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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Dec 05. 2024

<갈리아 전쟁기>의 배경지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르 이야기

<갈리아 전쟁기>는 로마에 1차 삼두정치가 시작된 후 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카이사르가 8년 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직접 기록한 책이다.


<갈리아 전쟁기> 책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와 독일의 일부 지역을 말한다.     


고대 갈리아 지도


사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책은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해 여러 권이 있지만, 일부러 <갈리아 전쟁기>를 고른 것은 카이사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앞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내 독서의 시작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다.


<영웅전>에는 총 50명의 인물이 소개되었으나 내 기억에 각인된 인물은 카이사르였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없다. 어린 마음에 그냥 멋져 보였다.      


사실 원래의 <영웅전>은 유명 인물들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비교열전>이다. <영웅전>의 원래 제목은 Vitae parallelae(직역하면 생애, 비교, 혹은 비교열전)이다.


즉 그리스와 로마의 비슷한 두 인물을 각각 소개하고 저자 플루타르코스가 마지막에 두 인물 간의 비교와 평가를 넣어 22쌍의 비교열전과 4명의 단독열전으로 구성한 책이다. 카이사르와 비교된 인물은 알렉산더 대왕이다.      


<영웅전>은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고, 오늘날에는 유명하지 않거나 거의 잊힌 인물들에 대해서도 소상히 기록한 중요한 사료다.     


물론 어렸을 때 내가 읽은 <영웅전>은 50여 명의 인물이 다 소개되지 않았다.

      

각설하고,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쟁기>를 전면에 앞세우고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자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무조건적으로 후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카이사르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먼저 넣는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통해 로마 공화국을 확장하고 로마 제국의 초석을 다진 뛰어난 장군으로 칭송받는다. 그가 루비콘강을 건너 폼페이우스와 대적한 것은 대담한 리더십을 보여주었지만 이는 로마를 내전으로 몰아넣어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정치가로서 달력을 개혁하고(율리우스력 도입), 통치 방식을 개선하고, 권위를 중앙 집중화하여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를 안정시켰다. 또한 로마 하층민의 삶을 개선하고 상원이 지배하는 공화국의 부패와 비효율성에 도전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독재자였다. 그는 권력의 중앙 집중화로 인해 공화국의 민주적 제도를 훼손시켰고 황제 아래에서 독재 통치의 길을 닦은 폭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카이사르의 삶과 암살은 셰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각색된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가들은 카이사르의 통치가 진보를 상징하는지, 아니면 공화주의 이상을 배신했는지에 대해 논쟁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다. 그러나 자유 수호로 묘사된 그의 암살은 궁극적으로 아우구스투스와 로마 제국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현대에 이르러 카이사르는 야망과 리더십의 복잡성을 상징한다. 그의 이름(Caesar, Kaiser, Tsar)은 그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으며 문화 전반에 걸쳐 통치자의 동의어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단테, 마키아벨리, 나폴레옹 1세와 3세 등이 있고,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은 몽테스키외, 루소, 바이런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작가들은 카이사르의 적대자 베르킨게토릭스를 프랑스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내세웠으며 프랑스 인들에게 카이사르는 제국주의적 침략자 히틀러와 같은 존재였다(베르킨게토릭스에 대해서는 아래 본문에서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카이사르는 어떤 인물인가?     


카이사르 흉상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기원전 100년 7월, 트로이 영웅 아이네이아스(Aeneas)의 아들이자 여신 비너스의 후손인 이울루스(Iulus)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귀족 가문인 율리아(Julia) 집안에서 태어났다.      


명문가였으나 재산도 없고 그의 가문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민중파를 대표하는 마리우스와 원로원 귀족파의 이익을 대표하는 술라 사이의 정치 폭력이 난무하던 내전기에 소년 시절을 보냈다.      


15살에 아버지가 죽자 그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그의 고모가 마리우스와 결혼하자 자연스럽게 민중파에 서게 되었고 카이사르도 16살에 마리우스파인 칸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했다.


기원전 82년(18살)

독재자 술라(Sulla)의 승리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인 아내 코르넬리아와의 이혼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그는 술라의 명령을 거부하고 망명 생활을 택했다.      


기원전 70년(24살)

카이사르는 술라를 피해 소아시아와 킬리키아에서 군 복무하며 군사력과 리더십 기술을 연마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의 로도스섬에 유학하여 웅변술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이즈음 카이사르는 해적에게 납치된 일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적혀 있다.      

