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인종 차별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잔인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샤일록과 사랑과 우정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거래를 하는 안토니오와 그의 친구 바사니오, 연인 포셔의 이야기다.
물론 샤일록의 재산을 훔쳐 도망친 딸과 몇몇 등장인물이 존재감 있게 등장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안토니오가 보증 선 빚 대신에 살 1파운드를 베어가겠다는 샤일록의 복수와 그 복수가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 전 재산을 빼앗기고 종교까지 개종해야 하는 재판의 결과다.
<베니스의 상인> 책
결론적으로 이 책은 안토니오 편에서는 희극이지만 샤일록의 편에서는 비극인 작품이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을 탐욕적이고 냉혹한 인종으로 알고 있었기에 작품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유대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베니스의 상인>이 쓰인 시기는 1596년 경이며 1600년에 초판으로 발행되었다.
<베네치아의 과거와 현재>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베네치아는 120여 개의 섬과 400개의 다리, 그리고 그 섬들을 연결하는 150여 개의 운하로 이루어져 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가히 환상적이다. 흔히 베니스(Venice)로 부르는데 이는 영어식 발음이며 이탈리아어로는 베네치아(Venezia)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
베네치아 구도심 쪽에는 유명한 관광지와 숙박시설이 대부분이며 현지인들은 육지 쪽의 신도시에 살고 있다.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 역시 신도시에 있다.
구도심은 도시 전체에 수로가 뚫려 배를 타고 다닌다. 입구 쪽 로마광장에 기차역과 버스, 택시가 있는데 베네치아 구도심 내부에는 자동차 도로가 없다. 이곳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벌금을 문다.
구도심 내의 이동 수단은 오직 수상버스(바토레토)와 곤돌라뿐이다. 택시(배)를 대절할 수도 있기는 하다.
앞이 뾰족한 곤돌라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 주로 번성했으며, 아드리아해에 접해 있는 전략적 위치로 인해 주요 해양 무역 강국으로 떠올랐다.
이곳은 유럽과 동양을 잇는 무역로의 교차점으로 아시아와 중동의 향신료, 비단, 기타 사치품을 거래하는 상인들의 중심지였다.
총독(상인과 귀족의 엘리트 계층이 선출한 인물)이 이끄는 체제에 의해 통치되는 베네치아는 유럽 본토를 괴롭혔던 봉건적 갈등을 대부분 피하고 대신 무역과 외교에 집중했다.
도시의 부(富)는 이 도시를 예술과 건축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틴토레토, 벨리니와 같은 유명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번성하여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는 황금기를 이루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성모승천(1516~1518)-자료 나무위키
베니스의 쇠퇴는 16세기에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향하는 새로운 무역로가 지중해를 우회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이곳은 1797년 나폴레옹이 정복할 때까지 문화적, 예술적 안식처로 남아 있었다.
베니스 카니발
정교한 가면으로 유명한 카니발은 사회 계층이 익명으로 어울릴 수 있는 축제로 시작되었다. 이 가면은 베니스의 신비롭고 예술적인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이 카니발로 인해 문란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베니스 카니발
탄식의 다리
탄식의 다리는 총독의 궁전과 감옥을 연결하고 있다. 수감자들은 선고를 앞두고 베네치아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신기한 물속 건물의 설계
베네치아는 물 위에 세워진 도시다. 처음 이곳은 아드리아해 연안의 습지대에 있어 해수면이 낮고 잦은 침수로 사람들이 살기 어려웠다.
강물이 흘러들어와 퇴적물이 쌓이자 작은 섬들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섬들은 물로 둘러싸여 있어 오히려 외부의 침입을 막는데 도움이 되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건물을 지을 때, 물속에 나무 말뚝을 촘촘하게 박아 땅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물속에 박힌 말뚝은 시간이 지나면 썩거나 부식되었기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교체해야 했다.
벽은 벽돌을 사용했고 지붕은 경사지게 만들어 빗물이 쉽게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집에 창문이 많은 것은 건물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다.
