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와 일기, 그 사이
1. 아무도 없는 교문, 어서 오고
방학을 했다.
어제는 근무하는 학교의 졸업식이었다. 교감선생님께서 영하 10도인데 아침 맞이를 하라고 하셨다. 식은 10시이건만 칼바람을 맞으며 8시 20분부터 서 있었다.
교문 앞은 꽃 파는 분들이 이미 점령해서 내가 서 있을 곳도 없었다. 아무도 안 오는데 꽃들을 지키며 20분을 보냈다.
식이 시작할 때 자치안전부로서 귀빈 안내 및 식장 정리를 맡았다. 행사장 입간판처럼 이리저리 아이들에게 붙잡혀서 사진을 찍었다.
우는 아이들을 달래다가 나까지 몇 번 위기가 왔다.
"선생님 우는 거 아니야. 사진 찍지 마라."
몇 명인가 아이들이 내게도 꽃다발을 줬다.
아침에 지켰던 그 꽃들 같다. 내지킴내꽃.
2. 너의 병의 이름은
하지만 이제 다 지나갔다. 방학 첫날이다.
아침 9시에 1년에 한 번씩 가는 피부과를 다녀왔다.
눈 주변 비립종을 연례행사처럼 불태우는 날이다.
이마는 피지선증식증이 있다고 하길래 1년간 술도 커피도 끊었다.
진료실에 들어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이건 한관종입니다." 나는 뭘 위해 재미없는 1년을 살았던 거지...
한관종은 레이저로 안되고 아그네스라는 기계로 치료해야 한다고 한다.
가격은 레이저의 10배였다.
피지선증식증이 더 나은 병이었다.
내 돈을 내고 얼굴을 뜨거운 바늘로 지진 다음 나왔다.
매번 생각하지만 이게 고문이었으면 나는 바로 다 불었을 것이다.
"으윽, 범인은 교감선생님입니다."
3. 꽃의 설계
집에 오니 얼굴은 화끈거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오늘은 글도 쓰기 싫고, 책도 싫었다.
'제일 좋아하는 거 할 거야. 하루 종일 놀 거야.'
크리스마스때 하려고 사둔 레고를 꺼냈다.
꽃 조립에 들어갔다.
눈과 귀가 심심하니 유튜브 영상을 틀었다.
요망한 알고리즘이 지미팰런 투나잇쇼를 추천해 줬다.
메탈리카가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쓸 법한 악기들로 'Enter Sandman'을 연주했다.
홀린 듯이 연속 두 번을 들었다.
https://youtu.be/GXJifYl_byU?si=NmooWQ_4g4cFRC3r
4. 메탈리카를 듣는 오후(feat. 초등학교 악기)
매번 오브라이언쇼나 프렌즈가 떴던 알고리즘에 이제는 온통 지미팰런이 떴다.
노래도 잘하고 말도 잘한다. 모난 곳 없이 웃긴데,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지미팰런과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노래하는 영상을 들으며 꽃을 만들어갔다.
배가 고파서 집에 있던 스콘에 밀크티를 타먹었다.
아크바 티백에 그냥 우유를 데워 마시는데, 밀크티 장기 복용자로서 찐맛템이다.
그러고 보니 밀크티도 카페인 대신 선택했다.
'교감샘 먼저 불까, 그 피부과 의사 먼저 불까...' 마음속으로 혼자 데스노트를 썼다, 지웠다 했다.
이제 꽃을 거의 다 완성했다. 삭막하고 생기가 없는 것이 딱 내 취향이다.
물론 생화도 좋아하지만 딱 떨어지는 레고 꽃도 좋다.
5. 선반 배선, 그거 엏떻게 하는 건데?
고등학교 때 인적성 검사를 했었다. 당시 1위 적성은 선반 배선공이었다.
항상 생각해 오던 문과형 직업이 아니어서 1차, 선반 배선공이 뭔지 몰라서 2차로 놀랐다.
그날 처음 알았다.
난 계산은 잘 못해도 구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영어 1등인데 수학은 그 절반도 안되기로.
그리고 그 소문은 우리 담임선생님이 내고 다니셨다.
"우리 반에 진짜 멋진 애가 있는데, 수학 성적이 어휴...."
... 데스노트에 한 명을 더 추가했다.
레고가 배선공과 큰 관련이 없을지 몰라도,
암튼 나는 구조 짜기, 설계하기 등등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걸 하니 행복했다.
6. 아무래도 좋은 하루
저녁시간을 마무리하고 혼자 앉아 화병을 완성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으로 채운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겨본다.
좋은 기억들이 모이니 지나간 일들은 그럭저럭 재미있었던 과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침맞이를 해서 꽃이 더 반가웠고, 다른 변병이니 이제 술을 퍼 마셔도 된다.
선반 배선공의 보람찬 하루가 이렇게 저문다.
내일은 좋아하는 책 필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방학 첫 데스노트, 아니 일기를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