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피렌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메디치 가문이 생각난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단테, 라파엘로 등 예술가는 물론 학자, 사상가를 통 크게 지원한 메디치 가문과 그 혜택을 받으며 명성을 떨친 여러 예술가 이야기만으로도 피렌체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단테의 <신곡>이다.
3권으로 된 <신곡>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책 중 굳이 <신곡>을 고른 것은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한번 정리해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신곡>은 학교 교과서에도 나오고 문학사에서 늘 언급되는 작품이지만 책이 어려워서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신곡>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르네상스 시대를 배우며 세계사 교과서에서 <신곡>을 보았고 호기심에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찾아보았다.
당시 내 독서 스승은 교과서였다. 누가 나에게 이러저러한 책을 읽으라고 지도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기 초에 나누어주는 꼭 읽어야 할 교양 도서는 읽은 후 하나씩 지워나갔고 그 책을 다 읽으면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이나 시, 철학서 등을 메모해 두었다가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다.
책은 읽을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내가 빌려온 <신곡>은 한 권으로 되어 있어 꽤 두꺼웠고 글자는 깨알 같았다. 일단 책을 무식하게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읽었다기보다 그냥 넘겼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싶다. 솔직히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몰랐으니까.
이후 <신곡>은 몇 번 더 읽어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서사시로 되어 있는 <신곡>은 한 줄씩 읽어 가면서 이해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주석을 읽다가 아예 책을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몇 년 전부터 우연히 김상근 교수의 인문학에 빠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오이디푸스> 등 고전의 고전이 되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신곡>에 대한 강의를 듣고 다시 읽기에 도전하자 조금씩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래서 어지간히 걸림돌이 되지 않으면 주석을 무시하고 읽어 내려갔다. 일단 나에게는 끝까지 읽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지금도 나는 <신곡>을 다 읽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여전히 <신곡>은 그저 넘겨 본 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신곡>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성경의 신약, 구약, 전도서와 그리스·로마신화, 철학, 천문학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테 동상(자료-픽사베이)
일단 <신곡>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사람을 사전 지식으로 알고 있으면 편하다.
첫 번째는 단테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단테의 뮤즈였던 베아트리체, 세 번째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 그리고 네 번째는 로마 시대 시인인 베르길리우스다.
<신곡>에는 창세기부터 시작해 단테가 알고 있는 유명 인사들은 모두 등장한다. 대충 1,000여 명이 넘는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 한 명 한 명을 이해하고 책을 보려면 아마 평생 걸려도 힘들지 않을까 싶다.
가령 지옥의 맨 마지막 9층에는 배신 지옥이 있는데 이곳은 살아생전 배신을 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곳에는 가롯 유다와 브루투스, 카시오스 등이 있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판 사람이고 브루투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를 여러 원로원과 함께 칼로 찌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이 대목에서 단테가 말하는 배신의 아이콘을 이해하려면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거나 아니면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했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롯 유다가 지옥의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은 그가 예수를 판 인물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사전 지식이 많은 사람은 책 읽기가 수월할 것이고 사전 지식이 없을수록 책 읽기가 어려워진다. 책을 넘길수록 생전 보도 듣지도 못한 인물들이 끝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글은 결코 내 우둔한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연세대 김상근 교수 외 인문학 강의와 <신곡>을 풀이한 여러 권의 책을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신곡>이 위대한 이유
단테는 라틴어가 공용어이던 당시에 라틴어가 아닌 피렌체의 토스카나어로 그리스·로마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발표하여 보카치오와 함께 ‘문예부흥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신곡은 라틴어가 대세였던 당시 평범한 피렌체 시민들이 평소 쓰는 관용어, 속어 등을 그대로 문자화했다.
이전에 쓰인 문학 작품이 대부분 라틴어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신곡은 이탈리아어로 쓰여 더욱 가치가 있는 셈이다.
<신곡>은 현재 이탈리아 교과서로도 쓰인다.
