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뮤어 트레일의 절반 뮤어 패스

뮤어 패스를 넘어 에브루션 메도우

by 산달림

다음에 다시 이 길을 걷는 기회가 있다면 좀 더 여유로운 일정으로 걷고 싶다. 이런 대자연을 마음껏 즐기며 걸어야 하는데 시간에 쫓기듯 걷다가 이 길의 끝에 서면 후회가 될 것 같다.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계속되는 새벽 기상이다. 계획된 일정에 뮤어 렌치 식량조달을 위해서는 오늘도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어젯밤 우리 아래쪽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탠트를 쳤는데 부자간에 식사 준비도 같이하고 모닥불도 피워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이 정겹게 보이고 많이도 부러웠다. 그간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그간 나는 나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리 바쁘게 살다 보니 속 마음을 열어 놓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냥 일상적으로 아버지와 아들로 살아왔을 뿐이다. 이렇게 땀을 흘리며 같이 길을 걷고 힘든 순간들도 함께하면 친구 같은 사이로 다정하게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집도 아니고 도회지의 콘크리트 숲 속 어느 레스토랑도 아닌 대자연에서 부자간의 격의 없는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

밤 기온이 많이 내려간다. 밤새 서리가 내렸다.

어제 홀로 먼저 앞서 내려와 혼자 저녁식사를 했던 분이 아침식사는 같이 하려고 코펠과 가스버너를 가지고 나왔다. 어쩐지 분위기가 냉랭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면 금세 마음의 문을 열 텐데 끝내 서로 말문을 열지 못한다. 눈치만 보며 뜨거운 물을 알파미 봉지 속에 붓고 15분을 기다린다. 반찬도 없이 수프로 비벼서 뱃속에 집어넣었다. 먹고 나도 뱃속이 헛헛하다. 좀 더 먹었으면 싶지만 먹을 게 없다. 서둘러 짐을 챙겨 오늘도 길을 나선다.


오늘은 존 뮤어 트레일의 절반 정도가 되는 뮤어 패스를 넘는 날이다. 여기서는 계속 오르막 길을 걸어야 한다. 밤새 기온이 많이도 떨어졌다. 출발할 때부터 오리털 패딩에 털모자를 쓰고 장갑도 꼈다. JMT길은 겨울과 여름이 동시에 느끼는 하루다. 힘든 오르막을 오르는데 싸늘한 기온 탓에 땀이 나지 않는다. 간밤에 서리가 풀잎에 내려 뽀얗게 보인다.

뮤어 패스로 올라가는 길에는 여러 개의 호수를 연이어 만난다.

뮤어 패스로 오르는 길은 '물의 길'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이런 높은 산중에 물이 흐르고 폭포가 나타나고 호수가 연속으로 이어진다. 물길이 있는 곳에는 풀들이 초원을 이룬다. 뮤어 패스를 넘기 전에는 헬렌 호수가 있고 패스 넘어 서면 완다 호수가 있다. 완다는 존 뮤어의 큰딸 이름이고 헬렌은 그의 작은딸 이름이다. 존 뮤어 트레일은 그의 이름과 가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 많다.

지난겨울에 내린 눈이 남아 한여름에 눈을 밟고 지난다.

뮤어 패스 좌우에는 솔로몬산과 웰로우산이 있다. 늘 고개는 그 산맥의 가장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JMT의 비교적 큰 9개의 고개 중에 많은 트레커들이 마더 패스가 힘들다고 말하지만 남진하는 경우이고 북진하는 트레커에게는 뮤어 패스가 가장 힘든 고개 중 하나이다. 수많은 호수가 한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가 있고 물길이 있다면 아직 고개가 멀었다는 것이다. 오름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뮤어 패스를 오르기 전 만나는 가장 큰 호수는 헬렌 호수로 존 뮤어의 작은 딸 이름을 붙인 호수로 하늘과 호수의 색깔이 어쩜 그리도 닮았는지 반영된 색갈이 똑같다.

12km가 넘는 길을 쉬지 않고 오른다. 앞서간 분도 있고 뒤에 걸어오는 분이 있어 이제는 나만의 페이스로 헬렌 호수와 주변의 풍광을 즐기며 올랐다. 지금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은 이런 시간이 좋다. 고산에 느끼는 무거운 몸으로 한걸음 한걸음을 더해 간다. 그렇게 걷는 다리의 힘은 무섭다. 오르고 오르면 언젠가는 패스에 올라설 것이다. 가끔은 뮤어 패스를 넘어 내려오는 트레커에게 부탁해 사진을 남겨 본다.


