 나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거야.     


푸구이는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서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아가며 마지막까지 생존의 의지를 잃지 않는다.     


나의 감상

이 책을 읽은 후 푸구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배울 점은 초연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부모를 비롯해 아들, 딸, 아내, 사위, 손자, 친구까지 다 죽을 때 그는 여러 번 혼란을 겪었다.


푸구이는 말한다.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푸구이의 다 잃는 삶이 평범하다면 도대체 평범하지 않은 생은 무엇일까? 반문해 보았다.     


그는 누가 봐도 평범하지 않고 굴곡진 삶을 살아왔는데 어떻게 저렇게 초연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작가는 푸구이의 삶이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삶을 산 것이라고 쐐기를 박는다.


비록 젊은 시절에는 방황했어도 푸구이는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표지향적인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사는 정말이지 초연한 삶을 산 것이라고.      


즉 작가는 이 푸구이라는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초연하게 살라는 커다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 아닐까?    


주제

이 책은 인간의 고통과 희망, 그리고 끊임없는 생존 의지를 다루고 있다.


작품은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의 역사적 격변 속에서 많은 사람이 겪었던 비극을 상징하고 있다.      


위화는 푸구이의 삶을 통해 인간은 큰 상처를 입어도 끝내 살아남아야 한다는 회복력과 불굴의 의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족이 모두 죽고 혼자 남은 인생도 과연 살아남아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 생을 연명해야 하는지, 그런 의문이 드는 작품이었다.     


영화 <인생>

<살아간다는 것>은 1994년 장예모(张艺谋)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푸구이 역에는 갈우가, 아내 자전 역은 공리가 맡아 열연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인생 영화 포스터


영화는 결말에서 소설과 차이가 있다.      


영화는 며느리와 손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 희망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 있는 열린 결말인 반면, 소설은 푸구이 빼고는 모두 죽어서 닫힌 결말이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

소설 <살아간다는 것>과 영화 <인생>(1994년)은 같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두 작품 모두 중국 현대사 속에서 주인공 푸구이가 겪는 비극과 생존의 의미를 탐구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그 메시지와 세부적인 전개에서 차이를 보인다.     


결말의 차이

원작 소설에서 푸구이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지만, 그의 가족들은 모두 죽는다.


소설의 끝에서 그는 홀로 남아 늙은 소와 함께 살아가며 인간의 생명력과 고독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이 결말은 인간의 고통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푸구이를 강조하고 있다.     


화에서는 푸구이의 가족들이 대부분 사망하지만, 그의 며느리와 손자가 살아남는다.


영화는 상대적으로 희망적인 메시지로 끝나는데 푸구이의 손자와 함께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소설보다 덜 비극적이다.     


인물의 성격과 태도 차이

소설 속 푸구이는 처음에는 철없는 지주 가문의 아들로 등장하지만, 점차 그의 성격은 비극을 통해 변해간다.


그는 삶의 역경을 체념하고 묵묵히 견디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채 홀로 남는다.     


영화 속 푸구이는 훨씬 더 인간미가 강조되며,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치는 인물로 그려졌다.


푸구이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을 보여주며, 영화에서 그의 성격은 소설보다 더 적극적이다.     


정치적 맥락과 검열

소설은 중국 현대사의 다양한 정치적 사건들, 특히 대약진운동과 문화 대혁명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소설 속에서 푸구이와 그의 가족들은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고통받고 이는 그들의 비극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중국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정치적 비판을 희석시켰다.


특히 대약진운동과 문화 대혁명에 대한 비판적인 요소가 축소되었으며 개인적인 고통과 가족 관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의 검열에 의해 내용이 수정되었고, 덜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로 변모되었기 때문이다.     


서사적 스타일

위화의 원작은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체로 서술되어 푸구이가 겪는 고난들이 서서히 쌓여가는 구조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인물의 내면적 변화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장예모 감독은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여 감정적인 표현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특히 영화는 색감, 조명, 장면 연출을 통해 푸구이의 인생에 드리워진 비극적 운명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소설의 내적 서사보다 영화는 더 극적인 순간들을 강조한다.     


주제적 강조점

소설은 개인의 고난과 생존을 중심으로 인간의 회복력에 대한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푸구이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것 자체가 중요한 주제로 제시된다.     