베니스의 집들
또한 그들은 섬과 섬을 연결하기 위해 물길을 내고 배를 이용하여 이동했다.
현재 베네치아는 말뚝이 썩거나 지반이 약해지면서 많은 고심을 하고 있다. 시는 말뚝을 보강하고 해수면 상승에 대비해 방조벽을 건설하고 있다.
또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침수 위험도 커지고 있다. 거기에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환경이 나빠져 현재는 관광세를 받고 있다.
베네치아는 오랜 시간 동안 물 위에 떠 있는 도시로서 독특한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켜 왔다. 곤돌라, 산 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대성당, 리알토 다리, 유리공예의 섬 무라노, 알록달록한 집이 모여 있는 부라노 등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건축물과 문화유산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베니스의 상인> 줄거리
부유한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절친한 친구 바사니오가 보증을 부탁한다.
바사니오는 벨몬테의 부유한 상속녀 포셔를 사랑하게 되어 청혼하러 가는 데 돈이 필요했다.
마침 안토니오의 배가 모두 출항하여 그는 배가 돌아와야 돈이 생겼다. 안토니오는 바사니오의 보증을 서기로 하고 두 사람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간다.
안토니오는 평소 샤일록을 경멸하고 무시했으며 얼굴에 침까지 뱉으며 대놓고 비난했다. 또 샤일록에게 돈을 빌려 갚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이지로 돈을 빌려주어 갚도록 도왔다.
샤일록은 사업을 방해하고 자신을 벌레처럼 경멸하는 안토니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 안토니오가 돈을 빌리러 오자 샤일록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삼천 두카트를 빌려주는 대신 이자는 받지 않겠다, 다만 정해 놓은 시간까지 돈을 갚지 못하면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가져가겠다는 조건이었다.
출항한 배가 돌아오면 돈을 갚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안토니오는 흔쾌히 응했다.
여러 종류로 나온 <베니스의 상인> 책
한편 바사니오가 사랑하는 포셔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정해 놓은 조건에 따라 신랑감을 맞아야 했다. 아버지는 금, 은, 동으로 만든 궤를 만들어 그 안에 적힌 대로 결혼해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많은 구혼자가 금궤와 은궤를 골랐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 바사니오는 동으로 만든 궤를 골라 그녀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고 증표로 포셔의 반지를 받았다.
그때 약속한 날에 빚을 갚지 못한 안토니오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토니오의 배가 태풍으로 가라앉아 돌아오지 못했고, 샤일록은 계약 이행을 요구하는 재판을 열었다.
바사니오는 급히 베니스로 돌아왔다. 그는 법정에서 포셔가 준비해 준 돈으로 3배에 달하는 빚을 갚겠다고 하지만 샤일록은 법대로 하겠다고 우긴다.
판결이 나는 날, 법정에 법학 박사(판사)로 변장한 포셔가 등장한다. 그녀는 계약대로 살을 도려내라고 판결한다. 샤일록이 칼을 들고 안토니오에게 다가가는 순간 법학 박사가 말한다.
“계약서는 당신에게 피 한 방울 주지 않소. 명시된 문구는 ‘살덩이 1파운드’요. 그러니 계약대로 살덩이 1파운드를 가지시오. 그러나 살을 잘라 낼 때 기독교인 핏물을 한 방울만 흘려도 당신 땅과 재산은 베니스 국법에 의하여 베니스 정부로 몰수될 것이오. 피 흘리지 말 것이며, 정확히 1파운드 이상도 이하도 자르지 마시오. 만약 저울이 머리카락 한 올의 예상치만큼만 기울어도 당신은 죽을 것이고 재산은 다 몰수되오.”
솔로몬의 재판을 뺨치는 판결 덕분에 안토니오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때마침 태풍에 침몰했다던 안토니오의 배가 돌아오며 극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안토니오가 빌린 3천 두카트는 얼마일까?
