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과 다름없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KBS 클래식 라디오를 들으며 출근하던 지하철 안. 3류 카피라이터의 야망으로 잉태된 듯한 성형외과 광고 소리가 울려 퍼질 때쯤이면 종점에 도착한 것이기에 남자는 감았던 눈을 활짝 떴다. 시야를 잠시 가리던 형광등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그윽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자리해 있었다. 속 마음을 들킨 것이라 생각했을까. 당황한 듯한 여자는 새침한 표정으로 급히 자리를 떴다.
늘 같은 시간에 타는 서울 외곽의 지하철이기에 낯이 익은 얼굴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이 아가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뽀얀 얼굴을 가득 덮은 커다란 헤드셋을 쓰고는 피곤에 절은 듯 늘 꾸벅꾸벅 조는 모습 때문일까. 퀭한 눈이 영화 ‘La Strada(라 스트라다)’에서 야수 같은 남자에게 착취를 당하다 버려지는 서커스단 여주인공 젤소미나(Gelsomina)를 떠올리게 하며 안쓰러움을 부르긴 했지만, 아쉽게도 크록스 위로 걸친 하얀 양말의 출근룩은 그 남자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후 여자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그에게서 다른 여자도 사라지고 말았다. 졸지에 남자는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女のいない男たち)’ 속 화자처럼 되어 버렸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 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를 데려가는 것은 간교함에 도가 튼 선원들이다. 그들은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여자들을 꼬여내, 마르세유인지 상아해안인지 하는 곳으로 잽싸게 데려간다. 그런 때 우리가 손쓸 도리는 거의 없다.”
시작은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녀는 모른다.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 잊고 지내다 어느 해인가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게 되지만, 남자는 확신을 갖지 못한 채 그만 엇갈리게 되었다. 또다시 둘 사이엔 운명의 테스트를 기다리는 시간이 흘러만 갔다. 몇 년 후 다시금 그녀와 마주한 남자는 이번엔 용기를 갖고 다가갔다.
달달함이 버무려진 사랑의 속삭임이 오고 갔고, 남자는 이제껏 어떤 여자에게도 들려준 적 없이 아껴왔던 사랑의 약속을 그녀에게 얘기해 주었다. 명확히 마음을 표현해주진 않았지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위에 놓인 붉은 장미꽃 한 송이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랑의 약속은 확실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20년 가까운 시간은 그녀를 지나치게 조심성 많은 성격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었을까? 좀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에 그녀는 계속 주저하기만 했다. 기다리던 남자에게는 다른 일로 힘든 상황이 닥쳐왔고, 사랑을 표현할 만큼 부드러운 마음의 결을 도저히 펼칠 수가 없는 때였다. 더 이상 설렘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한 송이 장미꽃은 생기를 잃고 점점 시들어만 갔다. 단 한마디의 확신의 언어만 들려주어도 생기를 되찾은 장미는 부활할 수 있을 텐데.
두 여인이 동시에 사라진 지금, 남자는 앳된 청년 시절에 보았던 영화를 떠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마지막 장면에 흐르던 멜로디다. 자신에게 찾아온 구원과도 같은 순수한 여인을 외면하고 결국 죽게 만든 냉혹하고 난폭한 사내의 인생에 밤 바닷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 없는 젤소미나가 부르던 트럼펫 멜로디. 파도 속에서 몸부림치며 자신의 진면목을 마주하게 된 사내는 흐느껴 우는 것이다. 이제는 짐승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우리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마음의 귀를 기울여 젤소미나의 트럼펫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닐까?
견고한 에고를 깨뜨리고 가면을 벗어 진실된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어느 화창한 봄날 저녁의 노을을 바라보며 남자는 그렇게 생각에 잠기다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토록 처연한 멜로디조차도 그녀가 흥얼거리면 장난스레 들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