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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Oct 17. 2024

어느 하숙집 저녁의 기억 한 토막

쉬어가는 글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이번 주 글을 못 올리게 되었습니다.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입니다.

다음 주에 본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꾸벅~



어느 하숙집 저녁의 기억 한 토막     


스무 살 무렵, 가장 인상 깊었던 어느 날 저녁에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날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하숙집으로 들어온 나는 무척 피곤했습니다.  분명히 뜨거운 커피라고 해놓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나를 바보 취급하던 손님, 5잔을 시켜놓고 4잔이라고 박박 우기더니 버릴 거면 도로 달라고 하던 손님, 오늘따라 커피를 늦게 준다고 짜증을 부리는 ‘진상 손님’이 왜 그리 많은지…….     


나는 뒤돌아서서 연신 열여덟을 외쳤습니다. 솔직히 주문한 커피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저들과 달리, 지성인이기에 애써 마음을 다독였답니다.      


씻지도 않고 좁은 침대에 대자로 뻗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뭔가 편하지 않은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간밤 꿈자리가 사나워서 오늘 운 나쁜 일이 일어날까 온종일 조심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수상했거든요. 왜냐하면 무례한 손님 정도로 끝낼 꿈이 아니었으니까요.      


솔직히 대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무언가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걸음조차 사뿐사뿐 걸어 방으로 들어왔답니다.      


‘우당 탕탕탕, 쿵쾅.’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갑자기 무언가 집어던지고 다급하게 뛰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 나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렇지만 불안한 마음에 방문도 열지 못하고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깥이 어수선하면 하숙생들이 나와서 웅성거릴 만도 한데 이곳 사람들은 오히려 거북이처럼 얼굴을 감추고 잔뜩 웅크립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조용한 바깥이 궁금해서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살짝 열었습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또 주인집 아줌마가 아저씨를 잡으러 쫓아나간 모양입니다.


그러나 집을 빠져나간 아저씨가 주인아줌마 손에 잡혀 올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숙비가 밀린 하숙생은 빨리 몸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사실 지난달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줌마가 아저씨를 잡으러 씩씩거리고 나간 뒤 악에 받쳐 하숙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잠옷 위에 손에 잡히는 대로 윗옷을 걸쳐 입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습니다.      


길 건너에 있는 로드쇼에 가서 비디오나 보며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아주머니가 잠든 새벽녘에 하숙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드쇼 앞에서 하숙집 사람을 세 명이나 만났답니다. 마치 반상회라도 하듯이 모두 잠옷 비슷한 옷에 점퍼 하나를 걸쳐 입고 한결같이 담배를 피워 문 꼴들이 우스워서 나는 하마터면 ‘박장대소’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아줌마가 무섭지 않습니다. 밀린 하숙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쾅’ 하고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씩씩거리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놈의 영감탱이, 들어오기만 해 봐라. 그동안 갖다 버린 돈만 해도 벌써 집이 두 챈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아이고 내 팔자야.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아줌마는 숨을 죽이고 방에 앉아 있는 하숙생들을 상대로 소리쳤습니다.     


“자기 밥벌이도 못 하는 사내놈들은 모두 가위로 불알을 잘라버려야 해.”     


덩치 큰 아줌마는 그 뒤로도 입에 담지 못할 거친 말들을 마구 쏟아냈습니다. 마치 자기 남편이 경마장에 돈을 갖다 버리는 것이 하숙집에 죽치고 있는 백수건달들 잘못이라도 되는 양 억지소리를 하면서 말입니다.     


이쯤 되면 하숙생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렇게 떠들어도 분이 풀리지 않는 날은 아무 방문이나 벌컥 열어젖힐 것이고 그 방에서 뒹굴던 하숙생은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게 될 겁니다.      


한동안 팔자타령을 하던 아줌마는 문간방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더니 장 씨 아저씨 방문을 벌컥 열어젖힙니다.


거구의 아줌마가 문을 잡아당기자 있는 힘을 다해 문고리를 잡고 있던 장 씨는 그만 힘이 달려 방바닥으로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동안 밀린 하숙비는 내가 퉁쳐줄라니까, 지금 당장 짐 싸서 나가요.”     


아줌마는 오른손으로 대문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습니다.      


“아, 그동안 잘 참고 기다리더니 왜 이러슈, 며칠만 더 참으면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가 새로 생기니까 바로 뽑아다 드릴게요.”     


