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가 된 여고생 2
1. 문지방은 참았지만 수학은 못 참았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문지방에 발을 찧어도 울지 않았다.
욕이 튀어나올지언정, 눈물은 끝내 삼켰다.
그런 내가 우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수학.
수학 공부의 고뇌를 짊어진 그 시절.
내 별명은 할매였다.
여고생에게는 다소 치명적인 별명이다.
2. 여고생 할매의 친구들
내 친구들은 돼지, 감자, 절도.
언뜻 범죄 집단 구성원 이름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좀 통통하고, 까맣고,
절대 도움이 안 될 뿐, 착한 친구들이었다.
1998년, 고 2 그 시절.
그 해는 유독 비가 자주 내렸다.
학급일지 담당이었던 나는 오늘의 날씨에
'흐리고 비'를 자주 써넣었기에 기억이 난다.
3. 흐리고 비, 그리고 교무실 가는 길
고등학교 때 나는 교내 백일장에서 크고 작은 상을 탔다.
정작 대상을 탄 건 시 부문이었는데,
왜인지 학급 일지를 쓰게 되었다.
오전에 교무실로 가서 학급일지를 가져와 기록하고,
종례 후 꽂아두는 것이 내 임무였다. 그런 이유로 출석부 담당 친구와도 친해졌다.
시크하고 목소리가 낮은 그 친구에게 '귀염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질색할 때마다 몹시 뿌듯했다.
4. 회원 수 2명, 허리 펴기 동호회
귀염둥이와 나는 '허리 펴기 동호회'도 만들었다.
회원은 우리 둘이었다.
교실에서 마주치면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자신의 눈을 가리킨 다음, 휙 돌려 상대방의 허리를 가리켰다.
평소에 허리가 구부정했던 우리는, 흠칫 자세를 펴고는 했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시를 쓰고,
흐리고 비가 오는 날씨 속에,
구부정한 우울함
그 어딘가를 헤매는 학생이었다.
5. 수학, 전쟁과 사랑
내 우울함의 원인은 수학 공부였다.
그때는, 어떤 난관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나는 답안지에 답을 모두 쓰고도 시험지를 덮지 않는 아이였다.
늘 끝에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차라리 다음 시간을 위해 잠시 엎드려
숨을 고르는 게 나을 수 있어도, 그러질 못했다.
해도 해도 잘 안 되는 수학 공부 역시 놓기가 힘들었다.
쉬는 시간마다 수학선생님을 찾아갔고,
오답 노트 표지에는 '수학 타도',
'홍성대(수학의 정석 저자) 사랑해'를 써넣었다.
타도하고 싶지만 또한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고뇌에 찬 청춘의 표지였다.
오답 노트를 들고 교무실로 가는 길은 늘 멀었다.
마치 영원히 닿지 못할,
수학 타도의 '정답과 해설'로 가는 길만 같았다.
6. 아, 이걸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달랐을까.
덜 예민하고 덜 우울했을까.
친구들과도 더 자주 웃었을까.
수학 공부를 조금 못해도 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고,
영어교육과에 갔더니 수학의 ㅅ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교육학 개론에 교육 통계가 나왔을 땐 좀 좌절했다.)
"할매, 니 또 수학 공부 하나." 친구들은 내가 쓴 시를 돌려 읽으며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또 홍성대 옆에 하트 그린 거 봐라." 절도는 주로 도움 안 되는 말을 했다.
"할머니, 고마 시 써서 대학 가면 어때?"
착한 돼지가 말해도 기분이 나빴다.
할매도 아닌 할머니라니, 어쩐지 더 기분이 나빴다.
7. 틀려도 계속 붙드는 사람
아마 그때 알았어도 나는 수학 공부를 놓지 못했을 것이다.
부딪히고 좌절하고, 또 풀고 또 틀리고.
매번 실망하고 우울해도 아마 다시, 또 도전할 것이다.
여전히 나는,
'해봤자 안 되는 사람'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안되지만 해보는 사람'을 또, 택할 것이다.
종착지는 같을 수 있다.
하지만 그곳으로 이르는 길은 완전히 다르다.
8. 용기와 바꾼 자부심
나는 요즘도 가끔 수학의 정석을 펴본다.
저자 이름 옆에는 하트 표시가 그려져 있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라는 걸 나이가 들면서 배웠다.
그럼에도 그때, 그런 용기를 내지 않은 자신을 오히려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
고3 때까지 외롭게 수학 공부에 매달렸던 그 시간은
큰 결과도 없이 끝이 났다.
하지만 내 안에서 그 시간은,
'나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표지를 달고
잘 머물러 있다.
9. 나의 땅은 내가 헤맨 만큼 넓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수학 공부'가 있다.
단지 미적분과 함수가 아니어도,
부딪히고, 실망하고,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무언가.
모든 헤매는 자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자꾸 돌아가고, 서성이고,
틀린 길로 들어섰던 것 같지만
그 모든 발자국이 나만의 방향을 만들었다.
결국, 헤맨 만큼이 내 땅이다.
오랜만에 허리 펴기 동호회 회원으로서,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 해본다.
10. 답 안 나와도 계속 푸는 중
요즘 나의 '수학'은 글쓰기다.
시간이 부족한 날도 있고,
글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날도 있다.
하지만 ‘쓰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매일 쓰거나 고치거나—그마저도 어려운 날엔 다른 글을 읽는다.
그렇게 다시, 한 줄씩 써 내려간다.
허리를 쭉 펴고, 오늘도 한 편을 시작한다.
나는 허리 펴기도,
문지방에 발 찧고 안 울기도,
정답과 해설로 가는 그 어떤 길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