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서는 만리장성이 단순히 외적을 막기 위한 성벽이 아니라, 괴물들로부터 제국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설정되었다.
주인공은 서양 용병으로 금을 찾기 위해 동방으로 왔다가 괴물과 싸우는 군대에 합류하게 된다.
영화 속 만리장성은 거대한 전투의 무대로 등장한다. 고대 중국의 군대가 괴물들과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지며, 만리장성의 웅장함과 역사적 상징성을 잘 살리고 있다.
장이머우 감독의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웅장한 전투 장면이 돋보이며 만리장성의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자금성(紫禁城, Forbidden City)
자금성은 베이징에 있는 황궁으로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들이 거주하던 장소다.
자금성은 중국 역사와 문화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했다.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1987)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Bernardo Bertolucci)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仪)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다.
푸이는 3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지만 청나라가 몰락하면서 자금성에서의 황제 생활을 마무리 짓는다.
이후 그는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의 역사적 격변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영화는 어린 푸이가 자금성 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을 시작으로 청나라의 몰락, 그리고 그 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황제 포스터와 영화 스틸
이 영화는 자금성에서 촬영된 최초의 영화로, 자금성 내부에서 푸이의 어린 시절과 황궁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자금성의 웅장한 건축물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이 영화 속에서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마지막 황제』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9개 부문을 수상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영화사에 남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자금성에서의 촬영과 세밀한 역사적 재현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웅 (Hero, 2002)』
감독: 장이머우 (Zhang Yimou)
『영웅』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진시황제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의 이야기를 다룬 무협 영화다.
영화는 여러 자객이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주인공 무명(無名)이 황제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금성을 배경으로 황제와 대면하게 된다.
자금성은 황제의 권력과 제국의 상징으로 그려지며 웅장한 궁궐의 모습이 중국 황실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영웅 스틸
이 영화에서 자금성은 강력한 제국의 중심지로 묘사되며 영화의 결말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 영화는 장이머우 감독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웅장한 배경이 돋보이는 영화로 시각적 아름다움이 극찬을 받았다.
자금성의 장엄한 배경은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주었다.
『연인』 (House of Flying Daggers, 2004)
감독: 장이머우 (Zhang Yimou)
『연인』은 당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반란군 단체인 비수단(飛刀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무협 멜로 영화다.
주인공 진과 소매가 반란에 휘말려 생긴 사랑과 배신, 그리고 권력 투쟁을 다루었다.
연인 포스터와 스틸
자금성은 영화 속에서 황실과 권력의 상징으로 묘사되었다.
직접적으로 자금성 내부가 주요 배경이 되지는 않지만, 자금성의 권력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반란군의 저항은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는 중요한 설정으로 작용하였다.
자금성은 당나라 황실과 그 권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배경으로 활용되었다.
북경 여행기
첫날 우리가 간 곳은 주로 거리 투어였다.
값이 싼 패키지여행은 주로 입장료가 저렴하거나 없는 곳을 많이 간다더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렇지만 볼거리는 많았다.
북경 거리 투어
북경의 거리 투어는 상업 거리로 유명한 왕푸징 거리, 전통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난뤄구시안, 북경의 대표적인 예술 거리로 다양한 미술관과 갤러리 등이 있는 798 예술구 등이 있는데 거의 다 가지 않았나 싶다.
중국 거리투어
그리고 우리가 간 곳은 라텍스 상점이었다. 우수 사원 아주머니들은 라텍스 침대에 눕더니 일어설 줄을 몰랐다. 내가 보기에도 제품이 좋아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 아주머니는 침대가 너무 좋아 잠이 들었다고 한다.
아주머니들이 침대 위에서 뒹구는 동안 우리 따님은 어디선가 오리 라텍스 방석을 들고 와서는 사달라고 졸랐다.
가격을 물어보니 장난감 같은 방석이 꼴에 라텍스라고 15만 원이었다.
나는 따님의 두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 보며 강력하게 도리질을 했다.
15,000원이면 장난감 사 주는 셈 치고 사 주겠지만 15만 원짜리 방석은 오버였다. 게다가 환율까지 생각하면 중국 제품치고 매우 비싼 가격이었다.
안 그래도 시간은 자꾸 가는데 아주머니들은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따님은 옆에서 징징거리고, 그렇다고 여행 와서 화는 낼 수 없고 잠시나마 내 몸에는 사리가 쌓여갔다.
겨우 라텍스 상점에서 나와 간 곳은 왕푸징 먹거리 골목이었다.
시장에는 과연 저걸 먹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생긴 먹거리가 많았다.
왕푸징 먹거리 거리
전갈튀김, 개구리튀김은 얌전한 음식이었다.
난생처음 본 곤충을 튀겨놓은 것도 있었는데 징그러워서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정말 이렇게 먹을 것이 즐비한 시장은 처음이었다.
