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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결산

흔들리면서도 계속 써온 사람의 무대 (경품 증정 있음)

by 시트러스

[오프닝]

안녕하세요. 신사 숙녀 여러분.

올해의 마지막 추위가 유난히 발걸음을 늦추는 밤입니다.

2025년도 드디어 일주일 정도 남았습니다.

오늘 한 해를 되돌아보며 연말 결산, 그 화려한 무대를 엽니다!


먼저 초대 작가님의 축사로 시작해 보죠.

별로 바쁘지 않으시지만 어쨌든 오늘 무대를 위해 특별히 모셔봤습니다.


작가님? 길게 하시면 마이크가 폭ㅂ... 음량이 낮아집니다.

짧게 부탁드립니다.


불러보겠습니다. 작가님!


네, 바로 접니다.

이렇게 다들 모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뒤로 가기 누르시면 안 됩니다. 오늘만을 위해 연습한 라틴 댄스와 캐럴 메들리 100곡,

지금 바로... 어? 이거 마이크가.. 여보세요?....


네, 정말 흥겨운 무대였습니다.


연말 결산 무대는 크게 세 파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전원 vip석으로 모셨으니, 서로 인사들 나누시고... 테이블에 세팅된 와인과 치즈를 드시며 감상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요청이 있으신 분들께는 라면(순정. 계란 추가 시 별도 요청)과 새 김치 세트 세팅해 드립니다.



[올 한 해 잘한 일]

이번 결산에서 제가 가장 크게 체크하고 싶은 항목은 ‘얼마나 잘 살았나’가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나’입니다.


압도적으로 잘 붙든 일은 역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일입니다.

4월 23일 퇴근길에 신청 메일을 썼고, 다음 날 아침에 승인을 받았습니다.

기회가 날 때마다 자랑하고 있지만, 지나고 보니 한방에 붙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다시 생각해도 우쭐해집니다.


하지만 처음 3개월은 어리바리 지나갔고, 다음 3개월은 간신히 구독자 시스템을 이해했으며,

또다시 지금까지 2개월은 드디어 ‘어, 이거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 방향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이사이에는, 그만둘까 싶은 숱한 밤들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답을 주는 사람은 늘 제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글을 올리면 누군가는 읽고, 얼마 뒤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장에 밑줄을 그어 주었습니다.
그 밑줄 하나가, 다음 글을 쓰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같이 쓰는 매거진 작가님들, 그리고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네 주신 작가님들,
끝까지 읽어 주신 독자님들 덕분에 저는 이곳에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은 모두 여러분들께 빚졌습니다.



[올 한 해 못 한 일]

아, 이 분야가 정말 치열했는데요. 후보가 아주 쟁쟁합니다.

이불킥 다리 근육 경직도, 허공에 어퍼컷 횟수, “으아아, 미쳤나 봐” 혼잣말 데시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선정하였습니다.

조금 많으니 미리 와인과 라면 리필하실 분은 손을 들어 캡틴큐를 날려 주세요.

자, 그럼 여기 리스트가 공개됩니다.


-운동하겠다고 하고 약 2.5회 한 일 (0.5회는 하다가 중간에 관둠) : 저희 집 생각하는 의자, 실내 자전거에 올라 성실하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상반기에 열심히 운동했더니 얼굴살이 너무 많이 빠졌습니다. ‘못생김이 과하다’라는 주위의 평가가 기억나 소극적으로 하였습니다. 요즘은 옷이 잘 안 맞습니다.


-글 쓴 원고를 특강 강사님께 보낸 일 : 학교에 책 쓰기 특강 강사님이 오셨습니다. 글 쓴 사람은 원고를 보내 보라고 하셨습니다. 구글 등에 피드 되어 조회수가 높았던 글 세 편을 보냈습니다. 피드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잘 쓴 글이지, 책으로 어떻게 엮겠다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필력이 충분히 좋으시니, 기획서를 만들어 보세요.' 아마도 저는 ‘괜찮게 쓴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성의 있게 엮어서 보냈어야 했는데... 이렇게 강사님의 시간과 제 기회 한 번을 인정 욕구와 함께 날려 버렸습니다. 이 글을 쓰며 또 복식 호흡으로 “미쳤나 봐” 3회 발사했습니다.


-글 쓴답시고 아이들에게 발길질한 일 : 여기까지는 웃고 넘길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제 기준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퇴근 후 아이들 하원시키고 남는 시간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주로 9시부터 제 시간인데, 그때는 지쳐서 바로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조금 쉬다가 혹은 놀다가 새벽 1시, 2시까지 붙잡고 있곤 했습니다. 주말에도 ‘엄마 일한다’는 말을 방패 삼아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했습니다. 방패 뒤에서는 웃을 필요도, 아이들 얼굴을 제대로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많이 배려해 주다가도 불만이 생겼고, 아이들에게 저리 가라고 밀어내는 저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글을 쓰는 나는, 과연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말만 그럴듯해진 걸까요.

다가오는 2026년은 그 간극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클로징]

숨 가쁘게 달려온 연말 결산 무대, 이제 그 마지막 순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지고, 무대 뒤편에서 잔잔한 캐럴이 흐르는군요.
올해의 나에게, 그리고 이 무대를 즐겨 주신 여러분께 드리는 커튼콜 인사입니다.


2025년이라는 한 해를 함께 버텨 준 모든 순간들.
글이 잘 써질 때도, 전혀 안 써질 때도, ‘와— 이건 좀 괜찮지 않나?’ 싶다가도
다음 날 다시 보면 ‘아니 이게 뭐야?...’ 하던 그 모든 시간들이 어쩌면 이렇게 반짝였다는 사실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의 글을 읽어 주시고 댓글과 좋아요로 말을 건네 주신 여러분.
브런치라는 넓고 낯선 들판에서
제게는 여러분이 손난로와 귤 한 꾸러미,

그리고 밤새 불 꺼지지 않는 책상 스탠드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 이제 2026년의 무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저는, 아마도 부족한 체력으로 간신히 살만큼 운동하며 그럼에도 열심히 써볼 예정입니다.


혼자 뛰는 날들이 쌓여, 글이 되는 방식으로.

목표는 늘 같습니다. 제가 웃고, 여러분도 잠깐 피식해 주시는 글.

그러니 부디,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나 주세요.


아! 그리고 중요한 안내 말씀입니다.

오늘 관객 여러분을 위해 작은 사은품을 준비했습니다.

좌석 아래를 살짝 확인해 보시면,

2025년을 잘 견뎌낸 당신에게 드리는 미니 감사 키트(구성: 마음의 핫팩 1, 눈치 없는 용기 1, 내년에도 쓸 체력 조금)가 놓여 있을 겁니다.

실물은... 마음속에서 개봉해 주십시오.(환불 불가)


그럼 마지막으로 2025년 정중히 인사드립니다.

“올해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내년에도 계속 써보아요!”


— 커튼콜과 함께 천천히 조명이 꺼져갑니다.
여러분의 연말도 따뜻하고, 상큼한 향으로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경품도 잘 챙겨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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