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1톤 트럭]

by 전 율


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1톤 트럭은 나를 새로운 곳을 안내해 주는 길라잡이였다.

우리 가족 4인을 어디든 보내주는 우리 가족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3인용 1톤 트럭이었기에, 4인이 각 좌석에 앉아 이동하지는 못했다.

체구가 작고 어렸던 나는 항상 운전석과 조수석 뒤 조그마한 짐칸은 내가 일자로 누워 잠잘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나에게 그곳은 아늑한 요람이었고, 작은 아지트였다.


6살, 8살, 11살, 13살..

어느덧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버지의 1톤 트럭도 나이를 먹어 갔다.

여전히 우리의 1톤 트럭은 어디든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엔 언제나 아버지의 1톤 트럭이 함께 있었다.

(만화 ‘원피스’의 ‘고잉 메리호’처럼.)


15살..

어느덧 나도 청소년이 되었다.

남들과 비교하여 뛰어나야 하고 우위를 점해야 하는 경쟁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중학교 때 학교는 집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어서, 거의 매일을 시내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였다.

지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여전히 똑같은 루틴으로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등교를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집에서 모두 늦잠을 자는 바람에, 버스를 탈 시간을 놓쳐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부랴부랴 준비해서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아버지의 1톤 트럭으로 등교를 시켜 달라고 했다.


“ 빨리 가자, 어서 타”

그때가, 아버지와의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아버지의 차에 타는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못 보았던 풍경들이 놓여 있었다.

버스정류장까지 약 15분은 걸어서 가야 했기에, 빠른 걸음으로 부랴부랴 움직이다 보니,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차를 타고 등교를 하니,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등교를 하려고, 친구들과 수다 떨며 걸어가고 있는 꼬마아이들, 버스를 놓칠세라, 부랴부랴 뛰어가는 친구들. 자전거로 서로 경쟁하듯이 등교하고 있는 고등학교 형들.

오십천을 따라 수 놓여 있는 고요하고 정겨운 이쁜 풍경들.

버스 타며 이동할 때 느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늘 아버지와 둘이 있을 때에도 그랬듯 서로 말은 없었다.

오늘도 여전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아버지의 사랑은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덧, 학교 정문 앞까지 다 다랐다.

나처럼 아버지의 차를 타고 등교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학교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부터 차가 줄줄이 서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꼈다.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차는 왜 이렇게 다 고급지게 생겼을까..

고급진 승용차에서 하나둘 내리는 친구들의 얼굴들이 보였다, 전교 1등 하는 놈 전교 2등 하는 놈

옆반 까불이, 학교 짱.

그렇게 서행하며 전진하다 보니, 내가 내릴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아버지에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한 뒤 1톤 트럭에서 살포시 뛰어내렸다.


그때, 옆에서 나를 발견한 친구 한놈이 뛰어 오면서 말을 걸었다.

“너네 아빠차야?”

“응”

“너무 낡았는데?”

이 친구도 어렸었는지, 생각 없이 말을 막 뱉었다.

그 순간 아버지의 차를 쳐다보았다.

크게 생각하지 않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아버지의 1톤 트럭이 다른 시각으로 보였다.


아버지의 뒷 짐칸이 언제 저렇게 녹이 슬고, 허름해졌었지...

내가 나이 먹은 만큼, 아버지의 1톤 트럭도 엄청 나이를 먹었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농기계엔지니어여서, 저 뒷 짐칸으로 수많은 농기계들이 실리고 내려지고 하며 작은 상처 큰 상처들이 났었을 것이다.

그 상처들이 다 녹이 슬어 버렸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버지의 1톤 트럭이 부끄러워진 것이....


다른 고급승용차들 사이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아버지의 1톤 트럭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아버지의 차를 타고 등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학교 정문 앞에서 내리지 않았었다.

학교 다다르기 1km 정도 전에, 중간에 친구와 만나 같이 걸어가기로 했다고 하며,

아버지에게 세워 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1km 전에 세워 달라고 한 의도를 아버지도 아셨을 것 같다..

그때 아빠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표현은 안 하셨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 뒤로도, 정말 비가 많이 오지 않는 날 외에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등교하는 일을 거의 드물었다.

그 뒤,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는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터라, 주로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했다.

여전히 우리 아버지의 1톤 트럭은 우리 가족의 이동수단이었다.

어느덧 우리 가족들 중 나와 여동생은 한 명분을 차지할 정도로 덩치도 커졌다.

이제는 1톤 트럭이 너무나도 비좁아졌다.

운전석과 조수석 뒷자리에 있던 짐칸은, 성인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린 이제, 그나마 자리가 좁은 중간 자리에는 한 명, 조수석자리에는 무릎에 앉아 2명이 타고 움직였다.


차가 좁아지니, 차 좀 바꾸자고 몇 번을 이야기했다.

그때, 차가 창피하다고 까지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나이를 먹다 보니, 나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1톤 트럭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거 같았다.


어느덧 21살이 되던 해, 군대를 가게 되었다.

2010년 겨울 유난히도 그 해는 눈이 많이 왔었다.

그해 중 어느 날 또한 통신 가설병이었던 나는, 군부대 유선전화가 먹통일 때, 막사 지붕 위로 올라가서 작업할 때도 종종 있었다.

눈이 미쳐 다 녹지 못하고, 지붕에는 많은 눈들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다.

지붕 위에서 유선통신작업을 하던 중 발을 헛디더서 지붕아래로 떨어질 뻔하다,

가까스로 지붕 끝자락에서 멈춰 설 수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너무 들었다.


그해 그날인 듯싶다. 아버지도, 회사 작업장에서 지붕 위 눈을 치우시다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그때 머리를 크게 부딪혀서, 한동안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하고 말을 못 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군에 있는 아들이 걱정할까 봐, 어머니와 동생은 나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또한, 집에 전화할 때에도 아버지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정기휴가날, 집으로 전화를 했을 때, 아버지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군복을 입고 바로 고향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날, 펑펑 울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심각했던 아버지의 상황을 그저, 아들 걱정 할까 봐 아무 이야기 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병원에 갔을 때에는 아버지는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말씀도 잘하시고 사람들도 이제 다 알아보는 상황이었다. 평상시와 똑같은 아버지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머리에 큰 충격이 있어서 그런지, 시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 앞으로는 운전을 하실 수 없게 되셨다.

그 뒤로, 20여 년을 같이 한, 아버지의 1톤 트럭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문뜩 잠자리에 누운 어느 날,

아버지 차를 탔을 때, 시트에 배여, 코 끝을 자극하던 그 기름 냄새가 너무 그리워졌다.

한때는 부끄럼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의 1톤 트럭이...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사춘기를 같이 했었던,


우리 아버지의 1톤 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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