먹거리를 본 딸의 마음은 어느새 봄눈 녹듯 풀렸다. 시장에 도착하기까지는 내가 오든지 말든지 뒤도 안 돌아보고 걷더니 겨우 꼬치 하나에 웃음꽃이 피었다.
저녁은 북경 오리를 먹으러 갔다. 분명히 특별식이라고 쓰여 있었기에 드디어 맛있는 요리를 한 끼는 먹나 보다 싶었다.
그러나 1편에서 언급했듯이 오리가 통째로 나오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너무 야무진 꿈이었다.
동네 마트에서 파는 슬라이스 오리가 접시 바닥을 겨우 덮고 있었다.
결국 가이드와 의논 끝에 우리는 1인당 100달러를 더 지불하고서 다음 날부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둘째 날은 자금성과 이화원을 둘러보았다.
자금성은 천안문광장 바로 뒤에 있었다. 이곳은 공안이 무척 많았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분위기였다.
자금성 입구, 사람들이 많았다.
유명 관광지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언젠가 중국 연휴가 끼어 있는 10월에 관광객이 한꺼번에 몰려 자금성으로 들어가려는 인파가 압사해 몇십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뉴스를 보면서 관광을 갔다가 사람에게 떠밀려 압사당할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도 나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말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잘못 맞추면 사람들에게 떠밀려 저절로 걸어야 하는 곳도 있었다.
자금성 전경
우리가 여행했을 때는 11월 중순이라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고 단풍관광은 거의 끝날 즈음이었다.
더군다나 학생들은 대부분 학기 중이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사람이 몰려들다 보니 운이 나쁘면 일정한 날에 사람이 한꺼번에 몰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금성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아수라장이었다. 저마다 깃발을 든 가이드 앞에 적게는 대여섯 명 많게는 30명씩 가이드를 따라다녔다.
자금성은 워낙 규모가 커서 잘못해서 한눈을 팔았다가는 출입구가 어딘지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어미 잃은 새끼 오리가 되지 않기 위해 가이드가 든 깃발을 중심으로 뭉쳐 다녔다. 확실히 개인 여행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없었다. 사진을 찍다 보면 어느새 가이드의 깃발이 보이지 않았다.
딸이 그나마 중간에서 컨트롤을 잘해주었으니 망정이니 나 혼자 미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불을 대비해 물을 담아놓은 항아리
자금성 안에는 모두 980개의 건물이 있다고 했다. 출입문은 동쪽, 서쪽, 남쪽으로 나 있고 황제의 거처인 북쪽은 출입문이 없다.
군데군데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불이 날 경우를 대비하여 물을 받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니 궁금한 것은 바로 물어볼 수 있어 좋았다.
자금성 전경
이화원
규모가 어마어마한 자금성을 나와 이화원으로 향했다.
이화원(頤和園, Summer Palace)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대규모 황실 정원으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다.
청나라 시기에 건설된 이화원은 중국 황실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확실히 이곳은 자금성보다 건물이 더 아기자기하고 자연경관이 뛰어났다.
이화원은 원래 1153년 금나라 시기부터 존재했지만, 지금의 형태로 정비된 것은 1750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이다.
건륭제는 이곳을 황실의 여름 휴양지로 조성하면서 여러 인공 호수와 산을 만들고 화려한 궁전과 정자를 세웠다.
이화원 내부
이화원 건물
이곳도 우리의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186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한 차례 파괴되었다.
이후 서태후(西太后)가 1888년에 이화원을 다시 복원하고 확장하여 여름철 휴식처로 사용했다.
이화원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바로 곤명호(昆明湖)였다.
곤명호는 이화원 중심에 있는 거대한 인공 호수로 이화원 전체 면적의 약 3/4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곳은 아름다운 서호(西湖)의 경치를 모방해 만들었다.
이화원 곤명호, 늦가을이라 운치가 있었다.
호수에서 배를 타고 유람할 수 있으며 호수 주변에는 다양한 정자와 건축물들이 있었다. 물론 우리 투어에 배를 타고 유람하는 관광은 없었다.
곤명호 북쪽에는 인공 산으로 만들어진 만수산(萬壽山)이 있다. 이 산은 곤명호를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산 정상에 황실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는데 그중 불향각(佛香閣, Buddha Incense Tower)은 이화원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화원 내에서 유명한 산책로인 장랑(長廊)도 특이했다.
이곳은 길이가 약 728m에 달하는 긴 복도인데 기둥이 있고 지붕으로 덮여 있다.
각 기둥과 천장에는 정교한 그림과 조각이 새겨져 있어 중국 전통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서태후는 이 장랑을 따라 산책하며 휴식을 즐겼다고 한다.
