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숙 Dec 12. 2024

<폼페이>의 배경지 폼페이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히스토리 팩션

<폼페이>의 배경지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사라진 폼페이(이탈리아어: Pompeii)는 고대 로마의 도시였다. 위치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주 나폴리 인근으로, 현재 행정 구역으로는 나폴리 광역시 폼페이 코무네에 속한다.

      

사라질 당시 폼페이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매우 번성했던 도시였다.      


서기 79년 8월 24일 운명의 날, 평소 광물질을 뿜어내 주변 토양을 비옥하게 해 주었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화산폭발 잔해물이 산등선을 타고 시속 160km로 인근의 도시 폼페이를 덮쳤다.      


8월 25일 아침, 화산폭발은 멈췄으나 단 18시간 만에 폼페이는 사라진 도시가 되어 영원히 시간이 멈췄다.     

땅속에 잠들어있던 이 도시가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화산폭발 이후 1,7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1592년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로를 파던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유물이 발견되었다.


즉시 밑을 파자 건물, 문화재 등의 유적이 발굴되면서 사라진 도시 폼페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본격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도굴꾼만 득시글거렸다.     


이후 1748년,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폼페이 양식을 보여주는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가져가 버렸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물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 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폼페이는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하 4미터 아래 묻혔던 폼페이는 놀랍게도 화산재 덕분에 당시 도시의 원형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폼페이의 봉인이 풀리자 옛 로마 제국의 도시 문명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이다.     


폼페이는 일정한 간격으로 건축물이 설계된 계획도시였으며 도로는 모두 포장되어 있었다. 광장 주변에는 신전과 행정 기관, 환전소, 시장이 있었고 공공수도와 공중목욕탕도 설계되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하게 보존된 도시를 보면서 어떻게 사체의 흔적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지 피오렐리는 의문을 가졌다.     


한 도시가 화산재에 덮여 사라졌는데 몇 구의 화석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발굴한 집에서는 식사 중에 봉변을 당했는지 음식을 담았던 그릇이 식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용암과 화산재가 식어서 굳어진 발굴 현장 흙더미 사이에 이상한 형태의 빈 공간이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피오렐리는 그곳에 석고를 부어보았다. 이윽고 석고가 굳자 놀라운 형태가 드러났다.      


그것은 사람들이 뒤엉켜 죽은 사체들의 모형이었다. 폼페이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자 부패하여 사라졌고 그로 인해 공간이 생겼던 것이다.     


로마인들의 화석


석고 캐스트들은 폼페이 최후의 순간 숨진 사람들의 몸짓과 표정까지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뜨거운 화산재의 열기를 견디지 못해 입과 코를 막은 채 앉은 자세로 죽은 사람, 뱃속 아기를 보호하려고 엎드린 모습의 임산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몸부림치는 모습 그대로 죽음을 맞은 연인은 서로 손을 맞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찾아낸 주검은 2,000구에 달한다.      


고대에는 의식주를 모두 자급자족 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폼페이 사람들은 시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그동안 폼페이에서 발굴된 상점이 만 400여 개에 이른다. 화덕이 여러 개 설치된 음식점도 있었다.     


폼페이 현장

벽돌로 만든 대형 맷돌과 커다란 화덕이 있는 빵집도 있었다.      


건물 출입문 옆에 오가는 사람들이 소변을 볼 수 있도록 커다란 항아리가 놓인 곳은 세탁소였다. 고대에는 세탁할 때 소변을 세제로 사용했기 때문에 세탁소 건물 앞에 소변 항아리를 놓아둔 것이다.     


서기 79년 8월 24일 폼페이 사람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활기찬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후 1시경 베수비오 화산 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며 시커먼 연기가 올라왔고 잠시 후 화산재는 평화로운 마을을 향했다.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었다. 각기 살길을 찾아 헤맸으나 안전한 곳은 없었다. 그 아수라장인 상황은 영화와 소설로 재현되었다.      


소설 <폼페이>

소설 <폼페이>는 케임브리지 출신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의 작품이다.     


로버트 해리스의 작품은 히스토리 팩션(Fact+Fiction)이다. 히스토리 팩션이란 실존했던 사건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가상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형식을 말한다. 그래서 해리스의 작품 주인공은 실제 역사 인물과 작가가 창작한 인물이 소설에서 함께 공존한다.     


팩션을 집필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거기에 상상력과 탄탄한 소설적 구성이 더해져 소설이 완성된다.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멸망한 향락의 도시 폼페이를 작품 소재로 하고 있다.      


