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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에 불과한 내가

죽지 못해 사는가

by BBASCO

키가 160도 안되던 시절의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붙잡고 싶은 것들이 많았던 거 같다. 하지만 지금은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살아가는 것만 같다. 역시나 죽음의 과정은 필히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기에 그 두려움이 배는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젠 안다, 살아가는 용기가 죽을 용기만큼 어려운 것임을, 삶은 투쟁이기에.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열에 여덟은 쉬이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하는 답은 즐거움 때문이라고 말하기 일수다. 그런데 뭐가 즐거움이고 그게 정말 살아야 하는 이유인지 묻는다면 그건 좀 난해하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굳이 내가 즐겨야하는 이유를 우주적 관점에서 묻는다면 질문에 대한 답은 더 어려워진다.


일단 삶은 즐거울까? 먼저 난 언제 즐거운가를 생각해보자. 난 사람들이 비교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며,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해도 그 즐거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된다면 정말 그 자체의 즐거움이겠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나 또한 어떤 대회의 우승, 대학의 합격, 어떤 더 좋은 곳으로의 여행에서 즐거움을 얻은 기억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삶을 지탱하는 것이 즐거움이라면 투쟁은 필연적이다.

반대로 고통은 어떠한가? 난 투쟁의 과정은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투쟁이란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살아가다보니 세상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절대로. 내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기회를 뺏어야 하며, 내가 잃은 기회는 누군가가 얻은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위에 서는 즐거움(냉정하게 말한 투쟁에 의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죽지 않기위해 투쟁하며, 죽이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말해보자. 만약 정말 즐거움으로 가득찬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 즐거움을 내가 누릴 자격이 있는가? 내가? 왜? 아마 그 즐거움은 이전세대 누군가는 느꼈을 도파민이고, 이후 세대의 누군가가 다시 느낄 즐거움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누군가와 자리를 바꾼다면 그가 누릴수도 있는 즐거움이다.

우주와 물리학을 공부하다보면 아주 미시적인 세계와 거시적인 세계가 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우주가 있고, 그 우주는 대폭발로 시작되어, 먼지가 모여 만들어졌다. 쉽게 말해 우린 먼지다. 먼지 뭉탱이인 내가 다른 먼지 뭉탱이보다 우월한 이유가 있을까? 즐거움을 그가 아닌 내가 느낄 자격이나 차이가 있을까?난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 죽지 못한다는 건 죽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연결을 만든다. 그 고리들은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리 지상에 잡아두려 한다. 우리에겐 누군가의 즐거움을 빼앗을 권리도 없고 누군가에게 아픔을 줄 자격도 없다. 한낱 먼저 뭉텅이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다. 큰 의미와 먼지 뭉텅이에서 벗어나 다른 무언가가 되려 노력하는 사람들도 결국 자신이 먼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먼지에 불과한 자신이 다른 먼지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어쩌면 살아가야할 이유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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