영화는 가족 관계와 인간적인 따뜻함을 강조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개인의 생존과 더불어 가족을 위한 희생과 사랑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푸구이가 가족을 잃고 난 후에도 미래 세대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

소설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고통과 생존을 더욱 철학적으로 묘사하고, 푸구이의 삶을 통해 비극적인 역사를 그대로 직면하게 한다.      


반면, 영화 <인생>은 검열의 영향으로 정치적 색채가 약화되었으며, 푸구이와 가족의 관계, 감정적인 부분이 더 부각되었다.      


두 작품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감동적이지만, 소설이 더 비극적이고 철학적이라면 영화는 보다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접근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작품의 차이를 이해하면 각 매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의도를 더 깊이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위화 작가의 작품 소개

<허삼관 매혈기>(许三观卖血记, 1995년)

허삼관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피를 파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진 건 없지만 가족들만 보면 행복한 남자 ‘허삼관’이 11년 동안 남의 자식을 키우고 있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되면서 웃음과 감동이 펼쳐진다.  


허삼관 매혈기 책

    

허삼관은 자신의 혈액을 팔면서 겪는 고난을 통해 가족과 사랑, 생존의 의미를 발견한다.     


주제: 이 소설은 중국 사회의 빈곤과 생존 문제를 비판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유머와 비극이 교차하는 독특한 문체를 사용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허삼관 매혈기>는 우리나라에서 지난 2015년에 <허삼관>이라는 제목으로 하정우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다.      


<허삼관 매혈기>를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하정우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고 아내 역에는 하지원이 열연했다.

    

국내 영화 허삼관 포스터와 스틸


허삼관(하정우 분)이라는 남자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피를 팔면서 겪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가족을 사랑하며 희생하는 아버지상을 그렸다.      


원작처럼 큰아들이 동네 아저씨를 닮았다는 입소문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다양한 위기와 갈등을 빚는다.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주요 특징

하정우는 감독뿐 아니라 주인공 역할까지 맡아, 극 중 허삼관의 복잡한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원작의 감동 재현: 위화의 원작이 지닌 감동과 유머를 살리면서도 한국적 정서에 맞게 각색되어 원작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가족애와 희생: 영화는 허삼관이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습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사랑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형제>(兄弟, 2005년)

두 형제 리광두와 송강이 문화 대혁명 시기와 그 이후 중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어린 시절 서로를 의지하며 자란 형제는 성장 후 극명하게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주제: 가족과 형제애를 다루면서도 중국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간적 갈등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위화 특유의 유머와 잔혹한 현실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형제> 책


<제7일>(第七天, 2013년)

줄거리: 주인공 양페이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 후, 7일 동안 사후 세계를 여행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세상에서 겪은 불합리와 부조리를 다시 만나게 된다.     


3 주제: 이 소설은 인간의 죽음과 사후 세계를 배경으로 사회적 문제와 현대 중국 사회의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의 기념비>(爱情的纪念, 단편집)


줄거리: 여러 단편 소설들로 구성된 이 작품집은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 고통, 생존의 주제를 다양한 각도로 탐구하고 있다.     


주제: 인간의 복잡한 감정, 특히 사랑과 상실을 심도 있게 다루며,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서사를 제공한다.     


항저우에서 꼭 가봐야 할 곳

항저우(杭州)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유서 깊은 역사 유적지를 자랑하는 도시로, 다양한 관광 명소들이 있다. 그중 꼭 둘러보아야 할 곳 몇 군데를 소개한다.     


서호(西湖, West Lake)

항저우의 상징적 명소인 서호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은 시인들과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곳으로 고전적인 중국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호수 주변에는 보리사(宝俶塔), 단교(断桥), 화강석 산책로 등 다양한 명소들이 있는데 서호에서는 꼭 배 타기를 추천한다.     



아름다운 서호 전경


영은사(灵隐寺, Lingyin Temple)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찰 중 하나로, 16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웅장한 대불전과 주변의 거대한 불상들이 있는 페이라이봉(飞来峰)은 특히 유명하다.


영은사는 항저우의 영적인 상징이자 많은 관광객이 찾는 중요한 사찰이다.     