장랑을 따라 산책하다 보니 잔인하기로 소문난 서태후가 떠올라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장랑을 걷다보면 볼 그림이 많다
서태후는 이화원 복원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는데 이로 인해 당시 국가 재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화원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둘째 날도 역시 쇼핑을 빼놓을 수 없었다. 이날 간 곳은 보이차를 파는 곳이었다.
허리가 한 줌도 안 되는 여인이 우아한 중국옷을 입고 우리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무조건 먹어 보고 사라는 일종의 호객행위였다. 한국말도 얼마나 조곤조곤 잘하는지 한국인을 데려다가 중국옷을 입혔나 싶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보이차
보이차가 좋다는 말은 나도 들었고 여주인의 설명에 혹하기도 했다.
“저는 따로 다이어트 안 합니다. 꾸준히 이 보이차만 먹고 있어요. 자, 차를 마시고 나니 어떠신가요? 어떤 분은 바로 그 자리에서 효능을 보여서 화장실을 들락거리시기도 하는데요.”
보이차는 실제로 다이어트 성분이 있어서 몸에 있는 기름기를 줄여준다고 한다. 석류처럼 체지방 분해에 도움을 준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가격은 오래될수록 비쌌다.
“보이차는 다이어트뿐만 아니라 항암 효과도 있어요. 보이차의 핵심 성분은 갈산인데 폴리페놀의 일종인 갈산은 몸 안에 지방이 쌓이는 것을 억제하고 몸속에 과다하게 쌓인 체지방을 배출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 몸으로 들어온 지방을 분해해 체내 흡수를 방해하고 체외로 배출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화장품 회사 아주머니들은 화장을 잘해서 얼굴은 화사했지만, 몸매는 자신이 없었는지 보이차를 사기 시작했다.
모두들 한국에 돌아가 선물할 보이차를 사는 동안 우리 따님도 역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서 보니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에 담긴 보이차를 가리키며 우리도 사자고 했다. 나는 다시 따님의 어깨를 잡고 눈을 바라보며 격하게 도리질을 했다. 따님은 반항했다.
“집에 가면 내가 돈 줄게.”
그러나 이 말에 한두 번 속아본 내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너 수첩 꺼내서 여기서 살 것 체크해 봐. 이제 내일 백화점에 갈 건데 거기서 아무것도 안 산다면 내가 이거 사 줄게.”
한참 생각하던 딸은 입이 댓 발 나와 다시 나를 모른 체했다.
나는 이미 보이차를 현지인들이 관광객들에게 어떻게 파는지 공부를 많이 하고 왔다.
우리에게 처음 따라 준 보이차는 아주 값비싼 제품이 분명했다. 정말 한 잔만 마셔도 효능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막상 권하는 보이차는 집으로 가져와 한 통을 다 마셔도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진품이 아닐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이 권하는 보이차는 24년 전에 만들었다는 보이차였다. 값은 1,600위안, 우리 돈으로 거의 30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이었다.
“이 보이차는 구하기 힘든 겁니다. 보이차는 오래 둘수록 구수합니다. 그리고 이 가격은 도매가격이에요.”
그러나 오래된 보이차는 모두 정부에서 사들인다고 들었다. 정말 좋은 제품은 150만 원이 넘는 것도 있었다.
한 여행객이 남긴 후기를 보았다. 주인 여자가 좋다고 권한 24년 산 보이차는 3년에서 5년 정도 된 보이차로 가격은 50위안(만원)을 넘지 않는, 무려 30배 이상 바가지를 썼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물론 복불복으로 질 좋은 보이차를 구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나는 이곳에서 파는 보이차가 정말 좋은 보이차라면 좋겠다고 빌었다.
하긴 원효대사도 해골 물을 마시고 해탈했으니 몸에 좋다고 믿고 먹으면 그만큼 효능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셋째 날은 만리장성을 갔다.
만리장성 중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는 베이징 부근의 팔달령 장성(八達嶺長城)이다. 이곳은 베이징에서 그리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관광객들
유럽 사람들은 만리장성을 오를 때 절대로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올라간다고 한다.
나도 시간만 주어진다면 천천히 걸어서 올라가고 싶었다. 말로만 듣던 만리장성에 와서 사진만 찍고 내려가기는 싫었다. 그러나 우리 투어는 케이블카를 타야 했다.
날씨가 생각보다 추워서 옷을 따뜻하게 입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만리장성의 모습은 웅장했다.
이곳은 많은 모험가와 등산객들이 명예의 등반(Honorary Climb)에 도전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만리장성 명예의 등산은 만리장성 전체를 도보로 횡단하는 탐험으로 많은 시간과 체력이 필요하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전체를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개인의 속도와 체력, 날씨 조건 등에 따라 보통 1년에서 2년 정도가 소요된다.