로도스섬으로 가는 도중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들에게 붙잡혔다.


킬리키아 해적들의 근거지 해안(현재의 터키) 자료-위키피디아


해적들은 몸값으로 20 탈렌트를 요구했다. 20 탈렌트는 병사 4,300명의 1년 치 봉급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거액의 몸값을 요구받은 카이사르는 큰소리쳤다.     


“이놈들아,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내 몸값이 겨우 20 탈렌트 밖에 안 된단 말이냐? 적어도 내 몸값은 50 탈렌트 이상이다.”     


그는 스스로 몸값을 올렸다.     


하인이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가자 카이사르는 해적소굴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포로였지만 거침이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려고 할 때 해적들이 떠들자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해적들이 무술훈련을 할 때 나서서 기량을 보여주었고 오락을 하면 같이 놀았다. 그리고 큰소리쳤다.     


“내가 만약 여기서 나간다면 너희들을 모두 잡아 교수형에 처할 것이다.”      


하인이 돈을 마련해 오자 그는 38일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로마로 돌아가거나 로도스섬으로 공부하러 가지 않고 근처 밀레투스로 가서 배를 빌리고 선원을 모집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해적선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포로로 만든 해적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잡아 교수형에 처했다. 포로 생활을 하면서 했던 말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셈이다.     


그런데 당시 카이사르는 돈이 없었다. 자신의 몸값으로 가져온 돈과 선원을 모집한 돈 등은 모두 빚이었다.

     

기원전 68년: 술라가 죽자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재정관이 된다. 그는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물 쓰듯 하고 곡식을 나눠주다가 큰 빚을 지게 되는데 돈은 주로 추방가의 재산을 몰수해 거부가 된 크라수스에게서 빌린다.     


기원전 63년: 그는 로마의 수제사장이 되어 영향력을 더욱 키워나간다.     


기원전 61년: 카이사르는 스페인 총독으로 부임한다. 그는 그곳 남서부에 살던 루시타니족과의 전쟁에서 몇 차례 혁혁한 공을 세우며 거액을 모은다. 과거에는 전쟁에서 이기면 전리품을 챙겨 돈을 벌 수 있었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에 진 빚을 갚는다.     


기원전 60년: 첫 번째 삼두정치 결성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 정치를 장악했다. 

    

제1차 삼두정치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세 사람의 비공식 동맹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왼쪽-카이사르, 중앙-폼페이우스, 오른쪽-크라수스


삼두정치가 시작되기 전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2인 체제였다. 우위에 있었던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 진압과 유대, 시리아 등 동부 지역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을 진압한 후 ‘마그누스’(대왕)라는 별명을 얻었다.      


폼페이우스는 전쟁영웅으로 군대와 충성스러운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퇴역 군인들에게 약속했던 토지를 주고자 했으나 원로원의 반대로 고심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로마 최고의 부자였다. 그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불타버린 부동산을 사들여 재건축하여 되팔아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역시 스파르타쿠스가 주도한 노예 반란(기원전 73~71년)을 진압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었으나 모든 공은 폼페이우스에게 돌아갔다.


때문에 그는 2인 자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어떻게든 1인 자로 올라설 수 있을지 모색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막강한 군사력을, 또 한 사람은 로마 최고의 부자였으나 그에 반해 카이사르는 얼마 전까지 빚을 잔뜩 졌었고 여자를 밝혀 난봉꾼이었으며 이렇다 하게 내세울 업적도 없었다.


그러나 차근차근 밑바닥부터 다져 어느새 불쑥 커버린 카이사르는 두 사람에게 딜을 제안했다.     


폼페이우스에게는 법안을 바꿔서라도 퇴역 군인들에게 토지를 지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안을, 세금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크라수스에게는 세금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원로원도 두 사람의 독재보다 중간에서 카이사르가 중재를 하면 괜찮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해관계가 맞물려 카이사르는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집정관이 되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두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스펙이었다. 또 두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법안까지 바꾸면서 원로원의 미움을 산 카이사르에게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갈리아 원정이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같은 인물의 업적과 경쟁하고 로마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군사적 승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갈리아 전쟁에서 약탈과 공물을 통해 부를 얻고 함께 떠난 병사들에게도 후한 보상을 해줄 수 있었다.     