<폼페이>를 다룬 소설은 1934년 에드워드 불워 리턴의 <폼페이 최후의 날>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폼페이 책과 영화 포스터


그러나 내가 <폼페이 최후의 날>을 선택하지 않고 로버트 해리스의 <폼페이>를 텍스트로 정한 이유는 이 소설이 로마와 폼페이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철저한 고증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폼페이>는 폼페이의 멸망은 물론 로마의 찬란했던 문화, 폭발 이전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탐욕과 심리적 충돌이 재미를 더하고 있다.     


로버트 해리스는 <폼페이> 집필을 위해 5년 동안 자료 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는 <폼페이> 집필 이후 로마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키케로 시리즈라 불리는 <로마사 3부작>을 완성했다.     


폼페이의 등장인물은 가상의 인물과 실존 인물이 있다. 주인공이자 수도교를 관리하는 수도 기사 ‘아틸리우스’는 가상의 인물이고, 실존 인물로는 로마의 대 역사가이자 해군 제독인 ‘플리니우스’, 폼페이 최고의 부자이자 화려한 생활을 즐기는 귀족 ‘암플리아투스’ 등이 있다.     


<폼페이> 줄거리

로버트 해리스의 <폼페이>는 폼페이 최후의 역사적, 자연적 사건 속에 묻혀 사라진 사람들의 마지막을 상상하여 기록하고 있다.      


폼페이 책


팩션 분야의 소설답게 <폼페이>에는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미세눔의 해군제독이자 저술가인 플리니우스, 그의 조카인 소(小) 플리니우스, 플리니우스의 동료인 폼포니아누스, 페디우스 카스쿠스와 그의 아내 렉티나 등이다.     


소(小) 플리니우스는 분화 현장을 지켜보고 당시 상황을 역사학자 타키투스에게 두 통의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화산 분화 2일 전인 서기 79년 8월 22일, 수도 기사 아틸리우스가 폼페이를 포함한 여러 마을에 물을 공급하는 거대한 로마 수로인 아쿠아 아우구스타(Aqua Augusta)에 새로 임명된 수석 엔지니어로 나폴리만에 도착한다. 그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전임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졌고, 물의 흐름이 갑자기 멈췄다. 젊고 경험은 부족하지만 이와 같은 증상이 지역에 대한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한 아틸리우스는 로마 도시의 필수 자원인 물 공급을 복원하기로 결심한다.     


아틸리우스는 상황이 단순한 기계 고장이 아닌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냈다. 그는 조사를 하면서 유황 냄새와 물의 온도 상승과 같은 특이한 지질학적 현상을 관찰하는데, 이는 재앙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점점 커지는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역 엘리트로부터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폼페이에서 아틸리우스는 부패, 탐욕, 착취를 바탕으로 권력과 영향력을 쌓아온 부유한 자유인 암플리아투스(Ampliatus)를 만난다.      


노예에서 도시의 지배자로 변신한 암플리아투스에게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정의로운 딸 코렐리아가 있다. 암플리아투스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여 이익을 얻고 임박한 재난에 신경 쓰지 않고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틸리우스는 이곳에서 총명하고 용감한 딸 코렐리아를 만난다. 그녀는 아버지의 억압적인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아틸리우스는 코렐리아와 함께 진실을 밝히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한다.     


폼페이 현장


아틸리우스의 조사는 그를 베수비오산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그는 수질 오염과 흐름 중단의 원인, 즉 임박한 화산폭발을 알리는 지진 활동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공공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보다 자신의 지위와 부를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지방 당국에 의해 무시된다.     


폭발이 임박했다는 징후가 더욱 심각해지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베수비오 화산이 마침내 폭발하자 소설은 재난의 공포와 혼란을 생생하게 서술한다.      


땅의 진동이 시작되고 돌덩어리들이 그야말로 비 오듯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베개나 방석으로 머리를 가린 채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영국 화가 그레이엄 코튼이 그린 폼페이 최후의 날(자료-네이버)


그러나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죽음을 안겨준 것은 돌멩이와 용암이 아닌 화산재였다. 화산재가 낮게 깔리면서 사람들은 질식하고, 이어 화산재가 섞인 비가 내리면서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폼페이와 나폴리 만 동부 해안의 도시가 순식간에 잿더미에 갇히게 된 것이다. 화산재, 경석, 치명적인 화쇄류로 생존자는 거의 남지 않았다.      