패스에 오르기 전에는 돌로 만 이루어진 너덜길이다. 올라 온 곳이 까마득하게 보이고 하늘이 점점 가까워지면 고갯마루가 가깝다는 표시다. 힘들게 올라선 고개에는 멀리서 보아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존 뮤어 대피소(Muir Hut)가 있다. 존 뮤어 트레일에 있는 유일한 건물로 1930년에 지어졌다. 건물의 형태는 이탈리아 트롤로 헛(Trullo Hut) 양식을 본떠 만든 것으로 하부는 사각형 모양으로 돌을 쌓고 천정 부분은 원추형으로 쌓아 굴뚝까지 갖추고 있다. 내부에는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가 있고 작은 창문이 있어 밖을 내다볼 수도 있고 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게 해 준다.

뮤어 패스에는 뮤어 헛이 있다. 무인 산장으로 존 뮤어 트레일에 있는 유일한 건축물
천정을 원추형으로 쌓아 올린모습

대피소 벽에는 수염을 길게 길른 존 뮤어와 마주보고 있는 시에라 클럽의 회장인 월리엄 코비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이곳 대피소의 연혁과 건물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존 뮤어 트레일은 존 뮤어 본인도 모르는 길이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뜻을 기려 트레일을 만들었는데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전해야 하는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트레일 길을 만들었는데 1915년 캘리포니아 주에서 당시 1만달러 공사비로 시작하여 23년간에 걸쳐 트레일 길을 만들고 마더패스를 끝으로 1938년에 완성한 길이 존 뮤어 트레일이다.


초대 시에라 클럽의 회장을 지낸 존 뮤어와 월리엄 코비 시에라 클럽 회장

등산을 다닐 때 자주 사용하는 스테인리스로 된 자루가 달린 컵을 시에라 컵이라 부르는데 시에라 컵은 미국의 환경보호단체인 시에라 클럽이 환경 모금운동 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제작하여 판매하게 된 것으로 그걸 사용하는 사람은 존 뮤어의 자연보전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시에라 클럽은 1892년 설립된 가장 오래된 환경운동 단체로 존 뮤어가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마운틴 에세이'에는 아무리 지쳐 있더라고 '산에서 하루를 보내며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면 도중에 기운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수를 누릴 운영이건 파란만장한 삶을 살 운영이건 그 사람을 영원한 부자다.'라고 하였다. 산에서는 부자도 가난뱅이도 가리지 않고 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새로운 힘을 얻고 치유를 할 수 있는 곳이 산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는 사진작가 겸 작가인 그녀가 꼼꼼히 뮤어 산장을 취재 중

반대쪽에서 올라온 여자분이 열심히 뮤어 대피소를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기에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니 포토그래퍼이며 작가라고 한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왔다고 하며 문고리 하나, 내부에 돌 쌓은 모양까지도 꼼꼼히 사진을 찍는데 카메라 기종은 니콘 5300이고 뮤어 대피소를 취재한단다. 그분에게 사진을 부탁하여 몇 장의 사진을 남겼다.

두 아들과 JMT를 구간 종주 중인 부자가족

후미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추워서 옷을 꺼내 입어도 춥다. 바람이 넘나드는 패스는 오래 머물 곳이 되지 못한다. 쉬지 않고 올랐기에 체력에 따라 후미와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럴 때는 중간에 두 번 정도 쉬면서 비슷한 시간에 올라오는 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다. 양지쪽에 쪼그리고 있는데 아빠와 두 아들을 데리고 올라오는 트레커가 있다. 이곳은 친구와 함께 트레킹에 나서기도 하지만 가족단위 트레킹족이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많다. 대학입시에 매달려 책바라기만 해야 하는 우리 현실은 자식과의 추억을 만들기 힘들게 한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마 1시간도 넘게 기다린 끝에 발이 아프다는 여자분이 불편한 몸으로 힘들게 올라온다. 그리고는 배낭을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펑펑 운다. 발이 아파 우는 건지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우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참을 울고 난 후에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 아프다고 하니 족저근막염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건 금방 낫을 병이 아니다. 아직 절반은 더 걸어야 하는데 걱정이고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마땅히 탈출로가 없어 탈출하고 싶어도 탈출이 어려운 JMT길이다.