당시 갈리아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잠재적으로 로마에 위협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부족으로부터 로마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원정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그의 침략을 정당화했다.     


카이사르의 계획대로 만약 갈리아를 정복하고 돌아온다면 폼페이우스의 전투력에 버금가는 공적을 쌓을 수 있었고 전리품을 챙겨 온다면 크라수스의 부를 능가할 수도 있었다.     


마침내 카이사르는 군사를 모아 갈리아 원정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전쟁터에서 <갈리아 전쟁기>를 집필, 자신의 업적과 전투 상황을 상세히 적어 로마로 보냈다.

 

전쟁 이미지


로마시민들은 연일 승리를 전하는 카이사르에게 열광했고 귀국하기 전부터 카이사르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더군다나 그의 전과는 로마로부터 일절 도움이나 지원을 받지 않고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며 얻어낸 쾌거였다. 그의 나이 36살~44살에 있었던 일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군사 작전을 주도하여 군대로부터 막대한 권력과 충성심을 얻고 로마로 개선한다.     


한편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전쟁 중이던 기원전 54년, 위기를 느낀 크라수스 역시 파르티아(현재 이란의 북부)로 원정을 떠난다.


만약 카이사르가 승리한 후 로마로 돌아오면 자신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을 염려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두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길 원했고 그것을 파르티아와의 전쟁 중에 이루려고 애썼다.      


초반에 파르티아를 상대로 쉽게 승리를 거둔 크라수스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했고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너무 깊숙이 쳐들어갔다.


결국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 군은 파르티아 군에 대패하고 크라수스의 아들은 전사하고 크라수스도 적의 계략에 말려서 살해당했다.


약 4만 명의 파르티아 원정군 중 살아서 도망친 로마 병사는 약 1만 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로마군은 참패했다.      


로마 병사들


한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딸 율리아와 결혼을 시켰는데 출산 후 딸이 사망하면서 폼페이우스와의 결속도 소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사르와 크라수스가 각각 원정을 떠난 후 로마에서 여러 차례 소요상태가 발생하자 원로원 귀족 파는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한다.      


기원전 49년: 루비콘강을 건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기 전에 승리장군으로 당당하게 로마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한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무기와 군대를 버리고 혼자 들어오라고 명한다.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들어오면 죽일 생각이었다.


카이사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혼자 군대를 해산하고 들어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결국 카이사르는 결심한 후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해 들어갔다.     


폼페이우스는 군사를 채 정비하기도 전에 너무 빨리 진격해 오는 카이사르를 피해 그리스로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3개월 만에 이탈리아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그리스의 에페이로스 지방으로 건너가 싸웠다.


처음에는 고전하지만, 폼페이우스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승리한다.


놀란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가고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추격해 갔다가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 만나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그곳에서 잡혀 살해당하고 이집트는 목을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기원전 47년: 이집트에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통치자로 세우고 아들까지 낳는 낭만적이고 정치적인 동맹을 시작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사망하자 관례대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이집트를 공동 통치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섭정과 세력의 조언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기원전 49년에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에서 쫓아내려고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모았지만 갈등이 심화되어 이집트를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기원전 48년, 로마 내전 중에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했지만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려는 시도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궁정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처형에 분노했다.


아무리 지금은 적이지만 한때는 자신과 뜻을 같이한 동지였고 비록 딸은 죽었지만 폼페이우스는 한때 자신의 사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반한 카이사르는 그녀를 지지하여 프톨레마이우스와 내전을 벌이고, 전쟁 중 프톨레마이우스가 강에 빠져 죽자 클레오파트라가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중요한 곡물 공급원이었으며 이집트의 안정은 로마의 이익에 매우 중요했다. 클레오파트라를 지지함으로써 카이사르는 이집트 정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에 상당한 빚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왕좌를 확보하도록 도움으로써 카이사르는 빚을 상환받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카펫에 둘둘 말린 채 선물로 들어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두 사람은 곧 열렬한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아 둘의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


이집트 관습으로 클레오파트라는 또 다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하여 함께 공동 통치자로 복귀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 자신을 영구 통치자로 선언하고 율리우스력을 비롯한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기원전 45: 카이사르는 스페인에서 남은 폼페이 군대를 격파하고 통치를 강화했다.     