화산재 영향권 지도


황폐화 속에서도 아틸리우스는 특별한 용기와 헌신을 보여주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코렐리아와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동시에 미래를 위해 아쿠아 아우구스타를 보호하려고 시도한다.     


소설은 아틸리우스의 운명이 해결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끝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독창성의 회복력과 자연의 압도적인 힘과 종종 근시안적인 인류의 오만 사이의 뚜렷한 대조를 암시하고 있다.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는 역사적 정확성과 서스펜스 및 드라마를 결합한 복잡한 이야기를 엮어 독자들에게 고대 폼페이의 삶과 죽음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소설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파괴한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을 생생하고 참혹하게 묘사하며 정점에 이른다. 혼란 속에서 아틸리우스는 자신의 운명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생명을 구하고 아쿠아 아우구스타를 보존하기 위해 싸운다.     


<폼페이>는 세심한 역사적 디테일과 서스펜스를 결합하여 고대 로마 도시의 사회, 문화, 재앙적 파괴를 생생하게 재현한 소설이다.


이 책은 베수비오 화산폭발을 소재로 삼는 동시에 로마의 찬란한 문화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작가 소개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는 꼼꼼하게 연구한 역사 및 정치 스릴러 작품으로 유명한 영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다.      

로버트 해리스


1957년 3월 7일 영국 노팅엄에서 태어난 해리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처음에 저널리즘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더 선데이 타임스’(The Sunday Times) 및 ‘옵서버’(The Observer)의 정치부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는 2003년 영국 언론상이 선정한 ‘올해의 칼럼니스트’로 뽑히기도 했다. 로버트 해리스는 왕립문학협회 회원이다.     


BBC ‘뉴스나이트’와 ‘파노라마’ 방송 리포터로도 활약했던 로버트 해리스는 1992년 <당신들의 조국>(Fatherland)을 출간하면서 문학에 입문했다.      


이후 그는 다섯 편의 소설 <이니그마>, <아크엔젤>, <폼페이>, <임페리움>, <고스트 라이터>를 발표했다.      

그의 책들은 백만 부 단위로 팔려나갔으며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해리스는 역사와 소설을 함께 쓰는 대가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쓴 작품은 다음과 같다.     


<당신들의 조국>(1992)

해리스의 데뷔작으로 1964년 나치가 지배하는 전쟁 이후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독일은 12개의 연합을 거느리고 동유럽은 위대한 독일 제국(Greater German Reich)의 통제로 넘어간다.      


영국은 평화를 청했고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함락되었다. 히틀러의 75세 생일을 맞이한 해로 이를 기념하는 데 방해되는 그 무엇도 허용되지 않는다.     


익사 사건을 조사하던 중 환멸을 느낀 사법경찰 크사비어 마르크는 그를 궁극적으로 유럽에 거주하는 유태인의 비밀 몰살로 안내하는 단서를 찾게 된다.      


역사의 대안이자 해리스가 가장 만족스러운 소설이라고 말하는 작품으로 이 책의 냉담함은 히틀러가 승리자인 세상의 설득력 있는 재현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이 책은 과거 나치 정권에서 벗어나려 계속해서 몸부림치는 현대 독일을 상기시켜 준다.     


<이니그마>(1995)

이 작품은 블레츨리 파크의 독일 U보트 암호해독에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다. 이야기는 지적 자극과 완벽히 비밀리에 함께 일하는 뛰어난 개인들을 다룬다.


해리스는 스테이션 X로 알려진 업적을 ‘전쟁 역사에 있어 가장 성공적이고 인정받은 기밀 노력’이라고 표현했고, 이 발언에 비추어 그의 소설은 암호 해독자들의 업적에 대한 찬사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실제 사건을 다뤘다. 1943년 3월, 가장 큰 수송대가 뉴욕을 떠나려 할 즈음, 일주일 동안 영국은 이니그마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다시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을 복구하려는 정신없는 시간과의 싸움은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톰 제리코는 약하고 순진한 젊은 청년으로, 치열한 근무 환경 속에서 여자 친구의 갑작스러운 행방불명에 대한 미스터리를 밝혀내야 한다.     


교보문고에 있는 로버트 해리스 책
아마존에 있는 로버트 해리스 책


<아크엔젤>(1998)

현대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한 해리스의 세 번째 소설 <아크엔젤>은 러시아의 권위주의적 과거의 영혼들과 현재 민주주의의 취약점이 배어있다.      


소설은 풀루크 켈소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는 스탈린의 비밀문서들이 학계의 명성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고 이를 찾아내려는 방탕한 사학자다.      