샤일록이 가져가겠다는 살 1파운드는 그램으로 환산하면 약 450g이다. 이 정도 살을 베어내겠다는 것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두카트의 앞면과 뒷면
그리고 안토니오가 빌린 3천 두카트는 꽤 큰돈이다.
당시 베니스에서 1 두카트는 순금 3.5그램으로 거의 한 돈에 해당한다. 현재 순금 한 돈은 452,488원으로 대충 계산해도 15억에 달한다.
중세 피렌체 시민들의 1년 생활비가 집세 제외하고 15~20 두카트 정도였으며 유럽 최고 부자로 유명했던 메디치가의 총재산이 20만 두카트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거액을 무담보 신용으로 빌릴 정도면 목숨을 걸 각오를 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유대인은 왜 박해받았나?
역사 전반에 걸쳐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종교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요인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비롯되었다. 그 이유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지만, 반복되는 주제에는 종교적 편협함, 위기 상황에서의 희생양, 사회적 소외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근본 원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선민사상
초창기 유대인이 살았던 이스라엘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따로 선택했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너희들과 달라’라는 자부심이었다. 이후 예수가 나타났을 때 예수의 이념은 그들의 선민사상과 달랐다. 예수는 ‘모두가 똑같다’라는 평등사상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그리스도>-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지료-위키백과)
또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결코 나약한 모습의 예수 같은 인간이 아닌 대단한 영웅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기독교 반유대주의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는 유대교를 경쟁 종교로 여겼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거부했다는 이유로 종종 비난받았고, 이는 예수의 십자가형(죽음)에 공동 책임이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신학적 비난은 교회의 가르침, 설교, 예술을 통해 전파되었다.
유대인에게 식별 배지를 착용하도록 강요하거나 직업을 제한하는 등 유대인을 소외시키는 공식 교회 법령도 있었다.
이슬람 상황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유럽보다 이슬람 통치하에서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물론 이슬람 율법에 따라 생활하는 비무슬림일 경우에 한해서였다. 그들은 차별적인 세금과 제한을 받았으나 일반적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자금 대출과 고리대금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 교회는 기독교인들이 대출금에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는 고리로 알려진 관행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제한에 얽매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토지 소유, 길드 가입, 공직 보유가 금지되어 사회적, 경제적으로 더욱 고립되었다.
다른 직업을 선택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기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꺼리는 대금업자로 활동했다. 이러한 경제적 역할은 선택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탐욕스럽고 착취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했다.
군주에 의한 착취
통치자들은 종종 유대인 공동체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그들을 금융 중개자로 이용했다. 부채가 정치적으로 불편해지면 통치자들은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폭도들을 선동하여 부채를 탕감하고 인기를 얻었다.
에드워드 1세는 수십 년간의 재정적 착취 끝에 1290년 영국에서 유대인을 추방했다.
희생양과 음모론
전염병, 기근, 사회적 불안이 닥쳤을 때 유대인 공동체는 종종 희생양으로 비난받았다. 흑사병이 돌았을 때 상대적으로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유대인들은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되돌아와 유럽 전역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또 유대인의 법이나 관습에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 어린이들을 납치하고 그들의 피를 종교의식에 사용했다는 지속적인 음모도 따랐다. 이로 인해 폭도들의 폭력과 학살이 발생하기도 했다.
트렌트의 시몬(1475) 사례는 유대인 공동체가 어린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광범위한 박해를 받았던 경우다.
사회적 소외-게토에서의 격리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들은 게토라고 알려진 분리된 동네에서 살도록 강요받았다. 이 지역은 혼잡했으며 통금 시간 및 기타 제한 사항이 적용되었다. 이러한 물리적 분리는 유대인을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는 역할을 했다.
담장을 넘거나 게토 지역 주민과 접촉하는 자는 총살이라고 적혀 있다.