기원전 44: 3월 15일, 카이사르의 권력이 커지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암살한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양아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포함한 원로원 의원들은 호위병사를 두고 혼자 회의장에 들어온 카이사르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 현장에는 양아들 브루투스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심정을 말했고 이 말은 오늘날까지 배신의 아이콘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대사 역시 후일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나오는 대사로 죽어가는 카이사르가 직접 말했는지의 진위는 알 길이 없다.      


사실 카이사르는 죽기 얼마 전부터 점쟁이 스푸린나에게 “3월 15일을 조심하십시오”라는 주의를 들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 말을 듣고 그냥 웃어넘겼다.


주의를 받았던 3월 15일, 원로원으로 가는 도중 다시 그 점쟁이를 만났다. 카이사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3월 15일이 왔으나 만사가 순탄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 오늘이 다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카이사르 동상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 극장 앞에서는 원로원 회기를 알리는 제물이 바쳐지고 있었다.


이때 그날의 음모를 알리는 두루마리가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그날 브루투스 일파의 암살 모의를 알고 있었던 아르테미도로스라는 사람이 그 음모를 적어 카이사르에게 전했다고 한다.     


바쁜 카이사르가 두루마리를 받는 족족 시종에게 넘기는 것을 보고 그에게 바짝 다가가 말했다.     


“카이사르여, 이것을 직접 읽으시되 빨리 읽으셔야 합니다. 중대하고도 그대와 직접 관계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수많은 사람을 면담하는 바람에 읽을 시간이 없었다. 죽음이란 운명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한 것이었기에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이사르는 거의 황제에 버금가는 ‘종신 독재관’의 자리에 오른 지 두 달 만에 원로원 의사당의 폼페이우스 조각상 아래에서 암살된다.


그러나 브루투스 일파는 카이사르를 찔러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세운 체제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카이사르의 영향력   

독일에서 황제를 부르는 카이저(kaiser)와 러시아에서 황제를 칭하는 차르(tsar)의 호칭은 카이사르에게서 기원한다.


즉 ‘카이사르’라는 뜻은 유럽에서는 황제, 또는 권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발음은 고대 라틴어로 부르는 이름이며 중세 라틴어로는 체사르, 영어로는 줄리우스 시저, 로마에서는 체사레, 독일에서는 체자르라고 부른다.      


카이사르=체사르=시저=체사레=체자르     


카이사르는 정권을 잡은 후 동전에 자기 얼굴을 찍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또 영어에서 7월을 뜻하는 줄라이(July)는 줄리우스(Julius) 시저에서 가져왔다.      


젊은 시절 카이사르는 인기가 많았다. 그는 군사적 능력, 웅변,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글을 쓰는 실력도 뛰어났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는 앞머리가 없는 대머리였다.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로마 시민들은 모두 나와 환호했다. 당시 로마는 개선식 때 장군이 오만해지지 않도록 하루 동안은 개선장군에게 야유나 조소를 보낼 수 있었다.


개선식을 할 때는 황제를 상징하는 옷인 보라색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지나갔다. 카이사르가 지나가자 야유가 퍼부어졌다.


"대머리 난봉꾼이 지나간다. 그대의 마누라들이 카이사르에게 바친 돈은 전부 갈리아 창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오."   


“천하의 난봉꾼 대머리가 나가신다. 마누라를 숨겨라.”


그러나 평소 대머리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던 카이사르는 대머리를 감추려고 월계수관을 쓰고 다닐 정도였다. 특히 카이사르는 다른 말은 다 참았는데 이 '대머리'라는 단어는 참지 못하고 분노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 이집트 원정기간 동안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과 유명한 스캔들을 남겼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고 클레오파트라의 왕위 자리를 공고히 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벌어진 젤라전투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비니(Veni), 비디(Vidi), 비씨(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카이사르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로마에서 화려한 승리 퍼레이드를 열었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올라가는 동안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분노도 함께 상승했다.     


카이사르의 여인들

카이사르는 세 번 결혼했는데 그의 결혼은 주로 정치적 연합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아내 

코르넬리아 키나(Cornelia Cinna)-기원전 84년 결혼, 기원전 69년 사별


카이사르의 첫 번째 아내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키나의 딸이다. 딸 줄리아를 낳았다.     


폼페이아(Pompeia)-기원전 67년 결혼, 기원전 61년 이혼


두 번째 아내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사촌이다.


클로디우스 사건(성대한 종교 축제 중 부적절한 행위 혐의)으로 인해 이혼했다.


이 사건에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아가 결백하다고 주장했지만, “카이사르의 부인은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이혼을 결정했다.     