그의 수사는 그를 백해 항구의 아르항겔스크의 외지고 오싹한 숲으로 안내하고, 그는 스탈린의 마지막 비밀을 파헤치게 된다.      


해리스는 그의 주인공을 악명 높은 옥스퍼드 현대사의 전 교수 노르만 스톤에 기반을 두었다. 그 실존 인물처럼 켈소는 매력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열정적이고 불손하다. 그러나 다음 문장처럼 해리스의 허구적 창조가 아니다.     


스탈린은 두려움의 통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스탈린 이전부터 존재했고, 그는 이를 개선시켰고, 또한 또다시 존재할 수 있다. 히틀러가 아닌 그의 망령을 우리는 걱정해야 한다.’      


이는 정치 기자 해리슨이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잘 짜인 재미를 제공하고 엄청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고심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폼페이>(2003)

서기 79년 베수비오 산의 폭발 당시를 배경으로 한 히스토리 팩션 스릴러다.     


<임페리움>(Imperium-2006), <루스트룸>(Lustrum-2009), <딕타토르>(Dictator=2015)

로마 정치가 키케로의 삶을 연대기로 기록한 3부작이다.     


이 소설은 키케로의 대필자이자 비서, 조수이자 친구인 티로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는 고대 로마를 통치하고자 하는 그의 주인의 시도를 그렸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티로는 ‘나는 권력과 인간에 대해 노래하리라’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정치적 심리의 날카롭고 분명한 분석이며, 권력을 좇는 자의 생각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유령>(2007)

전 영국 총리의 어두운 비밀을 파헤치는 대필 작가에 관한 현대 정치 스릴러다.     


<장교와 스파이>(2013)

19세기 프랑스의 정치 스캔들인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역사소설이다.     


<뮌헨>(2017)

1938년 뮌헨 협정과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긴장감 넘치는 설명이다.     


해리스는 풍부한 디테일로 역사적 시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폭넓은 청중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종종 권력, 윤리, 개인 주체의 교차점을 탐구하고 있다.     


소설 외에도 해리스는 자신의 작품을 영화와 TV에 각색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고스트 라이터>(The Ghost)는 2010년 영화로 각색되었다. 헤리스의 스토리텔링 전문 지식과 저널리즘에 대한 배경지식은 그의 글에 진정성과 깊이를 더해준다.     


<폼페이>에서 꼭 봐야 할 장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폼페이 유적지에서는 고대 로마 도시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둘러볼 장소는 다음과 같다.     


법정

폼페이의 정치, 경제, 종교 생활의 중심지인 포럼은 중요한 공공건물과 사원, 시장으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이었다. 방문객들은 목성 신전, 바실리카(법정), 행정 건물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원형극장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로마 원형극장 중 하나인 이곳은 8,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나 최대 20,000명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검투 경기 및 기타 볼거리를 주최했다. 놀라운 보존 상태는 로마 대중 오락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 준다.     


원형극장


극장

폼페이 대극장은 드라마와 음악 행사의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근처에는 시 낭독이나 콘서트 등 좀 더 친밀한 공연을 위해 사용되었던 작은 오데온이 있다.     


목신의 집

내부에서 발견된 춤추는 목신 동상의 이름을 딴 웅장한 로마 빌라이다. 이 거주지는 이수스 전투를 묘사한 ‘알렉산더 모자이크’를 포함하여 그 크기와 복잡한 모자이크로 유명하다.     


신비의 별장

성벽 바깥에 있는 이 빌라는 프레스코화, 특히 수수께끼의 디오니소스 의식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생생한 색상과 복잡한 세부 묘사로 인해 폼페이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폼페이 도로와 저택


루파나르(매춘굴)

폼페이에서 가장 악명 높은 유적지 중 하나인 루파 나르는 성에 대한 고대 로마의 태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에로틱한 프레스코화와 낙서가 있는 작은 건물이다.     


스타비안 배스

잘 보존된 이 대중목욕탕은 위생과 사교에 대한 로마식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욕실에는 탈의실, 냉탕, 온탕, 온수 욕조가 있다.     


아폴로 신전

아폴로 신에게 바쳐진 폼페이의 가장 오래된 사원 중 하나다. 방문객에게 로마의 종교 관습을 느낄 수 있는 기둥, 제단, 조각상이 특징이다.     