이후 수많은 작가가 단테의 작법을 따라 했고 단테는 ‘현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가 단테에게 흥미를 느꼈던 점은 <신곡>에 영감을 받아 예술을 한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그중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이 단테라는 점과 원래 이 작품은 로댕의 <지옥의 문>의 일부라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지옥의 문(Porte de l`Enfer)>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으로, 그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근거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미술사는 잘 모르지만, 미술사에서 로댕의 <지옥의 문>은 그의 전 작품을 집대성한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로댕 <지옥의 문>
<지옥의 문> 작품 안에는 ‘생각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모두 19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크기는 약 6미터 높이에 넓이가 4미터다.
로댕은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30년 넘게 구상하고 많은 고뇌를 했다. <지옥의 문>을 살펴보면 ‘생각하는 사람’ 외에 ‘추락하는 사람’, ‘세 망령’, ‘웅크린 여인’, ‘입맞춤(Kiss)’, ‘아담’, ‘이브’ 등, 로댕의 전 작품들을 모두 모아놓았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문 위에 있는 세 명의 인물은 지옥에 거주하는 ‘세 어둠(Trois Ombres)’을 묘사한 것으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아담을 변형한 인물이다.
다음으로 그림 중앙 맨 위에 인간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단테다.
이 외에도 <신곡>은 많은 예술가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어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성 시스티나 성당에 <최후의 심판>을 프레스코화로 그렸다. 들라크루아는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윌리엄 블레이크와는 수채화와 판화 시리즈 제작, 구스타브 도레는 <신곡>의 삽화 및 흑백 판화를, 산드로 보티첼리의 <지옥의 지도>도 빼놓을 수 없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1822)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신곡>에 대해 “인간의 손으로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했고, 보르헤스 역시 “모든 문학의 절정”이라고 말했다.
<신곡>의 영향을 받은 문학가와 음악가 철학가도 많다.
T.S. 엘리엇의 <황무지>, <4중주>와 같은 그의 시에는 영적 투쟁과 구원이라는 단테의 주제가 반영되어 있다.
TS 엘리엇은 “단테와 셰익스피어가 근대를 나눠 가졌다. 제3자는 없다”라고 극찬했다.
존 밀턴의 <실낙원>,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도 마찬가지다.
작곡은 프란츠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와 <단테 교향곡>,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교향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푸치니의 오페라 <Gianni Schicchi>, 조반니 파치니(Giovanni Pacini)의 <신포니아 단테(Sinfonia Dante)>가 유명하다.
이 외에 프리드리히 니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연옥 편을 소재로 한 1995년 범죄스릴러 <세븐>과 2016년 지옥편을 그린 스릴러 <인페르노>(2016, 댄 브라운 원작) 등의 영화도 있다.
이처럼 단테의 <신곡>은 여러 분야에 걸쳐 계속해서 창의성을 고취하며 그의 비전이 지닌 시대를 초월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은 중세 시대를 초월하여 수많은 세대의 예술가와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쳤고 물론 앞으로도 미칠 것이다.
단테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는 중세 피렌체 공화국의 시인, 정치인, 철학자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와 더불어 세계 4대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본명은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이며 단테는 두란테의 약칭이자 애칭이다.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가 그린 <단테와 세 왕국>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던 단테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시뇨리아 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어 ‘산타 마르게리타 3번지’의 3층 벽돌집이 그가 피렌체에서 추방되기 전 35살까지 살았던 집이다.
단테의 집 입구
이 집은 오래전에 없어졌던 생가를 1865년 피렌체시가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복원한 것이다.
이후 미술작품 갤러리로 사용하다가 1965년 단테 탄생 700주년을 맞아 리모델링했다.
좁은 층계를 올라가면 7개의 방이 나오는데 단테의 침실과 서재 그리고 행적을 시대별로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전시해 두었다.
건물 외벽에는 청동으로 만든 단테의 흉상이 걸려 있다.
바닥에 물을 뿌리면 나타나는 단테의 옆모습과 벽에 걸린 흉상
피렌체의 비교적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단테는 어려서부터 다방면으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도미니쿠스 수도원에 출입하면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당시 피렌체의 뛰어난 철학자, 정치가였던 브루네토 라티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286~1287년에는 세계 최초의 대학이 설립된 볼로냐에 체류하면서 여러 문인과 교류하고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수학한 뒤 22세 되던 1287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단테는 젊은 시절부터 시인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295년 무렵 정치활동에 참여했고 1300년 6월에는 6명으로 구성된 피렌체 최고 행정 위원에 선출되어 성공한 정치인으로 살았다.