칼푸르니아(Calpurnia Pisonis)-기원전 59년 결혼, 기원전 44년 사별


세 번째 아내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이다.


결혼 후 카이사르가 암살된 기원전 44년까지 함께했다.


칼푸르니아는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에도 충실히 그의 명예를 지켰다고 알려져 있다.     


연인들

카이사르는 젊어서부터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진 관계도 많았다.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

카이사르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8년경 만나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카이사리온(Ptolemaios XV Caesarion)이 태어났다.     


카이사르는 로마 귀족 여성들과도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와의 연애도 유명하다.


카이사르는 연인의 아들 브루투스를 어려서부터 예뻐하여 자신의 아들처럼 아끼고 늘 휘하에 두었다.     


자녀들


줄리아 카이사리스(Julia Caesaris) 필라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다.


줄리아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결혼했으나 기원전 54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동맹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사리온(Ptolemaios XV Caesarion).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클레오파트라는 그를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무너뜨린 후, 카이사리온은 17세의 나이로 살해당한다.     


입양된 아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 후일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생물학적 아들이 아닌 옥타비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로 인해 경쟁자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치르지만 후세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후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 사후 로마의 첫 황제가 되었다.     


<갈리아 전쟁기> 줄거리

<갈리아 전쟁기>는 기원전 58년(42세)에서 기원전 51년(49세)까지 갈리아를 정복한 8년 동안의 전쟁 기록이다.      


이 책은 카이사르가 쓴 일곱 권과 그의 부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쓴 여덟 번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펼치면 다음과 같은 글이 가장 먼저 나온다.     


카이사르의 글은 간결하고 질박하고 힘이 있으며, 결코 화려한 수식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관찰력,

생사의 고비에서도 잃지 않는 객관성,

또한 격렬한 전투 상황에 대한 생동감 있는 그의 묘사는

전쟁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체 줄거리

<갈리아 전쟁>은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벌어진 카이사르의 군사 작전을 3인칭으로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전쟁을 치르면서 상세한 내용을 적어 계속 로마로 보냈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서 몇 명을 죽이고 어느 지역을 정복했다”라고 하지 않고 “카이사르는” 혹은 “카이사르가”를 사용해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했다. 이 선택은 탁월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마들을 비롯해 모든 군마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 보냄으로써 모두가 위험을 똑같이 감수하고 어느 누구도 도망칠 기회를 노리지 못하게 하고는 대원들을 격려한 다음 교전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역사적으로 로마 영토 확장을 기록하며 자신의 성공과 전쟁에 대한 도덕적 추론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훌륭하고 정의로운 지도자로 묘사했다.


이는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했으나 확실히 카이사르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 책에서 카이사르는 갈리아 민족과 게르만 민족의 관습, 지리, 사회에 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또 카이사르의 전략적 천재성, 다양한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 군대를 관리하고 로마 원로원을 상대하는 정치적 통찰력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카이사르와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 연합 부족과 대결하는 장면이다.


여러 번의 전투 끝에 카이사르는 알레시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포위하고 패배시켜 갈리아에서 로마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베르킨게토릭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 정복에 맞서 갈리아인의 저항을 통합했고 카이사르와 당당하게 맞섰다. 그는 갈리아의 왕자이자 막강한 전쟁 지도자였다.     


갈리아 전쟁 후반기에 등장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 정복에 맞서는 갈리아 저항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만난 전투는 알레시아 전투(Battle of Alesia, 기원전 52년)가 가장 유명하다.


이 전투는 로마군과 갈리아 연합군 간의 대결로 베르킨게토릭스가 청야전술로 모든 식량을 태워 카이사르를 압박했으나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났으며, 갈리아 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주요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게르고비아 전투(Battle of Gergovia)

베르킨게토릭스는 흩어진 갈리아인을 연합하여 갈리아의 요새 도시인 게르고비아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카이사르가 700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후퇴하자 갈리아 부족들은 더욱 결속했다.     


알레시아 전투(Battle of Alesia)

알레시아는 현재 프랑스 동부 지역이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식량을 현지 조달하는 로마군의 상황을 파악하고 인근의 모든 마을과 곡식을 불태운다. 그리고 알레시아 요새에 숨어들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식량이 떨어지자 카이사르는 고민했다. 계속 굶을 수도 없고 만약 후퇴한다면 많은 군사를 잃게 될 것이 뻔했다.