정치적 요인
역사 전반에 걸쳐 유대인들은 여러 국가(1290년 영국,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되거나 포그롬(유대 공동체를 겨냥한 폭력 폭동)의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종종 권력을 강화하거나 내부 문제로부터 국민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고안된 정치적인 도구로 이루어졌다.
현대 반유대주의
19세기에는 유대인을 뚜렷하고 열등한 ‘인종’으로 분류하는 사이비 과학 이론이 등장했다. 종교적 반유대주의에서 인종적 반유대주의로의 이러한 변화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더욱 뿌리 깊게 만들고 맞서 싸우기 어렵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유대인 군 장교가 반역죄로 거짓 기소된 악명 높은 드레퓌스 사건은 광범위한 반유대주의 정서를 부추겼다.
나치 이데올로기와 홀로코스트
20세기에 아돌프 히틀러 정권은 수 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반유대주의 고정관념을 이용하여 홀로코스트로 정점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600만 명의 유대인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
나치는 유대인을 경제적 착취자이자 인종적 순수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어린이들
영국의 개입으로 전쟁 이어져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들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영토를 두고 영국이 개입한 까닭으로 비롯된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 이 지역에는 무슬림 아랍인, 기독교 아랍인, 유대인이 혼합된 인구가 살았다. 유대인 인구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시오니즘이 일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고 다양한 집단의 지원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는 지역 내 긴장을 고조시키는 모순된 합의로 이어졌다.
후세인-맥마흔 서신(1915~1916)
영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 지도자들의 지원을 대가로 독립을 약속했다. 메카의 셰리프 후세인은 당연히 팔레스타인이 미래 아랍 국가의 일부로 포함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해는 영국 군사 목표에 부합하는 오스만에 대한 아랍 반란을 장려했다.
사익스-피코 협정(1916)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영토를 영향권으로 나누는 데 비밀리에 동의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국제적인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밸푸어 선언(1917)
영국은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 설립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유대인은 엄청난 돈을 영국에 주었다. 즉 영국은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할 수 있도록 약속했고, 아랍인들에게 역시 팔레스타인 땅을 약속하는 이중계약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현주소
이 선언은 전쟁 중 특히 미국과 유럽의 영향력 있는 유대인 공동체의 지지를 얻기 위한 외교적 움직임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국제 연맹은 영국에 팔레스타인 통치 권한을 부여했다.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이행하는 동시에 아랍 인구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
밸푸어 선언을 이행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 이민 물결(특히 1930년대 나치의 부상 이후)이 몰려들자 긴장이 고조되었다. 많은 유대인 정착민이 토지를 구입했고, 돈 없는 아랍 소작농은 점점 쫓겨나기 시작했다.
1939년까지 유대인 인구는 1922년 약 83,000명에서 450,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이민이 허용되자 아랍인들은 분노했다. 졸지에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빼앗기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후 홀로코스트(Holocaust)는 나치의 잔학 행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으로 피난처를 찾는 등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세계적인 지원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은 이민 제한과 국제적 압력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으나 유대인 무장 단체는 영국군을 철수시키고 유대 국가를 확보하기 위해 영국군과 아랍 반대자들을 상대로 폭력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분쟁으로 지친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회부했고,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리하고 예루살렘을 국제 통제하에 두자고 제안했다.
유대인들은 그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이를 거부하여 폭력 사태를 더욱 심화시켰다.
영국은 불안정한 상황을 뒤로하고 1948년에 철수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자 이웃 아랍 국가들이 침공하여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영국의 잘못된 이중계약과 유대인과 아랍인의 이익 사이의 중재 실패는 분열을 악화시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토대를 마련했다.
1948년 전쟁으로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난민이 되었고 지속적인 긴장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땅을 차지하고 뺏기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
성공한 유대인
수 세기에 걸친 박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공동체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문화, 과학, 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과학 천재 아인슈타인, 영화 천재 스티븐 스필버그,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 석유 재벌 존 록펠러,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세계 1등 부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페이스북, 스타벅스, 인텔, 델 창립자가 모두 유대인이다.