당시 토스카나 공화국은 1289년 교황파(Guelf)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파(Ghibelline)를 누르고 권력을 장악했다.
교황 파는 다시 교황을 지지하는 흑파(Neri)와 교황을 반대하는 백파(Bianchi)로 나뉘어 갈등상태에 있었다.
토스카나 공화국을 통치하는 6인 중 한 사람이었던 단테는 1301년 10월, 다른 두 명과 함께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특사로 로마에 파견되었다.
백파의 수장이었던 단테에게는 피렌체의 독립이 누구보다 절실했다.
그러나 단테가 피렌체를 떠난 사이 교황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8세의 요청을 받은 프랑스 샤를(Charles de Valois)의 군대가 진격하여 피렌체를 점령하고 흑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1302년 1월, 흑파는 단테에게 뇌물혐의를 씌워 엄청난 액수의 벌금과 추방, 그리고 영구히 공직 자격을 박탈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단테는 백당파를 규합해 피렌체를 탈환하려 하지만 실패했다. 흑당파는 단테가 유죄를 인정하면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단테가 거부하자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단테는 피렌체로 돌아올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는다.
이후 단테의 21년에 걸친 망명 생활이 시작된다.
당시 단테는 부인 엠마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가 있었다.
가족과 헤어져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된 단테는 이탈리아 전역을 방황하다가 라벤나의 영주 폴렌타(Guido da Polenta)에 의탁하여 살았다.
단테의 신곡은 21년에 걸친 망명 생활에 쓰였다. 한 왕국의 수장이었던 단테가 갈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나락에서 쓰디쓴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신곡은 그런 처지에서 쓰인 책이다.
이후 흑당파가 무너지고 피렌체 시민들은 단테의 귀환을 호소했지만, 자신을 배반하고 우정을 배신했던 동료들과 자신을 추방했던 조국에 대한 노여움을 풀지 못한 단테는 유랑생활을 계속하다가 라벤나에서 말라리아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신곡> 책
그는 몸소 병상에서 쓴 여섯 줄의 묘비명, “여기 나 단테가 고국에서 추방되어 누워 있다”라는 글을 새긴 석관에 누워, 아드리아해 파도 소리가 들리는 라벤나의 사원에 묻혔다.
라벤나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있는데, 그 비용은 단테를 추방한 피렌체시가 속죄하는 의미로 매년 라벤나 시에 지불하고 있다.
혹자는 만약 단테가 추방당하지 않고 정치가로서 평탄한 일생을 살았다면 그는 소도시 피렌체를 다스린 높은 관리로 알려졌을 뿐 신곡은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단테
피렌체에서는 지난 2008년 단테를 추방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라벤나에서는 ‘은혜를 모르는 고향 피렌체’라며 이장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피렌체는 포기하지 않고 단테의 빈 무덤을 만들어 두고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테의 시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1308년 무렵에 쓰기 시작해 1321에 완성한 <신곡>은 영혼의 구원을 서사시로 표현한 불멸의 역작으로 학계에서 인정받는 대작이다.
책은 총 1만 4,233행의 서사시로 되어 있다. 그러나 14~15세기의 필사본만 여럿 있고, 단테가 쓴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단테는 <신곡> 외에 뮤즈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과 상심, 좌절을 시와 산문 복합체로 쓴 <새로운 삶(新生, Vita Nuova)>, 철학 및 윤리를 다룬 <향연>, 교회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논한 <제정론>, <속어론> 등의 책을 남겼다.
두 번째 인물은 단테의 연인 베아트리체다.
사실 <신곡> 탄생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이었다.
단테는 9살에 동갑인 베아트리체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지고, 9년 뒤 아르노강 위의 베키오 다리에서 우연히 그녀와 재회하면서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9살에 사랑을 시작한 것을 보면 단테는 무척 조숙했던 모양이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운데 노란 드레스)의 만남
그러나 그때는 단테도 베아트리체도 각각 집안에서 맺어준 다른 상대와 결혼한 뒤였다.
