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를 바꾸자(2)
“고객 중심이 아니라 제작자 중심, 그건 아니라고 봤어요. 작품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서비스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하고, 그 서비스 타이밍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핵심은 뭐냐면 지금 시청자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원하느냐에 맞춰야
하는 거예요. 그게 시의성이죠.”
- 장윤택 전 PD KBS 일요스페셜 책임프로듀서 /
KBS1TV <다큐인사이트> 방송의 날 기획 ‘지금/여기/우리’ 편 (2024.9.5.)
과거 KBS에서 이름을 날린 저명한 PD가 다큐멘터리에 관해 인터뷰를 할 때 남긴 말이다. 재난방송에도 중요한 교훈을 던진다. 시의성, 서비스 타이밍이다.
재난방송을 더 이상 불구경, 물구경, 고통 구경을 시켜주며 중계만 할 것이 아니라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일상으로의 회복을 도우려면 무슨 재난정보를, 어느 타이밍에 전달해야 할까?
여기 NHK 재난 프로그램 제작자 히라츠카 치히로가 'NHK 재난방송 시 전달할 정보와 시점'에 관한 예시를 정리해 보았다. 재난의 종류에 따라, 전개 과정에 따라 우선 전달해야 할 내용이 다 다르겠으나, 여기에 소개하는 사례는 자연재난이자 돌발 재난인 ‘지진’이 발생했을 때이다.
재난정보
① 지진 진도, 진원지, 쓰나미 발생 유무, 여진 정보, 화재 및 부상 방지, 대피 등 행동요령(가장 먼저 전달)
② 구급, 구조, 사상자, 건물 파손 등 인명 및 재산 피해 정보
③ 지인, 친척의 안부 확인 또는 무사함을 알리는 안부 정보
④ 식수와 식량, 화장실, 연료(휘발유) 등 생존 필수 정보 (일정 시간 경과 후)
⑤ 도로, 철도, 선박 등 교통정보
⑥ 수도, 가스, 전화 등 피해 상황, 복구 예상 시간, 급수 시간 및 장소 등 생활 인프라 정보 (2~3일 후)
⑦ 병원 및 진료과목 등 의료 정보
⑧ 이재민의 사회 경제활동 지원을 위한 생활정보, 자원봉사활동 정보 등 지원 정보(복구기)
⑨ 목욕탕, 이발소, 음식점 등 일반생활 정보 (1~2주 후)
⑩ 임시주택 및 주택융자 등 각종 행정정보
위 일본 NHK의 재난방송 제작자가 정리한 재난정보와 그 순서를 놓고 우리 재난방송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큰 시사점이 있다. 먼저, 지진 시 가장 먼저 전해야 할 정보는 지진 발생 직후 피해자의 불안을 제거하고 혼란을 최소화하도록 지진 규모, 진원지, 지진해일(쓰나미) 발생 유무, 여진 정보, 화재 및 부상 방지, 대피 등 ‘행동요령’이다. 대체로 우리 재난방송과 대동소이한 것 같으나, 우리 재난방송은 ‘지진해일(쓰나미) 발생 유무’에 관한 정보는 해일이 실제로 발생해 해일 경보나 주의보가 발령되지 않으면 방송에서 잘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은 ‘지진해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라는 것 자체도 중요 정보이기 때문에 대부분 지진 재난방송에서 지진해일 발생 여부를 알려준다. 이것이 재난을 뉴스거리의 관점으로 보느냐, 재난을 잠재적 피해자들의 눈높이에서 보느냐의 차이다.
다음으로, 인명 및 재산 피해 정보를 전하는 것은 우리나 일본이나 비슷한데, 눈길을 끄는 점은 일본에선 재난 지역에 거주하는 지인이나 친척의 안부 확인 또는 무사함을 알리는 안부 정보를 방송한다는 점이다. 안부정보 방송은 1964년 니가타 지진 때 처음 실시한 이래 재난 발생 때마다 실시되어 일본 재난방송의 기본 패턴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NHK의 경우, 지난 1995년 1월 17일 고베 대지진 이후 NHK 1 TV와 1 라디오는 뉴스와 보도 위주로, 교육채널과 FM채널은 안부정보 전용 방송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난 발생 시
이재민이 가장 알고 싶은 정보는 ‘가족의 안부’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이산가족 찾기 때처럼 가족과의 소식이 끊긴 사람들의 안부정보에 대한 갈급함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다.
이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KBS와 우리나라 방송국들은 그러나, 큰 사고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 그 재난 발생 구역 내의 이재민들과 구역 밖에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서로의 안부를 알고 싶어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방송은 따로 하지 않는다. 방송사가 하고 싶어도, 그 자리를 이미 SNS가 차지한 셈이다. 가령,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오픈 채팅 등에서 서로의 안부를 신속하게 알 수가 있고 거의 실시간으로 소통이 되기 때문에, 굳이 방송국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소식을 일일이 중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SNS를 사용하지 못하는 산골의 어르신이나 거동이 불편한 분들도 재난을 만날 수 있고, 이들의 안부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에겐 SNS가 무용지물일 수도 있다. NHK처럼 TV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적극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재난 발생 후 일정 시간이 지나 안정되면 당장 식수와 식량, 화장실 등 생존 필수 정보도 필요하다. 동일본 대지진 때는 피해 지역의 휘발유 관련 정보가 중요 정보였다. 또 피난과 구조를 위한 도로, 철도, 선박 등 교통정보도 요구된다. 이런 정보를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긴 하나, 우리 방송은 당국의 발표를 요약해서 전달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식이고, 일본의 방송은 이보다는 구체적으로 다루고, 오래 다룬다.
2~3일이 지난 뒤엔 수도, 가스, 전화 등의 피해 상황, 복구 예상 시간, 급수 시간과 장소 등의 생활 인프라 정보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 및 진료과목 등 의료 정보가 요구된다.
또, 재난 직후와 달리 복구기에 접어들면 이재민의 사회 및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생활정보와 자원봉사활동 정보 등 지원 정보가 필요해진다. 비일상적 생활이 일상화되면서 안정을 찾고, 심리적으로 여유가 생기는 1~2주 후엔 목욕탕 이발소, 음식점 등 일반생활 정보, 임시주택이나 주택융자 등 각종 행정정보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이어 새로운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재건 정보가 그 뒤를 잇는다.
우리 뉴스 시간에도 대체로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웬만한 큰 재난이 아니면 하루 이틀 정도만 집중적으로 다루고는 이내 특보도 안 하고, 메인 뉴스에서도 사라진다. 그리고 재난이 발생한 지 하루 이틀 날짜가 갈수록 새로운 소식은 별로 없어 보이니 ‘수사 진행 상황’이나 '복구 구슬땀' 소식만 다룬다.
거의 해마다 태풍이 북상해 집이 물에 잠기거나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붕괴 위험이 있는 집을 나와 마을회관이나 기타 장소로 대피하는 이재민이 상당히 많다. 태풍 재난방송 초기에는 이재민 집계 숫자를 보도하지만, 태풍이 지나가면 특보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집이 침수돼 임시주택 등에 사는 이재민들은 몇 날 혹은 몇 달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당분간 낯설고 불편한 임시 주택에서 잠을 자며 극도의 불편함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이들의 눈높이에서 하는 방송이 진정한 재난방송이 아닌가. 이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정보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방송하는 게 재난방송 본연의 역할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