영은사 전경


청하방고가(清河坊古街, Qinghefang Ancient Street)

항저우의 전통적인 상업 거리로, 고대 상업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수많은 전통 상점과 음식점, 공예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옛날 중국의 번화한 상업지구를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중국의 간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많다.     


육화탑(六和塔, Liuhe Pagoda)

송나라 시대에 세워진 이 탑은 첸탕강을 내려다보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13층 높이의 육화탑은 항저우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웅장한 육화탑


항저우 송성(杭州宋城, Songcheng Theme Park)

송나라 시대의 문화를 재현한 테마파크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공연과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송성 천고의 사랑(宋城千古情)’이라는 대형 공연은 매우 인기가 많다.     


송성 거리


용정차밭(龙井茶园, Longjing Tea Plantation)

중국의 대표적인 녹차 중 하나인 용정차(龙井茶)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항저우는 용정차의 고향이며, 차밭을 둘러보며 전통 차 제조 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     

용정 차밭 전경


이 외에도 항저우에는 여러 역사적 유적지와 자연경관이 풍부한 명소들이 많이 있다.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도시로, 중국 문화를 깊이 체험하고 싶다면 항저우는 최고의 여행지가 될 것이다.     


항주 여행기

위화는 항저우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청소년기를 저장성의 하이양(海盐) 우위안현(武原镇)에서 보냈다.


위화는 이곳을 배경으로 많은 소설을 썼다.


그는 자신을 위한 글쓰기는 하이양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이양은 항저우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져 있으며 자동차로 대략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다.


이곳은 전통적인 농촌 지역으로 비교적 평온하고 소박한 환경이다.      


위화의 작품 속에는 유난히 가난한 농촌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삶과 고난은 그가 직접 경험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여행 중 보게 된 기마대회


내가 광저우(廣州)와 항저우(恒州)를 다녀온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중국을 처음 가본 곳이 바로 광저우였는데 공항 화장실이 좌식이 아니라 쪼그려 앉는 수세식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공항이 수세식이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광저우를 가게 된 것은 일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두 아이를 낳고 경력 단절녀가 되었다. 아이를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은 다니던 출판사에서 교정이나 윤문을 받아와 집에서 하는 일이었는데 시간과 노력에 비해 돈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자서전 일을 하나 맡게 되었다. 자서전은 당시에도 한 권에 적게는 500만 원에서 많게는 천만 원을 훌쩍 넘기는 고가의 일이었다.


그러나 자서전이 저자로부터 직접 받아오는 일이 아니라 출판사를 통해 오다 보니 천만 원짜리 일도 내가 받는 금액은 150만 원에서 많아야 200만 원 정도였다. 보통 두세 달 걸려 일은 내가 다하는데 5:5도 아니고 8:2라는 사실이 조금 억울(?)했다.


그것도 교정 보는 일보다 훨씬 나았고 아이를 키워가면서 짬짬이 하는 일 치고는 그야말로 인형에 눈을 붙이는 노동보다는 많은 금액이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말이 너무 많은 저자를 만나도 피곤했고 말이 없는 단답형 저자를 만나면 쓸 게 없어서 더 피곤했다.


나는 머리를 짜냈다. 어떻게 하면 저자로부터 직접 일을 받아올 수 있을까? 그러다 생각한 것이 홈페이지를 만들어 내가 직접 자서전 전문회사를 운영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곧 출판사에 다니면서 친하게 지내던 편집디자이너를 만났다. 그녀에게 근사한 곳에 가서 밥을 사고 마음을 홀린 뒤에 자서전 대행 홈페이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홈페이지가 완성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일단 도메인을 만들고 호스팅을 신청해 링크를 연결했다. 그런데 내가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키워드를 입력하면 광고비를 내지 않아도 그냥 화면에 우리 홈페이지가 떴다.


그런 서비스를 해주는 곳은 세 곳이었는데 야후(지금은 없다)와 네이버, 그리고 다음이었다. 광고비를 내면 맨 위에 우리 홈페이지가 떴지만, 너무 많이 노출되어도 일을 감당할 수 없기에 나는 광고비를 내지 않고 홈페이지가 노출되는데 만족했다.


만약 의뢰자와 직거래를 한다면 일 년에 3권만 해도 괜찮은 부업이었다. 그렇게 해서 ‘마이라이프북’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그 일을 이어서 하고 있다.