<쉰들러 리스트> 영화포스터(스티븐 스필버그)
유대인이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0.2%, 그러나 유대인들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42%, 세계 억만장자의 30%에 달하며 미국 상·하원의 주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반유대주의의 역사적 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 시대의 편견에 맞서고 관용을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유대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베니스의 상인>
지금까지 쓴 글에 비추어 혹시 내가 유대인을 두둔하거나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쓴다는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노파심으로 한 마디 적는다. 결코 나는 유대인을 두둔하거나 그들의 입장에 선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고, 한 번쯤 이 문제를 지인들과 토론하고 싶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을 읽으면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베니스의 상인> 영화 포스터
유대인의 관점에서 <베니스의 상인>을 살펴보면 이 극이 반유대주의, 유대인 정체성, 그리고 르네상스 유럽의 더 넓은 사회적 역학을 어떻게 묘사하는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알 수 있다.
유대인 대금업자 샤일록이라는 캐릭터는 셰익스피어 시대 유대인의 고정관념과 정의, 자비, 편견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는 깊은 인간적 성격을 모두 구현하고 있다.
연극 속의 반유대주의
샤일록의 묘사는 셰익스피어 시대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에서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과의 연관성과 뚜렷한 종교적 정체성으로 인해 종종 의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소외되었다.
샤일록은 굴욕과 모욕을 당하는데, 문제는 안토니오가 샤일록을 경멸적으로 대하는 태도다. 이는 유대인이 역사적, 경제적 문제로 인해 비난받고 버림받은 존재라는 더 넓은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다.
샤일록의 인간성과 복잡성
샤일록은 종종 악당으로 전락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에게 심오한 인간미를 불어넣기도 한다.
“유대인은 눈이 없소? 유대인은 손도 없고, 오장육부도 육신도 없소? 감각도, 감정도, 격정도 없단 말이오? 기독교인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음식을 먹지 않고, 흉기에도 다치지 않으며, 같은 병에 걸리지도 않고 같은 방법으로 치료되지도 않으며, 똑같이 겨울에 추위를 느끼지 않고 여름에 더위를 느끼지 않는단 말이오? 우리 살점은 찔러도 피 흘리지 않소? 간질여도 웃지 않소? 독을 마셔도 죽지 않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복수하지 말아야 하는 거요?”
3막 1장에서 샤일록이 말하는 이 대사는 체계적인 비인간화에 맞서 공동 인류에 대한 강력한 주장이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대사는 억압에 맞서는 외침으로 들리며 청중이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도록 만든다.
종교적, 문화적 긴장
살 1파운드에 대한 샤일록의 요구는 종종 유대인의 율법주의나 탐욕을 문자 그대로 과장하여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의 시각에서는 이를 다르게 볼 수 있다.
소수자에 대한 정의를 거부하는 사회의 결과를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채권에 대한 샤일록의 주장은 자비와 공정성이 거의 적용되지 않기에 계약과 법에만 의존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그의 반응을 반영한다.
그가 결국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이며, 이는 기독교의 지배하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이 지워지는 것을 상징한다.
자비의 역할
자비 대 정의라는 주제는 재판 장면의 중심에 있다(4막).
포셔의 자비에 대한 간청, “자비의 질에는 무리가 없습니다”라는 정의에 대한 샤일록의 엄격한 요구와 대조된다.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샤일록이 연극 전반에 걸쳐 어떻게 대우받았는지를 고려할 때 자비에 대한 이러한 호소의 위선을 비판할 수 있다. 샤일록에게는 자비가 요구되지만, 유대인인 그에게는 자비가 거의 베풀어지지 않는다.
<베니스의 상인> 영화 포스터
역사적 맥락
셰익스피어 시대까지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300년 넘게(1290년부터)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일부 유대인은 영국에서 기독교인인 척 비밀 유대인으로 살았지만, 셰익스피어의 청중 대부분은 유대인과의 직접적인 경험이 거의 또는 전혀 없다. 따라서 샤일록의 성격은 실제 현실보다는 고정관념을 반영할 수 있다.