베티의 집

부유한 상인의 소유로 추정되는 이 호화로운 집은 생동감 넘치는 프레스코화와 장식으로 유명하다. 폼페이 엘리트들의 호화로운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도망자들의 정원

이 가슴 아픈 현장에는 화산폭발 피해자의 석고 모형이 보존되어 있다. 그들의 마지막 순간은 잊히지 않는 디테일로 남아 고대 비극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무덤의 거리

성문 근처에 있는 이 거리에는 정교한 장례식 기념물이 늘어서 있으며, 공공 도로를 따라 죽은 자를 추모하는 로마 풍습을 보여준다.     


서모폴리움

따뜻한 식사가 제공되었던 고대 로마의 ‘패스트푸드’ 식당이다. 최근 발굴된 사례에는 그림이 그려진 장식과 심지어 음식물 잔해까지 남아있다.     


비극적인 시인의 집

이 집은 입구에 ‘Cave Canem’(개를 조심하세요)라고 쓰여있다. 또한 정교한 모자이크도 유명하다.     


포럼의 곡물창고

현재 이곳은 당시 피해자들의 도자기, 도구, 석고 모형 등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폼페이에서 출토된 유물들


폼페이 방문 팁

폼페이에서 이 모든 곳을 둘러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므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려면 가이드에게 부탁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또 바닥이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하므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운동화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물은 필수다.     


그 외 이야기

폼페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 즉 특권층 사람들이 호화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로, 지금의 베버리힐스에 버금갈 정도였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음에도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히 잊혔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로마의 정치가 소(小) 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소(小) 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는데, 폭발 당일 소(小) 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小) 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소(小) 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리고 그의 숙부인 플리니우스는 함대의 제독으로 군함을 타고 나가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독성이 강한 화산 가스에 질식해 그만 죽고 말았다.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명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피해 규모가 너무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 티투스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으나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타락한 도시에 내린 신의 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화산폭발 후 조사차 이곳을 방문한 플리니우스도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피해 상황이 하도 엄청나서 로마는 폼페이 발굴 및 재건에 손도 대지 못 댔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만 득실거렸다.     


뒤에 보이는 산이 베수비오 산이다


폼페이 발굴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도시의 약 4/5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나온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업이 완료된다면 로마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 등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 더욱 많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1월 6일, ‘검투사의 집’이 폭우로 인해 붕괴되었다.

 

폼페이 유물


폼페이 여행기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계획을 짜면서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2주간의 여행으로 세 도시를 보는 것도 빡빡한 일정이었으나 남부 나폴리 폼페이와 소렌토, 포지타노 해안 등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로마에서 남부로 가게 되면 나머지 도시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아 일단 포기했다.

     

그런데 유로자전거나라에서 로마 반나절 야경 투어를 예약하면서 폼페이와 아말피, 포지타노, 소렌토를 하루 일정으로 다녀오는 투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폼페이-아말피 해안도로-포지타노 해안도로-소렌토를 경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시간은 아침 7시에 테르미니역 근처에서 출발하여 저녁 10시에 돌아오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가격은 60유로에 현장에서 이어폰과 작은 버스로 갈아타는 비용 등 3만 원을 더 내서 1인당 약 12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숙박하지 않고 하루 만에 돌아온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호텔부터 기차표, 명 여행지까지 한국에서 예약하고 간 곳이 꽤 많았다. 로마에서 5일을 머물렀기에 하루를 투자하면 이탈리아 남부를 갈 수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예약 버튼을 눌렀다.     


이탈리아 남부 여행을 가는 날, 아침 6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7시에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어두컴컴 하긴 했지만, 캐리어가 없었기에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와 큰 도로로 접어들었다.

    

유로자전거나라 버스


길 건너에 유로자전거나라 관광버스가 몇 대 보였다. 얼른 길을 건너 버스에 올랐다.


오른쪽 자리는 해안가를 따라 경치가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버스에 타 보니 벌써 다 차고 왼쪽은 텅 비어있었다.


역시 한국인은 동작이 빨랐다. 우리는 7시를 지켜서 왔는데 저들은 도대체 언제 왔는지 의문이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오늘의 일정을 안내해 주었다. 유로자전거나라 가이드는 한국 사람이라 더 좋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여행하면서 주의해야 할 점, 소매치기 이야기, 그리고 식당부터 시작해서 궁금한 모든 것을 언제든지 물어보아도 좋다고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했다.


전화번호 하나를 입력했을 뿐인데 왠지 먼 친척이라도 만난 듯 든든했다.

     

버스로 3시간을 달려 폼페이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남부 도로를 달리면서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가는 도중 휴게소에서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살 시간도 주었다.      