베아트리체는 18세에 결혼해서 1290년 2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단테는 너무나 슬픔에 빠져 베아트리체를 영원한 뮤즈로 마음속에 담았다.
이후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작품 속에서 완벽하고 이상적인 여인의 이미지로 승화되었다.
베아트리체가 실존 인물인지 아니면 신곡의 천국 편에서 단테를 인도하는 구원의 여성상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단테 집 근처에 살았다는 베아트리체 집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복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연옥의 산꼭대기에 있는 지상 천국에서 단테를 맞이하고 단테를 천국으로 안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베아트리체는 <신곡>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인물이다. 베아트리체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미덕을 구현하는 신성한 사랑, 은혜, 영적 깨달음을 상징한다.
아무튼 베아트리체는 시대를 초월한 뮤즈로 남아 지금도 수많은 예술가, 작가, 음악가가 그녀의 이미지를 초월성과 영적 갈망의 표현으로 계속해서 그려내고 있다.
세 번째 인물은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다(BC 800년 전후).
호메로스는 <신곡>의 지옥편 림보에서 단테와 만난다. 림보는 기독교가 출현하기 이전에 살았던 고결한 이교도들과 세례 받지 않은 개인들의 거주지이다.
그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지는 않지만 신성한 계시를 알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기 때문에 신을 갈망하는 상태에서 살고 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저자 호메로스는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이다. 단테는 호메로스의 뛰어난 문학적 천재성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호메로스는 기독교 시대 이전의 인간 창의성과 지성의 정점을 상징하지만, 그가 림보에 배치된 것은 기독교 구원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고전 전통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준다.
호메로스 책
맹인이었던 호메로스는 기원전 8~7세기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스의 분노와 그 결과에 초점을 맞춰 트로이 전쟁의 사건을 설명한다.
그리고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10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따라 모험, 시련의 과정을 노래했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서양의 문학, 철학,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서사시는 영웅주의, 운명, 인간 조건이라는 주제를 확립했으며, 이는 현대 스토리텔링에서 계속해서 차용되고 있다.
호메로스의 시는 고대 그리스의 교육적, 문화적 초석이 되었다.
네 번째 인물은 로마 시대 베르길리우스(Vergilius, BC 70~19)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명한 로마 시인이었다.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와 함께 역대 최고의 라틴어 문학가라고 불렸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여러 작품이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현재로서는 <농경 시>, <전원시>, <아이네이스> 등 세 작품 만이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라고 인정받는다.
특히 로마의 시조로 추앙받는 영웅 아이네이스의 일대기를 소재로 쓴 대서사시 <아이네이스>는 당대 로마를 넘어 유럽 문학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된다.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70년 북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로마 대도시 상급학교에서 정치, 법률,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등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로마 전역에 알린 초기작 <전원시>는 목자들이 읊는 이상적 상상 세계, 현실의 불행에 대한 상투적인 비탄이 결합되어 언어적인 유려함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작품 <농경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폴리오에게 후원을 받았으나, 완성할 즈음에는 아우구스투스와 친밀해지면서 대표적인 문예 후원자인 마이케나스로부터 후원받았다.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 탁월하다고 느낀 후원자 마이케나스와 아우구스투스 등은 로마 역사를 다루는 장대한 서사시를 써 보라고 권유했다.
이후 베르길리우스는 11년 동안 <아이네이스> 창작에 매달렸다. 그는 그리스 지방으로 답사 여행을 떠났다가 이탈리아로 귀국한 후 곧 죽었다.
결국 <아이네이스>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죽기 전에 미완성 작품인 <아이네이스>를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으나, 아우구스투스가 이 같은 위대한 작품은 미완성 상태로도 충분하다고 하여 세상에 남게 되었다.