만리장성의 지형은 매우 험난하고 다양한 지역을 통과하기 때문에 속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만리장성을 오르는 관광객
하루에 20km를 걸어도 전체를 걷는 데 약 2년 이상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는 매우 힘든 탐험이기 때문에 휴식 시간과 준비 작업을 반드시 해야 한다.
윌리엄 린지(William Lindesay)는 만리장성 횡단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영국 출신으로 1987년에 만리장성 도보 횡단에 성공했다. 린지는 약 2,5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을 78일 동안 걸어서 횡단했다.
이 도전은 전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만리장성 탐험과 보존에 관한 여러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엘리사 자벨라(Elisa Zappella)가 만리장성 전체를 도보로 횡단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녀는 약 16개월 동안 만리장성 전 구간을 걸어서 횡단했다고 한다.
참 대단한 인물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오른 산 중에 가장 힘들었던 산은 지리산인데 만리장성을 종주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존경심까지 일었다.
위대한 건축물에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피와 땀이 함께 뒤엉켜있다.
역사학자들의 발표에 따르면 만리장성을 축조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은 적어도 수십만 명에서 많게는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게 되면 자신이 작업하던 장성 근처에 묻혔다.
과연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은 어떤 사람의 희생이 함께했을까 생각하니 왠지 숙연해졌다.
이날도 관광 중에는 어김없이 진주 가게로 안내되었다. 진주의 크기와 모양에 비해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이곳에서 우리 따님이 들고 오는 제품은 목걸이든 귀걸이든 하나 사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따님이 역시 물건 하나를 집어 왔다. 그런데 딸이 들고 온 것은 목걸이, 귀걸이, 팔찌도 아닌 비닐 속에 크고 작은 진주가 들어있는 원석이었다.
“엄마, 이것도 안 돼?”
“그건 뭔데?”
“진주알이잖아.”
“기왕 사려면 완제품을 사지 왜 알을 사?”
“이 알이면 목걸이, 귀걸이, 팔찌를 몇 개 만들 수 있어.”
“그걸 네가 만든다고?”
“나 잘 만들어. 지난번에도 바자회 때 만들어서 팔았잖아.”
그러고 보니 딸이 교회에서 바자회를 할 때 동대문시장에서 원석을 사다가 주얼리를 만들어 팔아 기부금을 낸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뭘 들고 오든 하나는 사 주려고 마음먹었는데 이제야 딸이 제정신이 들었나 보다.
“얼마야?”
“이거 다해서 오만 원이래.”
나는 두말하지 않고 오만 원을 꺼내주었다. 딸은 신나서 계산대로 뛰어갔다.
저녁에는 선택 관광으로 금면왕조 연극을 보러 갔다.
금면왕조(金面王朝)는 화교성에서 제작하고 중국 최고의 감독, 작가, 무대미술, 조명, 음악프로듀서, 패션디자이너 및 200명의 중국 내외의 우수한 배우들이 함께하는 초대형 블록버스터 명품뮤지컬이다.
과연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연극이었다.
금면왕조
금면왕조는 한 소녀가 책을 읽다 잠이 들고 꿈을 꾸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중국 고대 신화를 각색한 것으로 전쟁, 상전(桑田), 단조(锻造), 경전(庆典), 월하(月下), 홍수, 제천, 환화(幻化) 등 8막으로 구성되었다.
옛날에 여자들만 사는 금면왕국이 있었는데 금빛 가면을 쓴 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금면왕국 이웃에는 남자들만 사는 남면왕국이 있었다.
어느 날 남면왕국에서 금면왕국을 침략하면서 두 나라 간에 전쟁이 발생했다. 그러나 승리는 금면왕국이 쟁취했다.
그 과정에서 남면왕국의 왕과 병사는 포로가 되지만 금면여왕의 어진 정치와 착한 마음 때문에 남면왕국의 왕은 새 사람이 되었다.
후일 포로에서 풀려난 남면왕국의 왕은 금면왕국의 여왕과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어느 날 하늘의 재앙으로 큰 홍수가 발생하고 그 재앙을 막기 위해 금면왕국의 여왕은 신의 뜻대로 하늘에 자신의 몸을 맡겨 죽는다.
그러나 죽었던 여왕이 다시 태양조로 환생하여 금면왕국을 날아다니며 영원히 지켜준다는 내용이다.
가장 압권은 무대에 홍수가 발생하는 장면이 재현되는 내용이었다. 출렁거리는 물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려 관객을 뒤덮을 듯 생생했다.
무대에서 흘러내리는 물
역시 중국은 스케일이 커서 연극도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다.
다음 날은 마무리로 비단을 파는 곳에서 쇼핑했고 자유시간을 주어서 딸과 나는 백화점에서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을 구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