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
이제 산티아고 길의 끝이며 로마인들이 세상의 끝이라 여겼던 피니스테라로 걷는다. 여기는 바닷가라 그런지 공기가 건조하지 않아서 밤 11시에 자고 아침 5시에 일어났는데 개운하다. 그간 건조한 기후 탓에 목이 말라 잔기침으로 물을 자주 마셨는데 그게 묵시아에서 저절로 나았다. 성령인가? 참 반가운 일이다. 새벽 일찍 배낭을 꾸리는데 여자 순례자도 덩달아 배낭을 챙긴다. 그녀와는 구면인데 산티아고에서 뻬뻬와 첫날 같이 걸을 때 만난 스페인 여인으로 운동을 많이 한 듯 날렵한 몸매다.
그녀는 피니스테라에서 왔기에 내가 걷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어제 걸은 길을 걷는단다. 새벽인데 공기가 차지 않아 출발 때부터 바람막이 옷을 벗고 간편하게 출발을 하였다. 피니스테라를 가는 길은 초반에 오름길이 많아 힘이 들 수 있고 땀이 날 수 있으니 체온조절을 위하여 바람막이를 입고 걷는다.
묵시아를 벗어나면 해변을 따라 걷는데 새벽의 검은색 바다와 파도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묵시아다. 멀리 뒤에서 한분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나중에 만나고 보니 독일인이다. 카미노를 가장 많이 걷는 나라의 국적은 이탈리야와 독일인이 가장 많은데 가까운 지리적 위치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바닷길이 끝나고 산길로 접어드는데 뒤에서 일출이 시작되는데 서산에는 아직 그믐달이 조그맣게 걸려 있다. 그새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 시간은 그리도 빨리 흘렀다. 오늘 길은 소나무와 유칼립투스가 함께 있는 순례길이다. 카미노 길 표시는 묵시아와 피니스테라 방향의 길이 양쪽 다 표시가 되어 있어 길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에 마트에서 산 일회용 컵밥과 계란까지 든든히 챙겨 먹고 왔더니 뱃속이 든든해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길 위에서 잘 버티려면 잘 먹어야 잘 걷는다. 혼자 걸을 때는 주변 풍경 사진을 찍으며 걸으니 심심하지 않고 풍경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위도상으로 한국과 큰 차이가 없어 소나무도 잘 자라는 것이 고향 시골 마을 풍경이 많이도 닮았다.
피니스테라와 묵시아 사이에는 알베르게가 한 곳밖에 없고 바르도 별로 없는 한적한 시골이다. 묵시아 초입에는 아침을 먹지 못한 뻬레그리노(순례자)를 위한 이동식 바르가 있긴 했다. 이곳에서 커피도 한잔 할 수 있고 세요를 받을 수도 있는 곳이다. 중간지점쯤 되는 곳인 바다가 보이는 곳에 바르는 문이 닫혀 있었다. 출발할 때 점심과 간식을 준비하여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늘 걷는 거리는 30km 정도로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다. 어? 여기서 독일인 친구를 또 만났다. 카미노 길에서 끈질긴 우연의 만남이었다. 오늘은 어떻게 만났는지 독일인 여성 3분과 걷는데 그들은 여유롭게 느긋이 걷는다. 그와 보조를 맞추어 걷기에 먼저 걸었다.
생장에서 출발할 때 만났던 양주에 사는 박처자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그간 사연을 들어 보니 우리보다 하루 정도 늦은 일정으로 걷고 있었고 초반에는 다리가 아파 고생을 했는데 후반에는 완전히 적응해 걷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여기까지 씩씩하게 잘 걸어온 게 대견스럽니다. 인연이란 게 참 묘하다.
그녀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료는 어제 무니시팔에서 묵고 오늘은 다른 알베르게를 구해서 옮긴다는 말도 전해 준다. 그럼 씨(Sea)에서 15km만 걷고 피니스테라에서 죽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자신에게 휴식을 상으로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쩜 오늘 피니스테라에서 극적인 재회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만나면 많이 반가울 것이다.
길을 같이 걷다 보면 사랑스럽기도 했다가 밉기도 했다가 미안하기도 했다가 감사하기도 했고 정말 복잡한 감정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알다가도 모를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어떤 날은 왜 내가 이 길을 선택했나 후회를 했다가 저녁이 와인 한잔에 정말 내 인생에 가장 잘 선택한 일중 하나가 산티아고 순례길 걷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씩 바다가 보이는 길을 걷다가 제재소를 지나 쉬고 있는데 독일인 친구가 지름길로 와서 재회를 하였다. 마침 기부금을 내고 먹는 무인 간이매점이 있어 여기서 그들과 사진도 찍고 즐거운 재회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간 가지고 다니던 태극선 부채를 선물로 주었더니 신기해하며 고마워한다.
이제 피니스테라가 보이는 해변이 가깝다. 바다를 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바닷길을 걷기 위해 백사장을 지나 코발트빛 해변으로 나갔다. 대서양 바다다. 어쩜 이리도 깨끗한가? 제주 서귀포 바다도 깨끗했는데 더 깨끗한 쪽빛 바다다. 하얀 모래와 바다 깊이에 따라 달라지는 바다 색깔. 그냥 아름답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해변에는 일광욕을 즐기는 서양인이 많은 곳을 지나니 피니스테라가 가깝다. 도로를 따라 가는데 숙소 호객을 하는 현지인도 보인다. 오늘은 무니시팔에 묵기로 하고 찾아가니 13:30부터 접수를 받는단다. 줄지어 있는 배낭 뒤에 내 배낭도 줄을 세웠다.
열심히 걸어왔더니 갈증이 심했나 보다. 근처에 있는 가게에 가서 맥주 1캔을 마셔 주고 알베르게 접수를 하는데 피니스테라 완주 증인 피스테라나(Fisterrana)라는 증명서를 한 장 받고 2층에 올라가 침대에 짐을 풀었다. 건너편 식당으로 가서 델 디아 메뉴로 와인까지 한잔하고 땅끝마을 0km 표지석을 찾아 나섰다.
정열의 나라답게 이곳의 날씨도 낮에는 더워에 땀이 삐질삐질 난다. 어? 여기서 독일인 긴 수염 친구를 다시 만났다. 그는 벌써 다녀온다고 했다. 2.3km의 거리 피니스테라. 그곳에 섰다. 이곳을 로마인들은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한 땅끝마을이다. 그때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여기가 세상의 끝으로 생각을 했단다.
시작점인 "0km 지점" 십자가가 있는 곳에서 순례길은 끝이 난다. 청동으로 만든 등산화가 있고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그간 신고 온 신발을 태우면서 순례 마감 의식을 한다. 피니스테레가 길의 끝이 세상의 끝이 보였을 때 세상의 끝과 끝까지 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생각났다. 길의 끝으로 다가 갈수록 길은 저 홀로 아름다워졌다. 땅끝 바다가 보이는 바위에 올라 한동안 명상의 시간을 보냈다. 생장에서 출발할 때 가슴 설레던 추억이 오롯이 떠 오른다. 나는 길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그간 걸어온 카미노에서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떠 오른다.
하얀 등대가 서있는 절벽에서 보는 바다는 잔잔하고 검푸르고 수평선은 까마득히 멀리 보인다. 그 바다를 보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눈에 아른거린다. 지금 이 순간은 더 이상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내 삶에 감사한다. 모든 것이 흘러가서 아무것도 잡아 놓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인생은, 삶은, 현재는, 단 한번, 순간이기에 슬프고도 아름다운 것.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