베르길리우스 책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지옥과 연옥을 통과하는 단테의 가이드 역할을 한다. 그는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저주받은 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영원한 형벌을 목격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태도는 단테의 종종 감정적인 반응과 대조되며, 이는 신성한 정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인간의 이성과 고전 세계의 지혜를 상징한다. 이성은 죄를 인식하고 피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베르길리우스를 대신하는 베아트리체가 대표하는 믿음과 신성한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곡> 줄거리
신곡은 지옥(Inferno), 연옥(Purgatorio), 천국(낙원, Paradiso) 3부로 되어 있으며 지옥 3일, 연옥 3일, 천국 1일을 다녀온 단테의 저승 여행기이다. 등장인물은 1,000여 명에 달한다.
단테는 숫자 3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이는 단테가 <새로운 삶>에서 밝힌 바와 같이 3위 일체 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단테는 또한 10이나 10의 배수를 의미 있게 여기는데 이것은 '완전'을 뜻한다.
작품의 세 부분을 이루는 ‘지옥편’과 ‘연옥편’, ‘천국편’은 각각 33편의 독립된 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옥편’에만 서곡이 추가되어 모두 100곡이다.
곡 하나하나는 일정치 않으나 대체로 140행 안팎에 달하며, 모든 행은 11음절로 구성되고 전체 14,233행에 이른다. 이러한 치밀한 구조는 단테가 제시하는 세계의 완전성을 받쳐 준다.
-지옥편-
작품은 부활절의 성(聖) 금요일을 하루 앞둔 목요일 밤, 잠에서 깨어나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서른다섯 살, 단테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1곡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새로 솟는다.
죽음도 그보다 덜 쓸 테지만,
거기서 찾았던 선(善)을 다루기 위해
거기서 보아 둔 다른 것들도 말하려 한다.
어떻게 숲에 들어섰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난 그때
잠에 취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단테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서로 다른 죄를 상징하는 세 마리의 짐승(표범, 사자, 암늑대)과 마주하게 된다.
절망에 빠진 단테의 앞에 존경하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Virgil)가 나타나 단테를 지옥으로 안내한다.
두 사람은 이승과 지옥의 경계인 아케론강(Acheronte)에 이른다. 뱃사공 카론이 죄인들을 강너머 지옥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강 주변에는 악에 침묵하며 생전에 어느 편에도 가담하려 들지 않았던 기회주의자들이 생전의 죄과에 대한 업보로 말벌, 말파리, 독충, 해충들에게 마구 쏘이며 한 폭의 깃발 뒤를 우르르 쫓아다니는 벌을 받고 있다.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이런 자들은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두 사람은 카론의 허락을 얻어 지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나아간다. 지옥문에는 불길한 말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에서 희망은 어둠을 뜻한다. 지옥은 빛이 없는 어둠뿐이다. 지옥은 깔때기 모양의 구덩이로 묘사되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
보티첼리 <지옥도>(오른쪽 그림)
제1층은 변옥으로 림보(Limbo)라고도 한다.
이곳은 고결한 비기독교인과 세례 받지 않은 영혼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들은 지옥에 있으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갈망 속에 존재한다.
울창한 숲에 현자들이 모여 살며, 벌을 받지 않으니 지옥이지만 그런대로 살만한 곳이다.
분위기는 매우 평화롭고 이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들은 일곱 겹의 벽으로 둘러싸인 성에서 산다.
지옥 안의 천국이나 낙원 같은 느낌이지만, 굳이 벌이라면 림보의 영혼들은 유일한 희망이 하나님을 보고 천국에 가는 꿈이라는 점에서 희망이 없기에 하나같이 탄식한다.
운이 아주 좋으면 연옥이나 천국에 갈 수도 있다. 이중 구약 인물들은 예수가 죽었다 살아났을 때 데려갔다고 한다.
이곳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탈레스, 엠페도클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키티온의 제논, 디오스코리데스, 오르페우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1세, 히포크라테스, 리노스, 키케로, 세네카, 갈레노스 등)이다.
그 외에도 아이네이아스, 헥토르 등의 트로이 측 인물들, 위대한 다섯 시인 중 4명(호메로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루카누스)이 있다.
지옥은 총 9개 층으로 나뉘어 있다.
1층 림보(Limbo, 신을 믿을 기회가 없었던 의로운 사람이 머무는 상태)
2층 음욕
3층 식탐
4층 탐욕
5층 분노
6층 이단
7층 폭력
8층 사기
9층 배신 지옥이다.
