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자신이 겪은 가난을 나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를 하나만 낳았다고 했다. 형제들 때문에 혼나고, 책임을 떠안았던 기억이 너무 싫어서 그 감정을 나에게 투영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엄마는 나를 한 번도 크게 혼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아주 곱게 나를 키웠다.
하지만 우리 집 역시 넉넉하지는 않았다. 아빠는 일용직 용접공이었고, 우리는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가난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렸다. 학교에서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엄마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학비를 냈다. 돈을 못 낼까 봐, 가난이 보일까 봐 더 아꼈다.
치과에 갈 돈이 없을 때는, 예전에 치기공사들이 몰래 진료를 해주던 곳을 다녔다. 그렇게까지 아끼며 살았지만 엄마는 결국 젊은 나이에 틀니를 하셨다. 임플란트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 가난은 나에게도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임대아파트에 살았고, 그 사실을 숨겼다. 친구를 집에 초대한 적도 없고, 연애를 할 때조차 남자친구에게 다른 주소를 알려줬다. 차를 타고 집에 올 때면 일부러 다른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가난은 늘 숨겨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회사를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다시 기다려야 할까 봐, 다시 숨겨야 할까 봐, 내 아이들이 나와 같은 삶을 살까봐.
엄마는 가난을 주지 않기 위해 평생을 숨겼고, 나는 그 가난을 부끄러워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야 조금씩, 그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본다.
베란다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시간부터, 엄마가 짊어졌던 무거운 어린 날과, 우리가 함께 숨겨왔던 가난까지.
이 이야기는 아마도, 엄마에게서 나에게로 이어진 하나의 기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