베네치아 배경은 유대인 공동체가 게토로 분리되어 직업이 제한되고 사회 문제의 희생양이 되었던 르네상스 유럽을 반영한다. 유대인의 독서는 이러한 제약 속에서 기능하는 샤일록이 직면한 체계적 불의를 강조할 것이다.
현대 유대인 해석
현대 작품에서 샤일록은 악당이 아닌 비극적인 영웅으로 재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그의 행동은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수 세기에 걸친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궁극적인 몰락은 개인적인 실패라기보다는 사회적 잔인함을 반영한다.
기독교인의 위선에 대한 비판
일부 유대인의 해석은 기독교인들이 샤일록을 향해 무자비하게 행동하면서 자비를 설교하는 아이러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생존의 상징
샤일록이 자신의 유대와 유대인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은 그를 지우려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결국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베니스의 상인>은 샤일록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현재 진행형의 편견과 그에 도전하는 것의 중요성을 조사할 수 있는 창이라 할 수 있다.
<베니스의 상인>을 읽은 후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포셔의 개입이다. 현지 재판관이 아닌 포셔가 변장을 하고 나타나 판결을 했다는 것은 사기에 가깝다. 그런 극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원고를 써도 될 텐데 왜 무리수를 두어 사기극을 연출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위대한 셰익스피어를 향한 작은 내 생각일 뿐이다.
셰익스피어 소개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극작가이자 시인 중 한 명으로 ‘에이번의 음유시인’으로 불렸다.
셰익스피어는 1564년 4월 23일, 잉글랜드 중부의 전형적인 소읍 스트랫퍼드어폰 에이번에 있는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에서 존 아든과 메리 아든 부부의 맏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 가공업과 중농을 겸한 데다가 읍장까지 지낸 유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층에 속해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나 1577년경부터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일을 도왔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서와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
11세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서와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스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그리 유창하지 않았다. 동시대 극작가 벤 존슨은 “라틴어도 별로고 그리스어는 더욱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셰익스피어를 조롱했다.
당시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고등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1580년대 후반에서 1590년경 수도 런던에 도착한 셰익스피어는 눈부시게 변한 런던 모습에 매료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이 통치하던 시기 런던은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몹시 붐비고 활기 넘치는 도시였다.
그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며 명성을 얻었고 영문학과 공연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
셰익스피어는 1594년부터 런던 연극계 양대산맥 가운데 하나인 궁내부장관 극단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
1590년대 초반 셰익스피어는 그가 쓴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5세>, <리처드 3세> 등을 런던 무대에서 상연했다. 그중 <헨리 6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599년 템스강 남쪽에 글로브 극장을 신축한 궁내부장관 극단은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국왕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 배우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 재능도 과시하여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와 <루크리스>(1594) 등 장시(長詩) 두 편을 발표했다.
1623년 벤 존슨은“그리스와 로마 극작가와 견줄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며 그는 어느 한 시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 사람이다”라고 극찬했다.
1668년 존 드라이든은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셰익스피어에게 찬사를 보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잉글랜드는 넘길 수 있어도 셰익스피어는 못 넘긴다.”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서 활동한 기간은 1590년~1613년까지 대략 24년으로 볼 수 있는데, 그는 희·비극 포함하여 총 38편을 발표했다.
셰익스피어는 생전에 ‘영국 최고의 극작가’ 지위에 올랐다.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처럼 인간 내면을 통찰한 걸작을 남겼으며, 그의 희곡은 인류의 고전으로 남아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총 38편의 희곡을 썼다.