카이사르는 로마군의 진지를 구축하고 요새를 포위하면서 독특한 이중 포위망을 만들었다.     


요새에 갇힌 베르킨게토릭스는 고립되었고 갈리아의 지원군이 빨리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어마어마한 지원군이 몰려들었다.


당시 로마군은 5만 명이었고 베르킨게토릭스의 병력은 8만 명이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뭉친 갈리아 연합군은 25만여 명에 달했다. 카이사르는 숫적으로 열세였고 겁을 먹는 것이 당연했다. 적지에서 적은 숫자로 용맹한 군사들과 싸운다는 것은 배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 요새를 둥글게 포위하고 새로 밀려올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이중으로 포위망을 만들어 몰려드는 갈리아군의 허점을 노려 쳐들어갔다.


갈리아 연합군은 로마군을 격파하고 요새 내부와 협공하려 했으니 카이사르의 작전에 말려 구멍이 뚫리자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러 온 베르킨게토릭스


자신을 도우려고 결속한 25만 명의 대군이 도망치자 결국 보급이 끊긴 베르킨게토릭스는 기아와 압박에 굴복하고 카이사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대목에서 카이사르의 전략은 제갈공명도 혀를 내두를 신의 한 수였다.     

믈론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고 33만 대 5만이라는 병력은 카이사르의 주장이므로 다소 부풀려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카이사르는 이중 포위망이라는 독창적 전략을 통해 갈리아군의 모든 돌파 시도를 저지했다. 그리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참호, 가시나무 덫, 함정을 설치하여 갈리아군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갈리아군의 패인은 결속력이 부족한 점이었다. 이들이 끝까지 숫자로 밀고 들어왔다면 제 아무리 카이사르라 해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갈리아 부족 간의 단결력이 약해 충분한 병력을 조직하지 못했고 지원군은 로마의 외부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로 보내져 6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카이사르가 전쟁을 끝내고 개선식을 하던 기원전 46년 처형되었다.     


알레시아 전투의 성공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갈리아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속주가 되었으며 로마화가 진행되었다.     


갈리아 전쟁에서의 승리는 카이사르를 로마의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켰다.


카이사르는 막강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로마 내전(기원전 49년~45년)을 시작해 결국 독재관의 자리에 올랐다.     

후일 알레시아 전투는 고대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승리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 두 권의 전쟁 기록 책을 썼다. <내전기>는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의 말을 듣지 않고 루비콘강을 건너 폼페이우스와 싸운 내용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로마 여행기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내려 고속 지하철을 타고 테르미니역에 도착했다. 숙소는 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로마에 갔다. 성탄 트리가 곳곳에 보였고 로마의 대표 역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역이라 편할 것 같아서 근처에 숙소를 잡은 것은 결과적으로 나의 실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탈리아에서 가장 소매치기가 많은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캐리어가 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테르미니역에는 경찰도 많았고 심지어 군인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유럽, 세계인들이 모여드는 이탈리아에서 왜 소매치기를 단속하지 못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애로사항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소매치기를 하는 사람이 모두 이탈리아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듣기로 성탄절은 소매치기들의 대목이라 전 세계에서 유럽으로 원정을 온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이 이야기는 며칠 후 자전거투어로 남부 폼페이와 소렌토를 다녀오면서 한국 가이드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우리는 먼저 숙소부터 들러 짐을 풀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모두 금고에 넣고 꼭 필요한 소량의 유로만 지니고 나갔다.


가방은 어깨에 둘러메어 앞으로 돌리고 그 위로 점퍼를 입어 앞에서는 힐끗 가방이 보였지만 뒤에서는 가방끈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주머니에 든 휴대폰만 잘 간수하면 되었다. 야무진 딸은 휴대폰을 연결하는 끈을 미리 구입하여 손목에 찼다. 자기 가방은 숙소에 두고 어디서 샀는지 허름한 에코백을 들고 있었다.     


나는 중요한 물품은 복대에 넣어 허리에 차고 그 위에 셔츠를 입었다. 하도 소매치기가 많다고 주의를 주었기에 옷도 일부러 허름하게 입었다.


인터넷에서는 옷도 허름하게 입고 가급적 없어 보이는 옷차림으로 다니라고 했다. 심지어는 보부상 차림, 난민 차림으로 다녔다는 웃지 못할 후기도 있었다.


