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켜
아침에 일어나면 눈꺼풀이 부어 있다. 거울을 보면 눈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뭣고? 내가 봐도 거북한데 타인들이 보면 더 거북하겠지. 특히나 요즘은 마스크 시대인데 눈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는데 이 눈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솔직히 고민이 앞선다. 성형외과라도 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눈이 처진 것도 부족해서 아침이면 눈이 부어오르니 참 내가 보기에도 이것은 아니다 싶다. 아침부터 부정적인 에너지와 이별하지 못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비단 눈뿐만 아니라 몸이 하나 둘 문제가 생겨 말을 듣지 않는다. 덜렁덜렁거리다가 실수하는 일도 많이 생기고, 부끄러움이란 단어 앞에 익숙해지는 순간들도 더 많이 생긴다. 물론 다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도 눈꺼풀은 별로 변화가 없다. 거울을 보면서 탄력 있는 피부를 잃어버렸다는 절망감이 몰려온다. 물론 나이 들어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지만, 어디 이것이 비단 눈의 모양만이 문제이겠는가. 시력도 조금씩 문제가 생기고 인공눈물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나도 모르게 눈가가 떨리는 현상도 생겨 마그네슘도 먹게 된다.
젊은 날이 사라진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신체의 일부들이 조금씩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나 보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의한 것들도 있겠지만 어떤 것들은 이것이 아닌 저것의 선택 결과에 의해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그때 그 당시에 이렇게 아니고 저렇게 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꼼꼼하지도 않고 남의 비판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처럼 살았던 것 같다. 내 자리에서 선택할 수 있은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어쭙잖은 핑계를 대면서도 대범한 척 해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나이 들어 좋은 것도 있다. 사회 통념상 인정해주는 부분도 있다. 문제는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애써 힘들게 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용을 쓸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쌓인다. 그리하여 1톤의 생각만 하면서 1그램의 실천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행동할 뿐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미리서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하는 의도적인 연습이 때론 필요할 것 같다.
만산홍엽으로 무르익은 가을이다. 아름답게 물든 나뭇잎을 본다. 저 나무는 이제 떨켜를 생성하여 나뭇잎을 보내는 마지막을 찬란하게 준비하고 있다. 물론 떨켜 층이 없어서 마른 잎을 달고 모진 겨울을 보내는 나무도 있다. 겨울 산에 오를 때 보면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도 있다. 대부분의 나무는 스스로 떨켜를 만들어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겨울을 나기 위해 매듭을 짓는다. 아름답게 단풍을 만드는 일도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행위가 아닐까. 그런 의식을 통해 겨울을 안전하게 나고 있는데 우리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같다.
떨켜가 없는 나무를 보면 나뭇잎과 이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태어날 때 탯줄을 자르고 엄마와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가려면 잘 이별하는 법이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요즘 부모는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고 자녀가 결혼하면 자녀의 아이들을 키우고 잘 이별하지 못한 결과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삶은 없이 살다가 이 세상과 작별한다. 오죽하면 손주 돌봐 주는 할머니에 대한 일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었을까.
법명을 말하면 다 아는 모스님도 즉문즉설 강연에서 ‘손주 봐주지 말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자신의 자식은 자신이 키워야 한다고, 새들이나 짐승도 새끼를 낳으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는 것처럼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는 엄마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한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 혼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부모들은 자신이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과 이별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물론 나도 부모님께 의지하며 살아왔다.
내 아이들도 엄마가 키웠다. 출근하면서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정신없이 출근을 하고 퇴근 시간이 되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데리러 친정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늦은 날이면 시계도 볼 줄 모르는 아이들이 짜증을 내고, 올 시간을 감각으로 알아채는지 귀신같이 알고 집에 갈 채비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제 아이들이 자라고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는지 가물가물하다. 돌아보면 아이들은 자라고 엄마는 늙어가고 있었다. 나이 먹는다는 것이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래도 있지만 그건 긍정 에너지가 나올 때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엄마에게 미안해진다.
우리 인생도 나무처럼 떨켜가 있었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엄마의 수고스러움이 덜어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에 잘 이별하는 법이 필요하다. 사람과의 이별, 머릿속 기억과의 이별, 사물과의 이별, 이별이란 단어에는 많은 것들이 넌출거리며 따라 붙는다.
정말 잘 이별할 수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면 부어 있는 눈꺼풀 하나에도 이리 신경이 쓰이는데 하물며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가능할까. 나이가 들수록 작은 일에도 집착하게 되고 몸과 마음은 따로 움직이는데 걱정이다. 건강하게 잘 살아 백년쯤 산다면 이제 가을의 초입인데 벌써부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프로스트의 ‘가 보지 못한 길’이란 시처럼 우리는 가지 않는 길에 대해 아쉬움과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래서 잘 이별하지 못하고 사는 지도 모른다. 가지 않는 길에 대해서 늘 미련을 갖게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눈꺼풀이나 걱정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는 접어두고, 긍정적인 에너지에 집중하면서 잘 이별하는 법을 배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