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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짱 Mar 15. 2022

프렌치 디스패치

중립에 서서는 포착할 수 없는 지면 뒤의 세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은 세계를 포착한다.

대체로 많은 예술 활동이 상상 이전의 관찰을 전제로 하는 건 예술이 반영하는 것이 아예 우리와 동떨어진 먼 이상이 아닌 탓이다. 하물며 SF소설과 영화에서조차 우리는 우리 고유의 삶을 찾아내니 인간은 인간을 떠나 살 수 없다는 명제가 어느 곳에서든 들어맞는 셈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 웨스 앤더슨은 약 7년만의 실사 영화 연출작을 내어놓았다. 이번에도 종이 냄새 함빡 묻은, 말 그대로 '활자로서의 영화' 그 자체다.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잡지의 이름을 그대로 영화 제목 삼은 이 영화는 구성마저도 잡지처럼 섹션을 나눠 진행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보다도 과감한 섹션 나누기는 서로 이어지지 않는 별개의 스토리, 별개의 장르를 다루는 듯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옴니버스니 앤솔로지니 하는 구성을 훌륭하게 메꾸는 건 영화의 시작부터 부고를 맞이한 편집장을 통해서다. 물론, 이 '봉합'의 과정이 효과적이고 훌륭하게 이루어졌다고 극찬하진 않겠으나 적어도 떨어지려는 단추의 끝부분을 실로 매듭지어 붙잡아두는 정도의 역할은 되었다. 더불어 마지막에 잘 봉합된 단추를 보며 '좋은 영화였지'하고 회상하게 만드는 기이한 효과 역시.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럼 다시 맨앞의 문장으로 돌아가서, <프렌치 디스패치>가 말하는 '포착'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프렌치 디스패치의 네 기자가 펼쳐내는 각각 다른 세계는 여행과 예술, 운동과 요리라는 별개의 카테고리를 가지고 진행된다. 이들의 문장 아래에서 개인의 삶은 감동적이거나 아름답게, 익살스럽거나 위대하게, 초라하거나 우울하게 조리되어 대중의 앞에 등장한다. 적어도 프렌치 디스패치로 볼 때의 기자란 자신이 포착한 장면을 어떻게 '대중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지, 그 능력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듯 보인다. 세계의 내밀한 부분을 파헤치는 과정, 위대한 업적이나 아름다운 도시, 달콤한 요리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바라보는 기자들의 시선에 각각 차별점이 발생하는 건 기자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신다 클레멘츠의 섹션에서 우리가 들었듯이, '언론의 중립성'이란 게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문 역시 발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이 포착해낸 세계의 진실에 '그들의 방식'으로 주목한다. 가령 아름다운 도시 안의 몸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 더 이상 갈 곳도 할 수 있는 것조차 없는 노인들의 모습과 정신병동에 갇혀 우울증을 앓으며 죽음을 기다려 구강세정제를 들이키는 범죄자들, 자유를 위해 어른을 향한 투쟁을 하는 청소년과 바삐 돌아가는 도시 한쪽에서 버티고 살아가는 이국의 사람들. 어디선가 무시당하고 나약하고 상처받거나 다친 사람들이 잡지에는 하나둘 실린다. 그 아름다운 도시, 화려한 예술계, 위대한 운동 뒤에 숨은 아주 일반적인 삶과 고뇌들. 기자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언론의 중립성을 지키며 세계의 일면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은 제1의 과제지만, 인간의 시선이 아니고는 포착할 수 없는 뒤의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래서 편집장은 로벅 라이트의 구겨버린 마지막 페이지를 집어들며 말한다. '이 부분이 가장 낫군.' 아이러니하게도 네스카피에 경위의 마지막 고백은 로벅 라이트가 '슬퍼서' 담지 못하겠다 말한 문장들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는 계속해서 포착과 발견을 거듭한다. 편집장 아서가 네 명의 기자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곁에 두었으며 그들의 글 안에서 가장 괜찮은 문장을 포착해 강조하듯이, 네 명의 기자들 또한 세계의 어느 일면을 자신의 시야 안에서 눈에 담고 글로 적는다. 단순히 사건을 아름답고 재밌게 묘사하는 과정의 '긍정'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이들의 시야 안으로 겪은 세계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주관적이며 때때로 신뢰도를 상실하기도 한다. 다만 이 영화의 마지막, 세계를 포착하는 네 명의 기자를 발견한 편집장의 삶이 다시 네 명의 기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다시 적히는 커다란 순환의 구조를 보며 생각한다. 예술과 저널리즘의 차이 혹은 공통점에 대해, 세계를 포착해 지면에 넣은 기자들과 그들을 발견해 잡지를 기고한 편집장, 더 나아가 이들의 일면을 포착해 꼭 지면 위에 세세하게 묘사하듯 영화로 포착해내는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에 대해. 우리는 늘 세계의 일면을 우리의 눈으로 보고 타인에게 알린다. 사실은 호도되나 우리의 세계는 얼기설기 엮어둔 실처럼 봉합되고, 타인의 세계는 나의 세계가 된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이면서 주관적이고, 더불어 위대한 사건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과정을 통해 세계를 알고 넓혀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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