그렇다면 멋진 곳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일부러 로마로 여행을 온 신혼부부들은 모두 타깃인가? 하는 생각에 설마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소매치기당하지 않도록 완전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미리 찾아놓은 맛집을 찾아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었다.


역시 이탈리아에서 먹는 피자는 맛있었다. 그리고 가장 맛있었던 건 젤라또 아이스크림이었다.

    

제일 많이 먹었던 젤라또


“엄마, 여기서는 무조건 1일 3 젤라또야.”     


아이들은 추위도 잊은 채 길거리에서 젤라또를 먹으며 행복해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시내 구경을 하려고 했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6시도 채 되지 않았지만, 왠지 느낌이 싸해서 거리를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숙소가 역에서 5분 거리였으나 대로변이 아니고 하나의 뒷골목을 거쳐야 했다.


일단 슈퍼에 들러 필요한 물과 먹거리를 최대한 많이 사서 숙소 쪽으로 걸었다. 그새 날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큰 도로에서 작은 도로로 접어들었다. 건물 뒤쪽에서 도로를 하나 더 건너서 모퉁이를 돌면 바로 우리 숙소였다.


그런데 우리가 건너야 할 방향에서 시커먼 사람 대여섯 명이 무단횡단으로 우리 쪽을 향해 건너오고 있었다. 순간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리도 무단횡단으로 저쪽으로 건너가요. 너무 빠른 걸음으로 걷지 말고 태연하게 걸으세요.”     


나는 아들을 따라 천천히 건너편으로 건넜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들이 잠시 당황하는 기색으로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치였다.


만약 그들이 뛰어온다면 우리를 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둘러보니 주위에는 우리 셋과 그들밖에 없었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택시 한 대가 들어오더니 서너 사람의 여행객이 우리 앞에서 내렸다.


우리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뛰다시피 골목 모퉁이를 돌아 호텔로 들어갔다.     


카운터가 보이고 환한 불빛이 보이자 안심이 되었다. 물론 그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목적으로 무단횡단하여 건너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방으로 들어와 한숨을 돌렸다.      


로마 뒷골목


하필이면 우리가 도착하기 하루 전날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 소매치기에게 돈을 뺏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칼을 맞았다는 뉴스를 방금 피자 먹으면서 본 뒤라 더 긴장했는지도 모른다.


미국으로 수학여행 갔던 아들도 지갑의 돈을 통째로 뺏긴 경험이 있기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하버드, MIT, 프린스턴 등 대부분 대학 투어였다. 국제고라 외국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가고 싶은 대학을 둘러보는 취지의 여행이었다.


도착한 이튿날 저녁 무렵, 선생님이 한 쇼핑 상가에 아이들을 내려주고 몇 명씩 모여서 함께 다니라고 일렀다.      

평소 삼촌 덕에 미국에 자주 다녔던 아들은 겁 없이 아이들과 헤어져 옆 쇼핑센터로 향했다.


그때 서너 명의 백인과 흑인이 섞인 청년들이 아들을 보고 오라고 손짓했다. 뒤돌아서 빛과 같이 달려 일행이 있는 쇼핑센터로 갔으면 좋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머뭇거리며 아들이 다가가자 그들은 CD 한 장을 내밀었다.     


“너 이 가수 알아?”     


아들이 보니 아는 가수라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너 여기에 인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인했다고 한다.     


“자, 이제 이 CD는 네 거야. 너 돈 가진 거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빙 둘러선 그들에게 아들은 짧게나마 살의를 느꼈다고 했다.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며 얼마냐고 물었더니 50달러를 내면 된다고 했다.


어이없는 가격이었지만 빨리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아들은 지갑을 열어 50달러를 꺼냈다.


바로 그때 덩치가 가장 큰 청년이 지갑에 든 나머지 지폐를 움켜쥐었고 그들은 곧 뛰어서 도망쳤다.     


아들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따라갈 수도 없었다고 했다. 만약 따라갔다면 더 큰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하필이면 여행 이튿날 가지고 간 돈을 몽땅 빼앗긴 터라 아들은 기가 죽었다.


다행히 선생님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런 경우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두었다며 아들이 빼앗긴 돈의 반을 돌려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껴 쓰고 빌려 쓰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으이그, 그러게 왜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고 혼자 다녔냐?”라고 혼을 내고 싶었지만, 별일 없이 온 것이 고마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다치지 않았으니 잘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그런 전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여행 내내 우리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한순간도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빼앗기거나 잃어버린 것은 없이 돌아왔지만, 도대체 뭐 하는 건지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혹시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나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인터넷에 ‘로마 여행 소매치기’라고 입력해 보기 바란다.