장 씨는 그동안 참고 기다린 김에 며칠만 더 참아달라고 아줌마에게 사정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기운이 센 아줌마는 빼빼 마른 장 씨의 멱살을 잡아 기어이 마당으로 끌어냈습니다.     


“아이고, 사람 잡네. 동네 사람들, 나 허리 부러졌어요. 얼른 119 불러줘요.”     


마당으로 끌려 나온 장 씨는 ‘그까짓 하숙비 몇 푼 밀렸다고 사람을 잡는다’며 요란한 비명으로 동정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줌마는 장 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친김에 박 씨의 방문까지 열었습니다.      


나는 반쯤 열린 방문 틈으로 조마조마하게 아줌마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직 주인아줌마가 박 씨를 마당으로 끌어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박 씨는 아줌마보다 몸집이 커서 아줌마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대거든요.      


사실 우리 하숙집에서 제일 골칫거리는 별 세 개를 달았다는 소문이 있는 박 씨입니다. 박 씨는 주인아줌마와 아저씨가 힘을 합쳐 쫓아내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오죽하면 박 씨를 방에 가둬놓고 엑스자로 대못을 다 박았겠습니까?      


그날 온종일 방 안에 갇혀있던 박 씨는 저녁 무렵 다른 하숙생들이 돌아와 못을 빼주자 제일 먼저 바지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평소 박 씨는 주인아줌마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이부자리를 펴고 드러누워 눈조차 뜨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날 잡아 잡수쇼’라는 배짱이었지요. 하지만 오늘은 주인아줌마의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 두 사람의 싸움이 볼만할 겁니다.      


누워있는 박 씨를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아줌마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제일 먼저 트렁크가 마당으로 던져졌고 그 위로 옷가지와 몇 권의 책들이 내팽개쳐졌습니다. 밥상 겸 책상으로 쓰는 작은 상도 산산조각이 나며 마당 이곳저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줌마는 박 씨가 덮고 있는 이불을 휙 걷더니 둘둘 말아 마당으로 던지고 베고 누운 베개까지 빼서 밖으로 던졌습니다. 아줌마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달리 완강해 보였습니다.


나머지 하숙집 사람들도 오늘은 기어이 박 씨가 하숙집에서 쫓겨나는구나, 하고 침을 삼키며 아줌마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았음을 느꼈는지 꿈쩍도 하지 않던 박 씨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말 없는 기싸움이 시작되었지요.


아무리 막무가내인 아줌마지만 명색이 별이 세 개인 박 씨가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면 움찔할 수밖에요.      


순간 하숙집 분위기는 긴장감마저 감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박 씨가 느닷없이 주인아줌마의 손을 덥석 잡는 니다.     


“누님, 미안하게 됐수다. 아무리 내가 양심 없는 놈이지만 누님 하숙비는 절대 안 떼먹을 테니 속는 셈 치고 딱 한 달만 더 참아주슈.”     


한바탕 행패를 부릴 줄 알았던 박 씨가 순순히 하는 말을 듣고 놀란 것은 주인아줌마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하숙집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줌마도 놀랐는지 기세가 한풀 꺾였고 사건은 그것으로 일단락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모처럼 마당 평상 위에 삼겹살과 함께 푸짐한 상추쌈이 올라왔습니다.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뜻에서 주인아줌마가 한턱낸 것이지요.      


가끔 주인아줌마가 심통을 부리기는 하지만 세상에 우리 주인아줌마같이 인심이 후덕한 하숙집 주인은 아마 또 없을 겁니다. 음식 맛도 단연 최고랍니다.      


하숙생들은 돈을 걷어 술을 사 오고 부어라 마셔라 하며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습니다.     


“잘들 들어.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내는 자기 밥벌이도 못 하고 빈둥거리는 남자야. 막노동을 해서라도 자기 밥벌이만큼은 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     


취한 주인아줌마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한 말을 또 하고 했습니다. 하기야 일자리만 있다면 빈둥거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인아줌마 말이 백번 옳지요.     


나는 처음으로 박 씨 아저씨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왠지 이 하숙집 사람들이 모두 우리 집 친척이고 가족같이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마음이 들뜨고 기분이 좋은 걸 보니 꿈도 가끔은 운명을 비껴가나 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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