비극: 햄릿, 오셀로, 리어왕, 멕베스 등
코미디: 한여름 밤의 꿈, 아무것도 아닌데, 십이야 등
역사: 헨리 5세, 리처드 3세, 헨리 6세(1부 및 2부) 등
로맨스, 후기극: The Tempest, Cymbeline, The Winter's Tale 등
소네트: 사랑, 아름다움, 시간, 죽음과 같은 주제를 탐구하는 154개의 소네트
서사시: 비너스와 아도니스, 루크레체의 강간.
그의 작품은 사랑, 권력, 야망, 배신, 정체성, 인간 본성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시대를 초월하여 탐구하고 있다.
결혼
셰익스피어는 18살이 되던 1582년에 18살 연상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수잔나, 쌍둥이 햄넷과 주디스라는 세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아내를 그리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세 아이가 태어난 후 곧장 고향을 떠나 7~8년간 떠돌아다녔는데 이 유랑기 시기의 행적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말년과 죽음
셰익스피어에 대한 첫 전기를 출간한 작가 니컬러스 로(Nicholas Rowe)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몇 년 전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1610).
1606년에서 1607년을 전후하여 셰익스피어는 몇 편 안 되는 희곡을 썼으나 1613년 이후에는 그의 창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없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3일에 아내와 두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셰익스피어 무덤
셰익스피어는 유언장에 두 딸에게 물려준 재산은 잘 보전하여 첫 손주에게 상속하라고 남겼다. 그러나 두 딸은 자식을 낳았으나 모두 결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결국 셰익스피어의 직계는 대가 끊기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유언에서 당시 법에 따라 재산의 3분의 1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을 아내 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한 마디를 남겼는데, 그것은 자신이 그녀에게 “나의 두 번째 좋은 침대”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셰익스피어는 고향의 성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안장되었다. 그의 흉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판단은 네스터와 같고, 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 예술은 버질과 같은 사람. 대지는 그를 덮고, 사람들은 통곡하고, 올림포스는 그를 소유한다.”
셰익스피어 책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은 1623년 극단 동료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셰익스피어는 생전에 이미 최대의 찬사를 받았고, 죽은 후에도 계속 숭앙의 대상이 되어 거의 신격화되었다.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이 “영국은 언젠가 인도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었다.
베네치아 여행기
베네치아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서울에서 숙박을 예약할 때 장소를 어디로 정할 것인지 고민이었다. 본섬, 그러니까 창문을 열면 바로 바닷가인 숙소를 예약하려면 최소 하루에 30만~50만 원의 숙박비를 내야 했다.
여러 후기를 보니 한 정류장 떨어져 있는 곳에 예약하고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면 가격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한 정거장 전에 있는 곳으로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플라자호텔이 너무 저렴한 가격에 나와 있었다. 우리는 3인이라 호텔을 이용하려면 최소 앞자리가 4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1 후반이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다시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4일을 예약했다.
호텔이 연식이 오래되기는 했어도 평수가 넓었다. 로마 호텔에 비하면 그야말로 운동장이었다. 게다가 조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베네치아 본섬까지는 버스로 한 정거장, 지하철도 한 정거장이었다.
우리는 조식을 거하게, 아니 배부르게 먹고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운동화 끈을 조였다. 본섬으로 들어가는데 버스는 꽤 긴 다리를 건넜다. 내려보니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핸드백을 어깨에 둘러 앞쪽으로 향하게 한 후 천천히 걸었다. 이곳도 소문난 소매치기 장소였다.
곤돌라
물에 떠 있는 도시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쪽배처럼 앞이 기다란 곤돌라와 몇십 명이 타고 있는 수상버스 바포레토가 보였다.
우선 산 마르코 광장을 가려면 수상버스를 타야 했다. 티켓은 하루권을 끊으면 몇 번을 타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3일권을 끊었다.
수상버스에는 사람이 많았다. 배가 달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익은 리알토 다리가 보였다.
베네치아 최초의 다리이자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다리다.