연옥(煉獄)은 지옥과 천국 사이에 있다.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방탕 등 7단계다.
천국 가기에는 부족하고, 지옥에 갈 정도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다.
천국은 9가지 하늘로 이루어져 있다.
월성천(선한데 불충실한 자)
수성천(야심 있는 자)
금성천(사랑이 충만한 자)
태양천(지혜로운 자)
화성천(용감한 자)
목성천(정의로운 자)
토성천(사색에 빠진 자)
항성천(악과 싸워 승천한 사람)
원동천(하나님을 만나는 곳)
제2층은 음욕지욕이다.
이곳은 바람을 피운 사람들이 머무는 곳으로 색욕에 빠져 간통 등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놓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폭풍에 휩쓸려 다닌다.
단테는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그녀의 남편의 동생이자 연인인 파올로를 만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 외에 클레오파트라, 헬레네와 파리스, 아킬레우스, 트리스탄이 있다.
제3층은 식탐지옥이다.
이곳은 폭음, 폭식과 중독에 빠진 자가 가는 곳이다. 죄인들은 더럽고 차가운 비를 맞으며 역겨운 흙탕물(진창)에 누워 신음하고 있다.
괴물 케르베로스가 시도 때도 없이 죄인들을 물어뜯는다. ‘치아코’라는 별명을 쓰는 피렌체 출신 남자가 있다.
제4층은 탐욕지옥이다.
탐욕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에 늑대의 모습을 한, 그리스 신화에서 부(富)의 신이었던 ‘플루투스’가 짓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일갈에 조용해진다.
이곳은 재물에 집착하여 죄를 지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다.
낭비가 심했던 자들과 인색했던 자들이 반대 방향으로 생전 자신들이 모아두었던 재산을 상징하는 짐을 굴리면서 서로 몸이 부딪히면 서로의 죄를 탓한다.
재물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살았기 때문에 성직자들도 많이 있다. 단테가 알만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얼굴이 시커멓게 칠해진 상태라 알아볼 수가 없다.
등장인물은 부패한 성직자들, 보니파시오 8세를 따랐던 상인 계층들, 플루투스가 있다.
제5층은 분노지옥이다.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죄를 저지른 자들이 가는 곳이다. 남을 미워하고 헐뜯다 살다 간 사람들이 이곳에 있다.
스틱스강이 주변을 두르고 있으며 중심부에는 디스의 성벽이 있다.
분노에 찬 자들은 늪 같은 흙탕물에서 서로를 물어뜯으며 허우적대고 있고 침울한 자들은 강 밑에 처박혀 있다.
등장인물은 플레기아스, 필리포 아르젠티다.
제6층부터 시작되는 지옥의 하부는 ‘디스 시’라고 불린다.
디스 시에 진입하려 할 때 악마들이 단테 일행을 방해하나 천사의 도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위의 지옥들이 절제를 못하고 간접적으로 남들에게 피해를 끼친 죄인들이 간 곳이라면 이곳부터는 직접 악의로 피해를 끼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제6층은 이단 지옥이다.
당시 해로운 사상을 믿고 퍼트린 이단자들이 가는 곳이다. 죄인들이 뜨거운 무덤 속에서 신음하며, 죄악의 정도에 따라 열의 세기가 심해진다.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면 무덤의 뚜껑이 영원히 닫힌다.
등장인물은 에피쿠로스,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 카발칸테 데이 카발칸티, 프리드리히 2세, 이름 모를 추기경,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다.
-7층부터 다음 호에 계속-
피렌체 여행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하게 된 것은 딸 덕분이었다. 딸의 절친이 아버지의 출장을 따라 두바이로 함께 떠나 외국인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5년을 기약하고 떠났는데 딸과 안부를 전하면서 늘 자신이 두바이에 있는 동안 여행을 오라고 했다.
딸이 절친과 친구가 된 것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였다.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두바이로 떠날 때까지 약 7년간 함께 많은 것을 했다.