우선 오늘 길을 걷기 위해 그녀의 짐을 나누기로 했다. 2.5kg 정도의 물건을 받아 배낭에 쑤셔 넣었다. 이제 패스를 넘었으니 내리막 길이다. 뮤어의 큰딸 이름을 딴 완다호 수로 내려갔다. 호수의 물빛이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띠고 송어가 헤엄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3,000m가 훨씬 넘는 고산 호수에 송어가 살고 있다는 게 놀랍다. 설마 레인저가 송어를 공수해서 풀어놓은 건 아니겠지. 호수 가운데는 작은 섬도 있다. 잔설이 남아 있는 주변의 바위산들과 조화롭게 어울린다.

뮤어 패스를 넘으면 만나는 존 뮤어의 큰 딸 이름으로 지은 완다 호수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호수로 이어진다. 사프 호수(Sapph Lake)도 뒤에 우뚝 솟은 허밋봉(The Hermit 3,757m) 아래 아름답게 빛난다. 길은 계곡을 따라 에블루션 호수까지 이어진다. 무척 큰 호수고 물빛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깊이에 따라 색깔을 달리한다. 역시 JMT 길은 '물의 길'임을 다시 확인한다.


에브루션 호수에 도착했는데 아직 한낮의 열기도 사라지지 않은 시간인데 오늘 걸을 거리를 다 걸었다고 탠트를 치자고 한다. 아닌데?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늘에 배낭을 내려놓고 꼼꼼히 지도를 보고 거리를 계산해 보니 여기서 야영을 하면 내일 뮤어 렌치에 가서 오후 5시까지 식량을 받기가 빠듯한 시간이다. 아직 시간도 여유가 있을 때 좀 더 걸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모르는 척하고 그냥 따라만 가도 되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라 여기는 에블루션 호수지 에블루션 메도우가 아니라고 알려 줬다. 대원들 모두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여기는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야지 토를 달면 문제아로 취급되는 조직이다. 이런 문화는 예전 80년대 군사문화에 젖어 있던 산악회에서 운영하던 방식이었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지도자의 천부적 재능 혹은 초월적 자질을 가지고 행하는 리더십인데, 그게 여기에는 아직도 존재한다. 요즘은 박항서 감독의 파파 리더십인 서번트 리더십이 통하는 시대다. 리더가 봉사와 섬김의 정신으로 구성원의 아래에서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동정심을 가지며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뮤어 패스를 기준으로 많은 호수를 만날 수 있는 물의 계곡의 에블루션 호수


요즘 산행에서 많이 사용하는 GPS는 부분을 무엇보다 잘 알 수 있지만 전체를 즉시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걸 보완하는 게 종이 지도인데 Gps에만 의존하다 보니 생긴 실수인 것 같다. 다시 배낭을 메고 어블루션메도우를 향해 출발했다. 에블르션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걷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오늘 많이 걸어두어야 내일 식량보급을 받는 뮤어 렌치까지 가는 길이 가까워 지기에 2시간을 더 걸어 에블루션 메도우에 도착해 계곡가에 탠트를 쳤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재미도 존 뮤어 트레일에서 즐기는 멋

탠트를 치고 주변의 땔감인 나뭇가지를 주워 모닥불을 피웠다. 계곡수가 좋아 밀린 빨래를 하여 모닥불 주변에 걸쳐 놓으니 건조한 기후에 불기가 있어 쉽게 마른다. 내일이면 식량보급이 있는 날이라 내일 아침 식량과 점심의 행동식을 빼고 남은 것을 다 먹어야겠다. 곰 통에 먹을 식량은 없고 그간 모아둔 쓰레기만 가득하다. 내일이면 이 곰 통을 가득 채울 식량이 있다는 것이 마음 뿌듯하다.


내일도 열심히 걸으려면 일찍 탠트에 들었다. 침낭 안이 어머니 품 안처럼 포근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도 그날이 유일한 하루다. 이미 사라진 별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것처럼 사라진 후에도 향기는 빛이 난다. 에볼루션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