리알토 다리
베네치아 여행이 시작되는 산타 루치아 역에서 1.6km의 거리에 있는데 도보로는 약 25분 정도 걸렸다. 그러나 골목마다 볼 게 많아서 구경하면서 걷는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수상버스 안에서 리알토 다리 밑을 지나갔다. 나올 때 잠깐 내려서 올라가 보았는데 다리 위 양옆으로 상점과 카페가 죽 이어져 있었다. 구경할 것이 많았다.
우리는 수상버스에서 내려 산 마르코 광장을 찾아 걸어갔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골목이 좁았다. 이 집들은 이사하려면 가구를 옮기는 데 참 힘들겠다는 생각도 했다. 차도 들어올 수 없다고 하니 가구를 어떻게 옮기나? 의문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힘든 좁은 골목길
좁은 골목을 지나고 걷다 보니 뻥 뚫린 산 마르코 광장이 보였다.
산 마르코 광장은 넓고 분위기가 있었다. 베네치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이곳을 보고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산 마르코 광장
광장에는 베네치아의 영혼이라 불리는 산 마르코 대성당이 있다.
13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베네치아답게 동서양의 양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산 마르코 성당
산 마르코 대성당과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웅장한 건물은 베네치아 권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두칼레 궁전이다. 베네치아의 최고 통치자였던 도제가 이곳에 거처하며 지배했다.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정점을 이뤘던 빛의 화가 틴토레토의 그림이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원로원의 방은 최고 통치자와 원로원들이 모였던 곳이다.
<성 마가의 기적>(1548)-틴토레토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의 중요한 회의 또는 중요한 법정이 열렸던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베니스의 상인>의 재판도 이루어졌다.
<도제 레오나르도 로렌단의 초상화>(1501~1502)-조반니 벨리니
베네치아 도제(Doge di Venezia)는 1천여 년간 베네치아 공화국을 통치하였던 최고 지도자의 명칭이다.
생각해 보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도 다짜고짜 전당포 노인을 살해했다. 그리고 샤일록이 안토니오에게 강요한 신체 포기 각서는 오늘날에도 악덕 대부업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본 적은 없으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신체 포기 각서를 쓰는 사람이 꽤 있는 것 같다.
예로부터 가난과 대부업, 그리고 전당포는 예술인들에게 공공의 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대부업은 할 게 못 되는 것 같다. 앙심을 품은 사람에게 언제 칼이나 총에 맞이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면 대부업을 하는 사람에게 항의를 들을까?
산 마르코 광장에서는 플로리안 카페를 들러 보기를 권한다.
플로리안 카페 앞에서
플로리안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베네치아의 상징 중 하나다. 플로리아노 프란체스코니(Floriano Francesconi)가 1720년 12월 19일에 베네치아의 승리를 뜻하는 알라 베네치아 트리온판테 (Alla Venezia Trionfante)라는 이름으로 개업했는데, 곧 그의 이름 플로리아노의 베네치아식 이름인 ‘플로리안’을 따서 바꾸었다고 한다.
커피가 널리 유행되기 이전에 이곳에서 팔았던 음료는 핫초코였다. 지금까지 핫초코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메뉴다.
개업 이후 플로리안은 300년 간 대를 이어 영업을 멈추지 않고 운영해 왔고 베네치아의 상징으로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명소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카페는 많은 유명 인사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바람둥이 카사노바는 플로리안이 유일하게 여성의 출입이 가능하다는 카페란 점을 이용해 이 카페를 드나들었고, 괴테, 바이런 경, 카를로 골도니, 마르셀 프루스트, 찰스 디킨스, 비발디 등 여러 유명 인사들이 이 카페를 자주 방문했다.
카사노바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으나 지면 관계상 다음 화로 미룬다. 또 비발디가 피아노 교습을 한 장소도 근처에 있으나 역시 다음 화에서 다루기로 한다.
카페 앞에는 공연장이 있어 바이올린과 몇몇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커피와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사이로 카사노바와 괴테, 찰스 디킨스, 비발디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이 있었던 곳에 나도 있었다’라고 한 마디 낙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