나는 딸이 둘째여서 첫째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고 딸의 친구는 첫째여서 그녀의 엄마는 첫째에게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다행히 나의 첫째는 똘똘해서 첫째 친구 엄마들도 내게 많은 정보를 얻어가기를 원했고 딸 친구들 역시 어떻게든 딸과 함께 그룹으로 뭔가 하기를 원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자라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가르쳤다. 미술, 피아노, 수영, 스케이트, 스키 등 주로 예체능이었다.
내가 첫째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딸은 어느새 절친 두 명을 만들어 1학년이 끝날 즈음 삼총사가 되어 있었다.
2학년 교과서를 받는 날, 나는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기 위해 딸의 교실 앞에서 서성였다. 딸이 두 명의 여자아이와 종알거리며 나왔다. 딸이 ‘엄마’하고 부르며 나에게 달려오자 근처에 있던 두 명의 아주머니의 눈길이 나에게 쏠렸다.
딸의 절친 어머니들과 그날 학교 앞에서 차를 마셨다. 두 명의 아주머니는 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두 명의 지인을 만났고 그날 이후부터 3총사는 수영과 피아노, 미술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했다. 딸은 1학년부터 수영을 시작해 6학년에는 절친과 함께 한강 건너기 대회에 참가해 무난하게 한강을 건넜다. 미술과 피아노는 더 시키고 싶었으나 본인이 하고 싶지 않아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그만두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다 보면 엄마들끼리 친해지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딸의 친구 엄마는 곧 나의 지인이 되었다. 내가 결혼을 늦게 한 덕에 그녀들과는 띠동갑이었다.
“언니, 우리 내년 5월이면 귀국해요. 이번에 안 오면 이제 끝이야. 고민할 게 뭐 있어, 비행비표만 끊어서 와요.”
두바이, 사막 위에 세워진 신비한 나라, 물론 가보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지금이 아니면 내가 두바이에 갈 일이 또 있겠나 싶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딸아이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겨울방학을 며칠 남기고 나는 두바이행 티켓을 끊었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도 가겠다고 나섰다.
“너는 여동생 친구 사이에 끼고 싶니?”
내가 핀잔을 주어도 아들은 끄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다가 아랍에미리에트 항공사를 통해 두바이를 거쳐 유럽을 가면 티켓이 1인당 90만 원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90만 원이면 두바이를 다녀오는 요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시적으로 유럽 한 군데를 더 다녀오도록 항공사에서 행사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두바이에만 머물다 오기에는 뭔가 미진했다. 그래서 유럽 중 한 나라를 골라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하고 고민 끝에 이탈리아로 정했다. 영국,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 어느 곳이든 유럽이면 한 군데를 경유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눈치 빠른 아들은 우리가 두바이를 거쳐 이탈리아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통역 맡을게, 짐도 다 들어주고 심부름도 할게. 나도 좀 데리고 가.”
두바이보다 이탈리아에 꽂힌 아들이 조르기 시작했다. 국제고를 졸업한 아들은 영어를 잘했다. 생각해 보니 영어가 젬병인 우리에게 꼭 필요한 안내원이기는 했다. 그래서 숙소를 물어보았다.
“언니, 우리가 호텔 복층을 쓰고 있는데 방은 5개고 화장실이 4개야. 언니가 아들하고 같은 방 쓰고 딸내미들은 둘이 같이 쓰면 돼.”
두바이의 숙소가 해결되자 우리는 아랍에미리에트 비행기를 타고 두바이에서 일주일을 여행한 뒤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탈리아의 일정은 내가 짰다. 꼭 가고 싶은 도시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였다. 그러나 짧은 일정에 이 모든 곳을 다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 세 곳으로 압축했다.
피렌체 여행기를 시작한다.
피렌체는 한밤중에 다녀도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든 사람이 많으니 겁나지 않았고 늦게까지 문을 여는 가게도 있었다.
피렌체 밤거리, 사람이 많다
피렌체에서 볼 것은 단테 기념관, 우피치 미술관, 두오모 성당, 피사 사탑을 기본으로 하고 시간이 되는대로 나머지를 일정에 넣기로 했다.
우리는 역에서 가까운 호텔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호텔은 사람들의 평이 좋아서 예약했는데 엘리베이터가 두 사람이 타면 꽉 차는 수동 엘리베이터였다. 작동이 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짐을 나를 때 빼고는 대부분 계단을 이용해 오르내렸다.