물론 생각만큼 일이 술술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듯 전화가 걸려왔고 대개는 문의 전화였다.


“제가 자서전을 만들려고 하는데 얼마나 드나요?”


전화를 건 의뢰인들은 대뜸 얼마냐고 묻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이는 앞뒤가 없는 난해한 질문이었다.


자서전을 만들려면 원고가 있어야 하고 원고가 없으면 취재부터 시작해 글을 써야 했다. 또 책을 만드는 가격도 천차만별이어서 부수와 종이의 질, 제본을 어떻게 하느냐, 후가공 작업 등 500부를 찍는다고 가정해도 적게는 200만 원에서 1,000만 원까지 다양했다.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면서 매일 진을 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파리를 날리다가 일이 들어온 곳이 바로 광주였다. 그것도 전라도 광주가 아니라 중국 광주에서 일이 들어온 것이다.


여행 중 구경했던 소수민족의 공연


어느 날 아침부터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래도 사업이랍시고 집에 전화 두 대를 설치했다. 하나는 집 전화, 또 하나는 일 전용으로 쓰는 전화였다.


전화로 가격만 물어보고 그야말로 간을 보는 고객이 많았으므로 나는 직감적으로 전화를 걸어온 사람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촉을 세웠다.


“여기 중국인데요, 혹시 중국으로 출장을 오실 수도 있나요?”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대뜸 중국으로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순간 머리를 굴렸다. 당시 아이들은 4살, 7살로 둘 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국내라면 몰라도 중국까지 일하러 가기에는 좀 꺼려졌다. 더군다나 생면부지의 남자의 말을 믿고 중국에 갔다가 인신매매단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걱정부터 앞섰다.


“물론 중국 출장을 갈 수도 있는데요, 전화 인터뷰로 하면 안 될까요?”


오가는 비행기표와 숙박료를 계산한다면 차라리 전화가 싼 편이었다. 당시에는 카톡도 없던 시절이었다.


“오가는 경비하고 숙박은 모두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꽤 점잖은 말투에 그리 나쁜 사람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민은 되었다. 특히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이라는 말에 자꾸 보이스피싱이나 인신매매가 떠올랐다.


내가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졌는지 자기 딸이 한국에 나왔다가 곧 들어오는데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함께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얼떨결에 딸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도 나는 계속 고민이었다.


사실은 4살짜리 딸이 마음에 걸렸다. 딸에게는 엄마밖에 없는데 아이에게 커다란 혼란을 주면서 이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덜 먹고 덜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을 못 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일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다가는 결국 죽도 밥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 결여에 있었다.


사실 아이를 키워놓고 슬슬 일을 시작할까 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언제 나와서 일을 할 거냐고, 애는 잠시 어디든 맡기도 출근하라고 다그치던 출판사도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사이 출판계의 현실은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안부 끝에 하는 말은 한결같이 출판계 상황이 좋지 않아 있는 직원도 내보낼 형편이라고 말했다.


꼭 원고를 만들어 놓고 읽어 내려가는 듯 대부분 출판사의 반응이 똑같았다. 당시 나는 스스로 경력단절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터라 이것저것 다 따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어찌어찌해서 딸을 만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서도 과연 잘하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기왕에 시작한 일을 의심만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전후사정을 말하고 조언을 구했다. 어지간하면 내 일에 참견하지 않는 남편도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가지 말라고 똑 부러지게 말리지도 않았다. 결국 시어머니에게 일주일간 아이들을 부탁하고 광저우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해 보니 내가 고민했던 일들은 모두 기우였다. 중국에 들어와 사업을 하고 있는 문 사장은 첫눈에 보아도 품격 있는 사람이었다. 내 숙소도 나를 배려해 호텔로 잡지 않고 아들 내외가 사는 아파트에 방 하나를 내어주었다.


관우를 좋아한다는 문 사장은 매일 이곳에서 참배를 드렸다.


첫날 낯선 곳에서 잠을 자느라 안 그래도 잠을 설쳤는데 새벽부터 난데없는 닭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곳은 아파트에서 닭을 기르는 집이 많았다.


닭은 새벽뿐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댔다. 아파트는 신축이라 꽤 인테리어가 고급졌는데 화장실은 역시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수세식이었다.