멀쩡히 목에 걸고 있는 금목걸이를 채가는 것은 기본이요, 복대 팬티, 도난방지 벨 등 상상도 하지 못할 체험기를 만날 것이다.      


물론 내가 너무 소심해서 과장된 행동을 했다면 정말 그것이 기우이기를 나 역시 진심으로 바란다.     


로마 시내는 피렌체와 마찬가지로 걷다가 마주치는 것들이 문화재요, 유명한 명소였다.


스페인 계단, 바로 앞이 스페인 광장이다.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이브에 도착해서 성탄절에 바티칸을 가려고 했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바티칸은 크리스마스 당일 미사가 있어서 관광객은 입장 불가였다. 아예 운영을 하지 않았다.


역시 여행은 사전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 외에도 휴일은 중요한 유적지가 문을 닫는 곳이 많았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트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 나보나 광장, 판테온 신전 등 그냥 거리에 있는 문화재들을 보러 다녔다.  

   

판테온 신전, 트레비 분수


온종일 로마 시내를 걸었더니 발바닥이 너무 아팠다. 로마 시내는 바닥이 울퉁불퉁한 벽돌로 되어 있어서 가급적 밑창이 튼튼한 운동화를 신는 것이 좋다.


나는 걷기 좋게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가서 할 수 없이 양말을 두 켤레씩 신었다. 그래도 발바닥에 울퉁불퉁한 감각이 느껴졌다.      


로마 도로, 이 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은 곳도 있다.


캐리어도 튼튼한 바퀴가 아니면 돌에 걸려 망가져서 길가에 망연히 서서 어쩔 줄 모르거나 캐리어를 안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카이사르 신전

카이사르 신전은 로마 최초로 사람을 신격화하여 헌정한 곳이다. 포로 로마노에 자리하고 있다.      


이 신전은 BC 42년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건설을 시작하여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후 BC 29년 8월 18일에 양아버지 카이사르에게 헌정하였다.     


카이사르 신전


카이사르 신전은 카이사르가 죽은 뒤 화장했던 곳으로 카이사르의 마지막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데 신전의 뒤쪽에는 카이사르를 화장했던 장소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그 폐허가 된 신전의 봉분 위에 지금도 많은 사람이 끊이지 않고 꽃을 바치고 있다.      


콜로세움 입장권을 끊으면 포로 로마노까지 함께 둘러볼 수 있으니 카이사르 신전도 당연히 볼 수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콜로세움이었다.     


고대 로마의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인 콜로세움은 약 50,000~8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콜로세움은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7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에 의해 80년에 완공되었다.      


위치는 로마 중심부에 있으며 황금의 집 일부인 네로의 인공 호수 부지에 지어졌다.     


타원형 모양의 콜로세움은 길이가 189미터, 너비가 156미터로 원형극장은 4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층은 다양한 건축 양식(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콜로세움의 첫 경기는 수천 마리의 동물과 검투사가 참가한 가운데 100일 동안 지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 대회, 동물 사냥, 공개 처형, 모의 해전, 극적인 공연이 열려 관중을 즐겁게 했다.      


이곳은 현재 로마에서 관광객이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로 지금도 그 웅장함을 잃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7대 불가사의한 건축물로 명성이 높다.     


그 옛날에도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검투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고 하니 로마인의 건축 수준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중들은 80여 개의 아치문을 통해 입장하는 데 30분, 퇴장하는 데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황제와 노예까지 함께 관람을 했는데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랐다.

    

콜로세움


1층은 귀빈석, 2층은 일반석, 3층은 입석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검투사들의 잔혹한 경기가 계속되다가, 450년 호노리우스황제가 경기를 중지시켰다.      


글래디에이터 영화를 보아서인지 객석을 꽉 채운 로마 시민과 목숨 걸고 사투를 벌이는, 검투사로 전락한 막시무스의 맹활약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과연 동물을 풀어 사람과 싸우게 한다거나 검투사끼리 진짜 칼을 휘둘러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죽여라”를 외치던 로마 시민들의 광기는 과연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이, 한 가지 콜로세움을 가려면 예약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표를 사기 위해 몇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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