3인용실은 침대 하나가 소파였다. 더블이든 싱글이든 두 개는 정상 침대고 한 개가 소파였다. 물론 성인 한 명이 충분히 누울 정도는 되었지만 뒤척여도 될 정도로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호텔을 4군데 이용했는데 4군데가 다 똑같았다. 돌아가면서 자자고 제의했으나 아들이 한사코 소파를 차지했다. 별로 짜증 내는 기색도 없이 흔쾌히 자겠다고 하니 미안하기는 했지만 그냥 두었다. 그렇다고 방을 두 개 잡자니 가격면에서 만만치 않았다.
짐을 풀고 피렌체 중앙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호텔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티본스테이크를 먹어야 한다고 해서 저녁에 달오스떼를 예약했기에 점심은 시장에서 간단히 때우기로 했다.
중앙시장은 1874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피렌체 대표 재래시장이었다. 한 바퀴를 돌고 유명하다는 곱창버거 집을 찾았다. 줄이 길지는 않았으나 주변에 햄버거를 들고 먹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곱창버거와 음료수를 주문해 먹었다. 아이들은 맛있다고 했으나 내 입에는 별로였다.
곱창 햄버거
중앙시장은 가죽제품도 꽤 유명했지만 일단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저녁에 다시 오기로 하고 산타마리아 노벨라 광장으로 갔다. 피렌체는 중요 유적지가 대부분 다 몰려 있어서 어지간한 곳은 걸어 다닐만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단테의 집이었으나 단테의 집은 위에서 설명한 관계로 넘어간다.
그다음 단테의 빈 무덤이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갔다.
산타크로체 성당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는 단테의 무덤이 있지만, 실제로는 비어 있다. 라벤나에서 숨을 거둔 단테의 진짜 유해는 산 피에르 마조네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래서 정말 단테를 추모하고 싶은 사람은 라벤나로 가고 있다. 피렌체시가 어떻게든 시신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갔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가는 두오모 성당
베키오 다리
단테가 젬마와 결혼 후 우연히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에서 18살의 꽃다운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눈 곳이다.
아르노강. 저 뒤에 보이는 다리가 베키오 다리다
단테가 다녔던 성당
단테가 다니던 성당은 어머니 몬나 테사와 함께 기도드리는 베아트리체를 훔쳐보던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단테는 이곳에서 젬마 도나티와 결혼했고, 아내와 베아트리체 두 여인의 무덤이 모두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단테가 다녔던 성당
몇 군데 가지 못했는데 벌써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예약해 둔 달오스떼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은 몇 달 전부터 미리 예약이 차서 피렌체를 가기로 정했다면 가장 먼저 우피치 미술관과 달오스떼를 예약해 두는 것이 좋다. 미리 예약하면 20프로를 할인해 준다.
피렌체 스테이크의 정확한 명칭은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Bistecca alla Fiorentina)’다. 피렌체 스타일의 비프스테이크라는 뜻이다.
비스테카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매년 8월 피렌체의 산 로렌조 광장 축제에서는 광장에 대형 모닥불을 지펴서 메디치 가문이 준비한 소고기를 구워 군중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마침 이곳을 방문 중이던 영국인이 이 고기를 먹으려고 영어로 ‘비프스테이크(beef steak)’를 외쳤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들 식으로 ‘비스테카’라고 발음하게 되었다.
티본스테이크
스테이크는 그램으로 팔았는데 우리는 티본스테이크를 시켰다. 과연 다 먹을까 싶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물론 아이들의 먹성이 좋아서 남기지는 않았다.
가격은 세 사람이 120유로 정도였는데 20%를 할인받아 95유로 정도에 먹은 것 같다. 지금 계산해 보니 14만 원 정도이다.
피렌체 중앙시장으로 가는 뒷골목
숙소로 돌아와 쉬다가 시간이 아까워서 중앙시장으로 다시 나갔다. 벨트, 가방, 지갑 등 가죽들이 아주 부드러웠다. 예쁜 명함 지갑이 한 개에 만원 정도였다. 돌아와서 줄 선물로 몇 개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