한국 고속도로 휴게소도 그렇듯 여자 화장실은 늘 줄이 길었다. 몇 대의 관광차가 한꺼번에 정차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아들에게 빵과 커피를 사놓으라고 부탁했다.


화장실에서 나와 아들을 찾았다. 그런데 아들은 아직도 빵을 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아직 못 샀어?”

“빵 사 가지고 결제하는 줄 알고 줄 섰는데 여기는 시스템이 다르네요.”     


아들의 말처럼 이곳은 먼저 결제를 한 후 영수증을 가지고 가서 빵을 받아야 했다.     


“시내에선 안 그랬는데 휴게소라 그런가?”     


로마에 왔으니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별 수 없었다.


그새 눈치 빠른 딸은 결제를 마치고 빵을 받아왔다. 역시 공부 머리와 생활 머리는 다른가보다. 백만 년 만에 딸이 똘똘해 보였다.     


젤라또 다음으로 많이 먹었던 크루아상


휴게소 크루아상도 맛있었다. 이탈리아는 어디를 가든 빵과 젤라또는 먹을만했다. 커피를 가지고 버스에 올랐다. 배도 든든하고 커피까지 빵빵하니 기분이 좋았다.     


버스가 폼페이 주차장에 주차하자 우리는 우르르 내렸다. 깃발을 든 가이드 앞에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빙 둘러섰다. 마치 어미를 잘 따르는 병아리들 같았다.     


예약비에 입장료가 포함이어서 신경 쓰지 않았더니 얼마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자료를 조사할 때 폼페이는 매주 첫 주 일요일은 입장료가 무료였다.


이런 것이 바로 단체관광의 단점이었다. 내가 직접 표를 끊지 않았으니 깜깜이인 것이다.      


좋았던 것은 따로 가이드를 신청하지 않아도 유로자전거나라 직원이 이어폰 하나씩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중요한 곳을 다니며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그저 가이드만 놓치지 않으면 되었다.      


30여 명이 몰려다니니 다소 복잡하긴 했다.


폼페이는 완벽한 건물이 아닌 터만 있는 곳이라 짐작으로는 알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설명을 들으니 결과적으로는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기 79년에 만들어진 도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적당한 간격으로 수도가 설치된 것도 인상적이었다.


양쪽에 홈이 파여 있는 곳은 마차가 지나는 길이라고 했다. 물은 사람은 물론 동물도 먹을 수 있었고 밤에 물이 넘쳐흐르면 지저분한 도로가 청소되었다고 하니 아이디어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잘 만들어진 도로와 수돗가


뒤엉킨 채 죽은 석고 캐스트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짧은 순간이었어도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공포였을 것이다.     


그 외에 식당, 목욕탕, 대저택, 시장, 광장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폼페이 집터와 광장


일정이 빠듯해서인지 개인 시간은 따로 허용되지 않았다.     


얼마 후 버스는 해안가를 달렸다. 절벽 위 좁은 도로가 구불구불해서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무서울 것 같았다.


버스는 곡예하듯 좁은 도로를 달려 아말피 해안가가 훤히 보이는 언덕에 섰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아말피 해안과 포지타노 해안가


포지타노 해안가 역시 마친가지였다. 직접 해안가까지 갈 시간은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해안가는 절경이었고 집들과 어우러져 멋진 배경이 되었다.     

     

포지타노 해안과 예쁜 집들(사진-픽사베이)


소렌토를 들어갈 즈음인가? 큰 관광버스에서 작은 미니 버스로 사람들이 나누어 탔다. 길이 좁아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나마 소렌토에서는 한 시간 자유시간을 주었다.


골목골목 분위기 있는 카페와 소규모 상점이 모여 있고 14세기에 지어진 산 프란체스코 교회도 있었다.     


몇 군데 상점에 들러 레몬 비누 몇 개를 샀다. 소렌토는 레몬 생산지인지 비누도 레몬모양이었다.      


소렌토의 분위기 있는 카페와 한적한 거리


시간이 넉넉하다면 이 동네에서 며칠 묵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에 쫓긴 우리가 간 곳은 전문 식당가였다.


우리는 해산물 요리를 비롯해 음식 몇 가지를 시켜 빠른 시간에 먹어 치웠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단체관광에서 여유는 사치였다.

   

화덕에서 구운 빵


다시 버스에 올라 로마로 향했다. 피곤했는지 졸음이 몰려와 바깥을 감상하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다.      


버스가 테르미니역에 도착한 것은 저녁 11시가 가까워서였다. 곤한 하루였지만 그래도 둘러보고 싶은 여행지를 다녀왔으니 만족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