날이 밝자 아들 내외와 함께 차를 타고 공장으로 출근했다. 거기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전 일이 끝나면 문 사장은 나를 데리고 맛있는 음식집으로 안내했다.


역한 향신료 때문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부터 나를 딤섬집으로 데리고 갔다. 딤섬은 종류가 많아서 입에 맞는 몇 가지를 가져다 먹었다.


일은 오전에만 하고 오후에는 여행을 다녔다. 처음 본 사람인데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밴 듯 편안했다. 여행을 다니는 중에도 한국에서 함께 들어온, 공장에서 경리를 본다는 딸이 항상 동승했다.


마치 내 마음을 다 읽은 듯한 배려에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간단한 것은 메모하고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은 녹음했다.


“기왕에 중국 오셨으니까 경치는 구경하고 가셔야지요.”


문 사장은 항주의 서호를 비롯해서 이곳저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항공비와 숙박비, 먹는 비용, 관광비용 게다가 계약금에 앞으로 받을 잔금을 생각하니 이렇게 좋은 일이 세상에 있을까 싶었다.


4살짜리 딸이 재롱잔치에서 첫 공연을 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솔직히 그것 빼고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아래의 글은 문 사장이 말한 것을 토대로 하여 내가 다듬어 글을 쓴 것으로 그가 책을 내는 이유와 중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글이라 정리해 보았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동안 살아온 나날들을 뒤돌아보고 정리하는 데 의의가 있지만 실은 남의 나라에서, 특히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리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중국으로 들어와 사업할 때가 떠오른다. 중국에 와서 가장 먼저 알게 된 사실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믿을만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현실이었다.


중국 사람은 물론이요, 한국에서 믿고 보낸 사람도 숨기고 속이기에 혈안이었다. 중국에 도착한 뒤 한국에서 온 경리담당자에게 장부를 내놓으라고 하니 그는 그대로 다 팽개치고 사라져 버렸다.


또 한국에서 온 공장 책임자가 휴가를 달라고 하여 며칠 주었더니 그 길로 소식이 감감이었다. 도무지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중국어를 못하니 책임자는 반드시 한국 사람이어야 했다. 또 중국의 현실을 모르는 나로서는 책임자가 말하는 것을 100% 믿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중국에서 사업하면서 중국어를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눈 뜨고 코를 베어가도 가만히 서서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책임자들은 어떻게든 나를 속여서 한탕 한 뒤 그 일이 들통날 즈음이면 안개처럼 사라졌다. 혹은 암암리에 거래를 성사시키는 등 회사는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언제나 내 눈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입속의 혀처럼 굴었기에 나는 이렇게 당하고 저렇게 당할 뿐이었다.


나중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통역을 대동하여 내가 직접 나섰다. 거래업체 사장들을 한 명씩 만나서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테니 지난 것은 차차 갚아나가기로 하고 새롭게 거래를 텄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자 비로소 회사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직접 관리하면서 회사가 잘 굴러가자 쫓겨났던 경리과장이 협박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거금을 주지 않으면 과거의 경리 부서 문서를 혜관(경찰)에 고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는 내가 믿었던 사람으로 한국에서 골라 중국으로 보낸 사람이었다. 철석같이 믿었기에 중국까지 보냈더니 한탕 거하게 해 먹고는 내가 비리를 파고들자 회사를 떠났다.


나이도 고작해야 자식뻘밖에 안 되는 직원이었는데 달래야 할지 정면으로 부딪쳐 볼 테면 해보라고 이를 악물던지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잡아다가 분이라도 풀리게 실컷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나 내 마음을 알겠구나 싶은 심정으로, 피눈물을 삭이면서 참고 또 참았다.


그런 순간 내가 견디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가족들을 생각해서였다.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나는 매일 참선으로 마음을 달랬다. 이제 60고개를 힘겹게 넘겼고 거기서 또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을 부리겠으며 과욕을 부린들 또 무엇하랴? 나는 인생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나 자신을 추슬렀다.     


오늘 여행기는 약간 샛길로 빠져나간 글이 되었다. 그러나 혹여라도 자서전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나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썼으니 널리 양해를 바란다.      


-본격적인 여행기는 다음 호에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